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45호부터 새로운 분위기로 심기일전하여 시네마테크 컬트라는 이름으로 통합하여 회지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이 심기일전이지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월간 시네마테크 컬트 제48호가 97년 9월호에 나오고 진이 빠진 게 사실이었습니다. 1호부터 48호 그러니까 4년 동안 1993년 9월부터 1997년 9월까지 쉼 없이 달려와서 그런 것 같습니다. 12권씩 묶어내는 합본호를 만들고 나니 어느 정도 안심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 열과 성을 다하여 참여한 전국시네마테크연합이 5월 30일 발족식을 통해 닻을 올리니까 한시름 놓기도 하였지요. 또 1년 12권을 내야 합본 5호를 만들 수 있겠습니다만 합본 4호까지는 완성을 했으니 안심이 되었습니다. 정말 그때는 몰랐지만 요새말로 '번 아웃'이 온 것이 아닌지 싶었습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냥 처음으로 자력으로 마련한 대흥동 501호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거나 잠을 자기도 많이 잤습니다. 부르스타를 꺼내 라면도 정말 많이 끓여 먹었습니다. 가끔 회식을 할 때면 신문지를 깔고 고기를 굽기도 했습니다. 영화제를 마치고 또 신입회원이 오면 친근해지기 위해서 또 모든 일정이 끝나고 운영위원들끼리 단합하기 위해서. 당시에 근처 자주 가는 분식집이 기억이 납니다. 부부가 운영하는 작고 기다란 테이블도 몇 곳이 없는 허름한 곳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는 어묵 국물에 말아주는 1500원짜리 잔치 국수. 국물이 진하고 정말 진짜로 참 맛있었습니다. 누군가 밥 사주는 사람이 제일 고마웠습니다. 또 제가 밥을 자주 사주지 못해 미안했습니다.
사무실에서 삼겹살 회식
- 시네마테크 전문 운전기사-
그때 제가 기아 베스타 승합차가 있었는데 지방에 회의할 때마다 지역의 회원들을 싣고 다녔고 우리 대전의 회원들도 늦으면 태워주는 등 거의 운전기사 역할도 했습니다. 그렇게 또 어울리고 마시고 쪽잠을 자고 또 아침에 터미털 태워주고 지금 봐도 체력이 신기할 노릇입니다. 제1회 부천 판타스틱영화제를 맞춰 시네마테크연합 대표자회의(1997.8.30)를 부천 시네마테크 영화열망에서 주최하였습니다. 그곳에 가서 영화도 보고 회의도 했습니다. 우리 '영화세상 컬트'에서 분리된 '대전 1895'도 참여를 했습니다. 같이 활동했던 친구들이 다른 테이블에 앉아서 좀 머쓱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마주하고 있으니 인사를 했습니다.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니 서로 지켜보고 상생을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컬트보다 1985도 열심히 활동을 하는 게 대전에서 보이더라고요. 어쨌든 제가 당시 중고 승합차가 있었는데 그걸 잘 지방으로 돌아다니고 잘 사용하고 폐차를 시켰습니다.
회비와 수입지출 장부, 합본호 1,2,3,4
- 홈페이지 기획안을 추진했다면-
48호 말미에 25호부터 우리 회지를 디자인해 주고 편집을 해주던 친구 최정호가 컬트의 새로운 모델로 홈페이지를 만들자는 기획안을 내고 공개를 했습니다. 컴퓨터에 문외 안이던 저는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정호 친구가 2017년 1월에 모뎀을 구입해서 하이텔에 가입을 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편지를 통해서 원고를 주고받았습니다. 그야말로 아날로그 인생이었던 셈이죠. 그래서 정호 친구가 컬트의 홈페이지를 만들며 더 다양한 정보 고속도로가 되어서 수입 모델도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는데 정말 혹했습니다. 그런데 그 비용이며 반신반의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때 홈페이지를 구축하면 데이터 베이스도 만들고 정말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머리가 안 돌아가니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이 맞습니다.
도서와 비디오 장부 중 비디오 대여장부 역시 아나로거
-뒤늦게 빠져든 PC통신의 세계 -
늦게 PC통신의 세계에 입문하였는데 이게 또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밤새워 또 독수리 타법으로 시네마테크연합방에 그동안의 회의나 내용 등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영화동호회 방도 기웃거리다가 우리 대전지역에 나우누리 센티스 '영화혁명'이란 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가입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운영자들과 이야기해서 그들의 모임을 우리 사무실에게 했습니다. 같이 밥도 먹고 술도 한잔하고 친해졌습니다. 첫 달 회지를 빼먹으니 정말 이상했습니다. 그런데 매달 억지로 내용도 없는 회지는 만들어서 뭐 하나는 생각으로 자기 위로 내지는 면책을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좀 새롭게 접근을 해보자고 생각해서 기획을 하게 된 일이 바로 시민을 위한 열린 영화제라는 행사입니다. 그리고 그 영화제 때 회지를 만들어 배포를 하자고 계획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진행과 홍보에 '영화혁명' 회원들과 함께 했습니다. 제가 대학 3년 때 처음으로 한 영화제가 1993년에 캠퍼스 강의실에서 한 '삼대륙영화제'였습니다. 플래카드를 걸고 홍보하고 '전함 포템킨, 시민 케인, 나쁜 피'를 상영을 했죠. 물론 비디오테이프로 말입니다.
-만능 십자드라이버로 테이프 분해와 조립 -
영화제를 한다고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걸었을 때의 뿌듯함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커다란 소니 텔레비전이었는데 그때 비디오 데크가 고장 나서 애먹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사실 VHS 테이프가 씹히는 일이 정말 다반사였습니다. 그래서 작은 십자드라이버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안의 릴이 꼬이면 나사로 테이프 전체를 해부를 해야 합니다. 양쪽 톱니바퀴를 풀어서 꼬인 곳을 펴 다시 제대로 감고 다시 나사를 조여 테이프를 조립합니다. 다시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영화가 그 씹힌 부분은 지지직거렸지만 신기하게 또 그냥 그런대로 잘 나왔습니다. 그리고 문화학교 서울의 자료를 돈을 주고 카피해서 받고 다시 우리 테이프를 돈을 받고 다른 지방으로 복사를 해서 주었습니다. 대학의 동아리에도 복사를 해주었습니다. 당연히 그 당시에는 수입이 금지된 일본 영화가 많았습니다. 당연히 화질은 다시 또 복사를 하니까 화질이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영화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그 흐릿하고 비 오는 화면마저도 방해가 아닌 걸로 당연히 감수해야만 하는 작은 불편함으로 만들게 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아날로그 시대였습니다.
바쁘지만 외로웠던 사무실 전경
- 영화마을 비디오 대여점 단골 -
실시간으로 VHS 테이프를 복사하다 보니 러닝 타임이 그대로 필요했습니다. 긴 시간의 영화는 정말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VTR 두대를 연결하고 영상 출력과 음성 출력 좌우 2개 라인을 IN, OUT으로 구분하여 빨간 선과 흰 선을 연결했습니다. 플레이와 함께 REC 버튼을 눌렀습니다. 복사 방지를 위해모서리 플라스틱이 떨어진 것은 스카치테이프를 붙여 간단히 해결하였습니다. 호환 마마보다도 무섭다는 불법 음란 테이프 광고가 제일 먼저 나오던 때였습니다. 테이프를 구한 곳은 체인점인 '영화마을' 비디오 대여점이 다양한 작품이 많아서 자주 갔습니다. 대전 태평동 사거리에 있는 곳은 카운터를 보는 누님이 정말 영화를 많이 보고 해박한 지식이 있어서 자주 갔습니다. 성베네딕트 수도원이라는 곳에서는 '나무를 심는 사람'이라든지 타르코프스키 작품을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 가게 사장님에게 행사 때 몇 만 원씩 또 후원을 받기도 하고 우리 회지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건강하게 잘 계시는지 궁금하고 그때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 폐업하는 비디오 대여점을 찾아서 -
그리고 또 폐업을 한 비디오 가게가 우리의 주요 자료 공급처가 되었습니다. 싸게 많이 구할 수 있었습니다. '당나귀 무법자'라는 한국영화인데 코미디이고 서부극을 모방한 영화가 기억에 남습니다. 폐점 가게에 가면 쭉 훑어보고 관심이 가는 작품은 눈에 찍어 놓았다가 별로 관심이 없는 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일반적인 테이프에 끼워서 싸게 살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폐 비디오가게를 전문 처리하는 사장님과 자주 장소는 달라도 마주치다 보니 들어갔다가 사장님이 없을 때를 노리기 위해 그냥 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장님도 비싸게 받을 수 있는 작품을 아시더라고요. 아, 그리고 비디오 장도 주요 수집 품목입니다. 일반 책장보다 좋아서 어디 골목 어귀나 비디오가에 인테리어 할 때 그 무거운 비디오장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서울에서 온 회원의 발품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서울대 입구옆 근처에서 '지오북카페를 운영하시는 김기수 회원님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고 합니다. "그때 같이 두 시간을 들고 가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황규석 씨는 정말..." 미치지 않고는 정말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