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속단했던 우리 둘의 서글픈 인연
- 이문세 -
경기도 이천. 나는 지금 이천 바로 옆 경기도 광주 시민이 된 지 13년째이다. 어떻게 나는 고향 대전에서 이곳까지 흘러왔는가 생각해 보면 참 인생은 알 수가 없다. 이천과 나는 별로 상관이 없지는 않다. 위의 글에서도 나왔지만 서울에 올라와서 사귄 친구가 바로 이천에 살았다.
2층에 작은 밥집 겸 술집을 했는데 그 친구는 채팅 사이트에서 알게 된 닭띠 동갑내기였다. 내가 서울에 올라온 건 독립영화협의회의 워크숍 때문이었고 워크숍을 마치고는 동기랑 무슨 프로덕션 작은 영화사를 한다고 또 한참을 의기양양하게 지냈다. 그 친구의 서초동 오피스텔에 묶기도 하였지만 집이 없는 신세는 마찬가지였다.
그때 전주에서 올라와 방송국 카메라 촬영 보조를 하는 친구를 알게 되었다. 그 친구가 사는 사당역 근처의 고시원에 가보았는데 작은 방이지만 그것도 어찌나 부러운지 몰랐다. 여하튼 난 좀 힘들 때 이천의 그 동갑내기 친구의 술집에 놀러 가서 밥과 술을 얻어먹었다.
친구가 좋은 게 뭐냐고 내 고민도 들어주고 앞으로 잘 될 거야라고 응원도 해주었다. 그 이성 친구는 정말 격이 없게 날 대하고 말이 통해서 내가 이천에 가면 늘 같이 놀았다. 우리는 노래도 좋아해서 노래방도 같이 갔고 내가 영화작업을 하던 친구도 이천에 데려가서 소개하기도 하고 같이 어울리기도 했다.
언제인가는 자기 가게 옆의 꽃집의 사장님을 소개해 주었는데 그 친구가 바로 HJ였다. 키가 큰 친구가 들어와 노래방 맞은편에 앉았다. 내 친구랑 그녀는 서로 살가운 사이 같았다. 언니, 동생 하면서 같은 건물에 세 들어 사는 작은 사업자였다.
서울로 가기 전에 생화를 파는 그녀의 작은 꽃집을 들어가 봤는데 시골답지 않게 멋진 작은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특이한 것은 은색과 검은색이 어울리는 작고 동그랗지만 모던한 타입의 벽시계도 팔고 있었다. 또 HJ는 나랑 같은 황 씨라서 친근했다.
그녀는 이후로 내가 이천에 가면 같이 어울리게 되었다. 목소리도 예쁘고 내가 청주가 고향인 후배와 같이 오피스텔에 사무실을 만들었을 때는 내 일처럼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 심플한 벽시계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우리는 오빠, 동생 하며 또 이런저런 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점을 하는 동갑 친구가 바쁘면 난 친구의 꽃집에 갔다. 우리는 가족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간암으로 투병 중인 이야기도 들었다. 폭력적인 아버지는 술 때문에 본인도 망가졌고 어머니도 폭행을 당했고 친오빠도 집을 나갔다나 하여간 불우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걱정해 주고 응원해 주는 여동생이 생겨서 나도 참 기뻤다. 나도 그녀의 아픈 가정사를 알고 그녀를 위로했다. 우리는 각자가 힘든 상황이었지만 서로를 위로하고 보듬었다. 그녀 내 동생 HJ는 사실 어릴 때 소아마비로 인해 다리를 좀 절었다.
HJ의 불편한 몸이 어릴 때 어떤 주변의 편견을 불러일으키고 다른 시선을 받았는지는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녀는 참 부단히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정상적으로 걷기 위해서 또 정상인들과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며 함께 살기 위해서.
그녀가 작은 꽃집을 하는 것을 그녀의 독립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이자 현실에 대한 몸부림이었으리라. 그런 그녀를 이성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불가피했을까. 내가 그녀를 동정하지 않았다 해도 그런 연민의 마음이 없지는 않았으리라.
그녀 또한 든든한 새 오빠를 알게 되어 정말이지 힘이 되는 것 같았다. HJ가 보기에 난 글을 쓰는 사람이고 영화를 하러 상경한 사람이었으리라. 자신보다 더 꿈을 향해 달려 나가는 멋진 용감한 사람이었을까? 하지만 그녀는 더 앞으로 나가고 싶어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그리고 나도 정신없이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는 한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다. 그즈음 대전에서 붕어빵 노점으로 모은 돈을 투자했는데 막혀서 쓸 수 없었던 돈이 해결이 되었다. 그리고 대방동 골목 끝자락의 옥탑방을 구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HJ도 가게를 장사가 안 되는 건물 복도를 막은 작은 꽃 가게를 정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옥탑방이 보증금 500에 10만 원이었나. 여하튼 그녀를 만나러 갔는데 그녀의 웃음이 정말이지 그때 왜 그렇게 이쁘고 처연했는지. 한동안 나도 나의 마음을 정리하고자 노력했다. 그녀를 과연 내가 책임질 수 있을까. 난 정말 그녀를 사랑했었나.
사실 가수 이문세의 노래는 다 좋아했다. 어느 한 곡 정말 거를 타선이 없었다. 난 이문세의 노래를 전축 LP판으로 들었다. 많은 이문세의 노래를 만든 이영훈 작가의 묘소는 분당 메모리얼 파크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정말 가요의 마스터이신 분이 너무 일찍 하늘의 별이 되었다.
HJ와의 짧은 인연이 생각나면 이 노래가 생각이 난다. 늘 내 앞에서 평소보다 더 밝게 미소를 지었던 아니 그러려고 노력했던 얼굴. 한쪽 다리가 불편해 큰 키에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느리게 걸었던 그녀의 모습. 내가 노래방에서 부르던 노래에 감동하고 내 이야기, 푸념에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었던 동생. 친동생이었다면 오히려 섭섭하고 그저 아는 여동생으로 있어서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했던 H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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