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퍼와 제주 할망과의 만남 그리고 숙소 찾아 삼만 리
한라봉과 귤 농사로 눈코 뜰 새 없다는 특전사 출신의 '샬레 게스트하우스' 쥔장, 그의 넉살과 강압(?)에 못 이겨 이틀 밤을 잤다. 올레길을 걸으며 만나는 게하 중에서 가장 따뜻하고 최고로 맘이 편했던 곳 샬레. 그래서 오늘도 홀가분하게 걷는 복을 주신 것에 감사하다. 쥔장의 말에 의하면 샬레에서 많이 잘수록 복을 받는단다. 나중에 가족과 함께 꼬마캠카 끌고 따뜻하게 몸 지지기 위해서라도 숙박해야겠다. 바쁜 쥔장을 못 보고 가서 서운해 카페에다 작별 인사를 남겼다. "잘 쉈다 갑니다~~"
해변에 시비가 있어 옮겨봅니다.
유토피아 해변 / 이양우
이곳 대포 앞 바다
태고의 숨결이 숨 쉬는 곳
하얀 포말이 춤을 춘다
최병창 선생의 저택의 바로 코앞
신비의 파도 율동
저음과 고음이 어우러지는 곳
탐라의 파도 춤을 춘다
시원의 역사 주상절리
비늘 터는 일출이 아름다워라
주상절리대는 약 25만 년에서 14만 년 사이에 분화구에서 흘러온 용암이 식으면서 형성된 것입니다.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는 뜨거운 용암이 식으면서 부피가 줄어 수직으로 쪼개지면서 만들어지는데 대체로 5~6각형입니다.
주상절리대와 씨에스호텔앤리조트 사이로 빠져나오니 어디서 많이 본 건물들이 나타납니다. 예전에 몇 번 다녀왔던 퍼시픽랜드입니다. 돌고래 쇼를 보고 요트를 탔던 곳입니다. 올레길이 퍼시픽랜드 정문이 아닌 바닷가 샛길로 들어오니 모를 수밖에요. 퍼시픽랜드에서 중문 색달해변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비석이 있습니다. 이 해변에서 서핑하다 고인 된 분을 기린 내용입니다.
이틀 전 7코스 외돌개 부근에서 돌고래를 봤던 터라 바다에 점점이 박힌 게 순간 돌고래로 착각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이번에는 돌고래가 아닌 사람들입니다. 서핑을 즐기는 서퍼들입니다.
하얏트 호텔 잔디밭을 거쳐 해병대길이 있습니다. 중문관광단지 시내를 통과하지 않고 곧바로 논짓물로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서명숙 올레길 이사장이 쓴 책을 보면 올레길 조성 초창기에 해병대 장병의 도움을 받아서 해병대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태풍이 불어 일일이 장병의 손으로 만든 길이 유실되고 주변 주상절리대의 낙석 위험 때문에 폐쇄되었다고 합니다. 출입 금지 표시와 함께 금줄이 쳐졌지만, 외국인 서너 명이 나오길래 호기심에 해병대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내리막길 데크가 그동안 이용 안 한 지 오래 되었는지 물이끼가 껴서 약간 미끄럽습니다. 계단을 내려오니 시원한 바다와 모래사장 그리고 주상절리대가 펜이를 반깁니다. 해병대원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만든 돌이 잘 정리된 길을 걷습니다. 반듯한 바윗길에 그들의 수고스러움에 감사가 절로 나옵니다. 100여 미터도 못 가 돌들이 유실되어 일반 바윗길과 같습니다. 걷기 힘듭니다. 그래도 바위를 건너 모래사장에 당도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바람도 많이 불고 파도도 높아집니다. 모래사장이 끝나는 지점에 또다시 바위 무더기들이 즐비합니다. 절벽 끝부분에 수평선이 맞닿아 과연 길이 있을지 의구심이 듭니다. 혼자라 더 불길합니다. 함께 걷다 어제 귀가한 형님이 원망스럽습니다. 둘이면 서로 의지하는 마음으로 갱기를 부려서라도 계속 앞으로 갈 수 있을 텐데... 발길을 돌립니다. 바닷물이 들어오는지 모래사장은 점점 줄어듭니다. 그래서 안전을 위해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하얏트 호텔 입구로 되돌아 나옵니다.
중문관광단지 옆을 지나니 호텔이라고 생긴 건 모두 보면서 걷습니다. 신라호텔, 스위트호텔, 제주하나호텔, 롯데호텔 등등. 믿거나말거나박물관이 보입니다. 과연 뭘 보는 박물관일까요? 예전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세월이 흐르면서 제주는 계속해서 업그레이드되는가 봅니다.
오전 9시 전에 출발한 데다 아침을 식빵으로 때워서인지 11시 조금 넘었는데 출출합니다. 올레길을 걷다 보면 때를 놓칠 수가 있기에 길에서 발견한 서귀포시 서민흑돼지갈비집으로 들어갑니다. 흑돼지는 1인분은 팔지 않기에 흑돼지갈비 2인분을 시켰습니다. 제주에 온 지 8일째인데 아직 흑돼지 맛을 못 봤습니다. 숯불에 잘 익은 고기를 멜젓(멸치젓) 찍어서 먹으라며 중국인 종업원이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그대로 따라 했더니 멜젓의 특유한 맛과 짠맛이 어우러져 감칠맛이 납니다. 흑돼지갈비 2인분과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습니다. 저도 놀랬습니다. 제 양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거든요. 갈비 2인분과 공기 한 그릇 해서 37,000발입니다.
든든한 배를 이끌고 가는데 때마침 공원이 나타납니다. 완전 힐링 구간입니다. 2km가 넘는 생태공원에는 각종 야생화와 공원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큰 개울이 있습니다. 미꾸라지 등 각종 생명체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쉼터와 잘 가꿔진 산책로를 따라 걷는 사람도 간간이 있습니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개울 소리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하모니가 연출됩니다. 올레를 걷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예래 포구의 족욕 카페 앞을 지납니다. 마음 같아선 들어가 피로를 풀고 싶었습니다. 바닷가에 1-1코스 우도에서도 본 '환해장성'이 나타납니다. 우리 선조들이 액운이나 외부 침입을 차단하기 위해 쌓아 놓은 공동체의 얼이 깃든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제주도는 길가나 밭에 묘 주변을 돌로 쌓은 무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무덤가를 쌓은 돌을 '산담'이라고 합니다. 정교하게 쌓은 것과 돌무더기로 대충 쌓은 게 보입니다. 살아서도 빈부의 차가 있듯이 저세상 가서도 차이가 있네요.
목적지까지 이제 1.8km 남았습니다. 대포 포구에서 8시 40분 출발해 현재 시각 오후 1시 40분, 4시간 걸었습니다. 힘겨운 몸을 이끄는데 마침 정자에서 쉬고 계시는 제주 할망분들이 보입니다. 배낭을 내려놓으며 말을 붙여 봅니다.
"할머니들 여기서 좀 쉬고 갈게요"
한 할머니께서 뭐라 하시는데 '뭐 하러 다니냐'며 묻는 느낌입니다. 생수로 목을 축이는데 할머님들끼리 나누시는 대화가 하나도 안 들립니다. 말소리는 들리는데 해석이 안 됩니다. 마치 어디 외국 같습니다. 그렇다고 사적인 얘기 같은데 길손이 해석해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담소 나누시는 모습을 한 번 찍자고 하니 한 할머님이 뭐라고 하시며 싫은 기색을 하십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나 어감상 '다 늙어 빠져서 무슨 사진이냐!'라는 의미 같습니다. 그래서 일어서면서 셀카봉을 만지며 한 할머님께 찍겠단 의사로 윙크를 날리며 셔터를 살포시 눌렀습니다. 그래도 아무 말씀 안 하십니다. 한 할머님께서 급 관심을 보이시길래 올레를 걷는다고 했더니 바로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십니다. 광주라고 했더니 '관광하러 광주에 가서 케이블카도 탔다'며 자랑하십니다. 케이블카면 지산유원지인가? 어디 또 있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제주 할망과의 짧은 조우를 마치고 펜이 발길 닿는 대로 또 걷습니다.
저 멀리 박수기정이 나타납니다. 이제 목적지 대평 포구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내일 걷게 될 9코스의 박수기정은 산방산과 더불어 제주 남서해안 대표 랜드마크입니다. 바다에서 수직으로 솟아오른 해발 130m입니다. 1년 내내 맑은 샘물이 솟는데 바가지로 떠마신다 하여 '박수', 절벽 혹은 벼랑의 제주어가 '기정'입니다. 멀리서 박수기정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데 '웬 여인이 한 자세로 계속 서 있지?' 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조형물이었습니다. 대평리의 옛 이름은 '난드르'입니다. 난드르는 평평하게 길게 뻗은 드르(野)의 지형이라 하여 대평(大坪)이라고 했습니다.
종점에 오후 2시 20분 도착했습니다. 아침 8시 40분에 출발해 6시간 만입니다. 이제 숙소를 찾아야겠죠~ 대평
포구는 숙박시설이 많습니다. 펜션, 민박, 게스트하우스, 한 달 살기 등등. 그래서 숙박지는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풍요 속의 빈곤이었습니다. 첫 게스트하우스부터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여자 게스트만 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스마트폰으로 검색과 지도 안내를 받으며 게하를 찾았습니다. 게하에 도착하면 쥔장이 없어서 전화하면 멀리 나가 있거나 오늘 영업 안 한다 등등 숙박지 잡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민박은 또 비쌉니다. 성수기도 아닌데 6~7만 원입니다. 한 시간 이상 헤매다 어제 묵은 샬레 게하로 가려고 버스 편을 알아보니 환승에 1시간 넘게 걸립니다. 그런데 버스 시간이 또 1시간 넘게 남았습니다.
그래서 샬레 가는 것도 포기하고 주변 카페 '아라'에 들어갔습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목을 축이며 카페 쥔장에게 게스트하우스 소개를 부탁드렸습니다. 쥔장은 펜이가 이미 다녀온 게하만 얘기합니다. 더 알아봐 달라고 하니 한 곳을 소개해줘서 바로 네이버로 예약했습니다. 오늘 또 구세주 한 분을 만났습니다. 오늘 밤 이렇게 편안하게 침대에서 자때바때로 누워 글을 쓸 수 있는 것에 감사합니다. 물론 대평마을 구경 목적도 있었지만, 무려 2시간 가까이 숙소 찾아 삼만 리였습니다. 다음번에는 스마트폰을 확실히 활용해 예약해야겠습니다.
오늘 저녁은 숙소 '돌담에꽃머무는집 게스트하우스'의 카페에서 돈가스로 했습니다. 도미토리 1인당 30,000발. 숙소 찾아 삼만 리 하다 보니 킬로 수와 걸음마가 장난이 아닙니다. 펜이 인생에 삼만 보를 두 번째 기록한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