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쟁 야욕과 우리의 아픈 역사 그리고 캐나다 게스트를 만나다
<푸른 바다와 연둣빛 산 그리고 검은 흙길의 파노라마에 눈이 행복하다!>
대형 식당을 리모델링한 '덕후 게스트하우스'에서 뜨끈뜨끈하게 몸을 지지고 아침 8:50분 힘차게 출발했다. 집 나온 지 열흘째, 이제 몸이 게하에 맞춰진다. 살기 위한 인체의 신비스러운 능력이다. 화순 금모래 해변에서 출발해 사계 포구, 사람과 짐승의 화석지를 지나 송악산을 걷는 동안 심심하지 않다. 바다와 산 그리고 검은 흙길과 돌길, 싱그런 풀섶과 빛바랜 억새 사이를 지나면서 지루할 새가 없다. 오른쪽은 산방산 줄기요 왼쪽은 형제섬과 가파도, 마라도 서로 경쟁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시력 안 좋은 사람도 푸르뎅뎅한 바다와 연녹색 산야의 원근감으로 조절되는 렌즈에 시신경이 제대로 운동 되시겠다.
<올레에서 삐딱선을 타다?>
오늘도 9코스처럼 처음부터 산길이다. 산방산을 왼쪽으로 한 바퀴 빙 도는 코스다. 그래서 책대로 안 살기로 했다. 학창시절 학교와 집, 도서관이나 독서실만 다닌 범생 펜이. 그래서 이거라도 나이 들어 삐딱선을 타고 싶다.
삐.딱.선
펜이가 3년 전 파마한다 할 때 마눌님이 그랬다.
"이젠 아주 발악을 해요, 발악을..."이라고 했다.
결국, 펜이 의견을 관철해 지금도 펌이다. 얘기가 엉뚱한 데로 돌아갔다. 산방산을 건너뛰고 코스를 조금 벗어났다. 덕분에 용머리 옆의 하멜상선전시관에 들러 1653년으로 거슬러갔다. 상선에 가까이 다가서자 커다란 모자를 쓴 갈고리 후크 선장이 나타날 것만 같다.
<사라진 중간 스탬프>
마라도 여객선을 탈 수 있는 송악산 휴게소에 도착했다. 중간 스탬프를 찍어야 한다. 휴게소 식당 주변을 아무리 찾아도 없다. '어케 된 거지?' 하며 올레 안내책과 패스포트를 비교했다. 책에는 송학산 휴게소 앞에, 패스포트는 송악산 지나서 섯알오름 화장실 부근이라 표기되어 있다. 서로 다르다. 그래서 올레 앱을 확인하니 송악산 휴게소로 나온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제주올레사무국 홈페이지 지도 서비스를 보니 섯알오름에 있다. 올해 산 올레책인데ㅜㅜ
<산에서 간식으로 모둠회를>
11시가 넘은 지 조금 밖에 안 돼 그대로 송악산을 탔다. 40여 분 산에 오르니 지도에도 없는 해물 파는 간이식당이 나와서 모둠 해물로 요기를 때웠다. 중간에 식당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송악산 중턱에서 요기한 게 펜이를 살렸다.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의 현장>
송악산 초입의 바닷가 절벽에 파놓은 17기의 해안 동굴진지, 알뜨르 비행장을 보호하기 위해 송악산 외륜에 판 13곳의 동굴진지, 섯알오름에 있는 시멘트 구조물의 5기 고사포진지, 일제가 중국의 남경을 폭격할 목적으로 만든 알뜨르 비행장. 전투기를 감추기 위한 2기의 콘크리트 격납고도 둘러보았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만행이 평화의 섬에서 자행된 것에 당시를 살아보지 못한 펜이로서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길이 후손에게 물려줄 산교육장이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하지 않았는가? 노선을 벗어났기 때문에 격납고도 볼 수 있었다.
<우리의 아픈 역사>
섯알 오름을 내려오면 제주 4.3사건으로 1950년 7월 16일 344명을 불순분자라는 명목으로 체포해 252명의 양민을 우리 군인이 학살한 현장을 볼 수 있다. 차에 실려 온 주민들을 미리 파놓은 호수 가장자리에 세워 총으로 하나하나 쏴서 모두 매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백조일손이다. 한 동네에 제사가 같은 날이 많다. 그 호수가 당시 흔적 그대로 남아 있다. 제주에 오기 전에 읽었던 4.3 사건의 현장을 보면서 우리 현대사의 아픈 역사에 숙연해진다. 많은 인원을 매몰하다 보니 수 년이 지난 후에 유골 수습에 누구의 것인지 분간이 안됐다. 그래서 한 장소에 함께 이장했다. 아직도 수습 돼지 못한 분도 있다고. 미완의 역사 현장이다.
<때늦은 점심의 탁월한 선택 - 흑돼지 짬뽕>
하모해수욕장에 다가오자 건물들이 보인다. 모슬포항이 있는 대정읍에 다 왔다는 신호다. 트레킹 5시간 만에 종점 약 2킬로 남짓 남았다. 제일 먼저 짬뽕상회가 보여 무조건 들어갔다. 일반 중국집이 아닌 짬뽕 전문점이다. 짬뽕 전문점답게 흑돼지 짬뽕, 해물 짬뽕, 문어 짬뽕에 대해 종업원이 설명한다. 해군만 들어간 것보다 육군이 하나 더 들어간 흑돼지 짬뽕을 시켰다. 홍합이 가장자리로 줄을 섰다. 거기에 흑돼지 고기를 먹기 좋게 채로 썰었다. 적당히 매운맛에 면발이 살아 있네~ 탁월한 선택이었다. 오후 2시가 넘어 먹는 흑돼지 짬뽕 맛을 너희가 알어ㅋ~ 짬뽕은 종류에 상관없이 모두 9천 발이다.
<두 번째 택배질에서 빚은 에피소드>
마침 모슬포 읍소재지에 도착했기에 옷 가게부터 찾았다. 청바지는 무겁고 입고 다니기에 신축성이 없어 불편하고 덥다. 그래서 가벼운 바지를 사서 바짓단을 줄이러 세탁소에 갔다. 수선비 3,000발을 치르고 잔돈을 받으면서 문제가 됐나 보다. 옷 수선은 잘 돼서 쥔장의 양해를 구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택배로 보낼 짐을 세탁소에서 싸면서 현금과 카드가 든 핸드폰 케이스를 놓고 나온 것이다. 600여 미터 떨어진 모슬포 우체국에서 택배 비용 치르면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세탁소에 전화했더니 쥔장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여기저기를 찾는 게 눈에 선하다. 한참 찾다가 세탁 이불 주변에 있다며 나보다 쥔장 아주머니가 더 기뻐한다. 그래서 결국 잃어버린 핸드폰 케이스를 다시 찾아서 택배비를 계산할 수 있었다. 덕분에 1.2km 더 걸었지만, 우도의 2.5km 회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청바지와 미러리스 카메라와 얇은 양말과 전기면도기 등 짐 될 만한 물건은 모두 집에 택배로 보내버렸다. 며칠 전 책과 블루투스 자판, 옷가지들을 집으로 보내고 이번이 두 번째다. 배낭은 갈수록 가벼워진다. 고행이 만들어준 지혜다. 비움의 철학이다.
<육지에는 거의 사라진 다방>
옷 가게를 찾으며 모슬포 읍내를 걸었다. 그냥 형식상으로 걸린 간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불을 훤히 켜놓고 영업을 하고 있다. 육지보다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은 섬 제주의 문화다. 물론 육지도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추억의 다방을 운영하는 곳이 생겨났다. 제주는 해방 이후 남북 공동정부를 원했던 시대의 조류에 제주도도 합세했는데... 그러다 이승만이 미국의 앞잡이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결정했다. 육지와 멀리 떨어진 제주는 소식이 늦었나 보다.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에 반대하고... 그러다 이승만과 미국이 합세해 제주에 빨갱이가 장악하고 있다며 예비검속을 통해 무자비하게 양민을 학살했다. 그게 바로 제주 4.3사건의 시발점이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캐나다 친구를 만나다>
어제 예약한 숙소 '레몬트리 게스트하우스'에 체크인했다. 같은 도미토리에 먼저 도착한 캐나다 사람이 있었다. '어? 우리와 같은 동양인이네!' 해수 사우나를 같이 가고 고기국수로 저녁을 함께하며 친해졌다. 영어를 잘해서라기보다 세계 공통어가 있지 않은가! 보디랭귀지~ 캐나다인 Andy는 45살로 결혼을 못 했다고 표현한다. 캐나다 아가씨가 없어서라고... 아버지는 싱가포르인, 어머니는 홍콩인, 태어나기는 말레이시아에서, 살기는 캐나다에서 산단다. 완전 다국적이다. 캐나다에서 직접 자전거를 공수해와 부산에 이어 제주에서 혼자 라이딩 한다고 했다. 지난 4월 9일 한국에 왔고, 한 달간 서울과 양평 등 자전거길을 돌 계획이라고 한다. 그래서 펜이가 사는 광주도 자전거 타기 좋으니 오라고 하니 웃기만 한다. 하기야 광주에 온들 펜이도 5월 초순까지 제주에 있으니 공염불이다. 오늘도 제주시에서 모슬포까지 80km를 달렸다며 지나온 루트를 보여준다. 펜이의 제주올레 한 달 완주 계획을 듣고 '베리 굿!'이라며 엄지 척을 해준다.
피로를 풀기 위해 앤디와 함께 해수사우나에 갔다. 한국 특유의 목욕문화에 싱글벙글이다. 온탕에 들어가서는 엄지 척을 하며 "소굿~ 소굿!" 해댄다. 사우나 후 함께 제주도의 특별 음식 고기국수를 먹었다. 펜이도 처음 먹어본다니까 앤디 눈이 동그래진다. 외국에 와서 처음 먹는 음식이라 두려움도 있을 텐데 추천자도 처음 먹는다니 그럴 수밖에. 동양적인 생김새에 김치도 뚝딱, 무생채도 뚝딱, 소주도 뚝딱, 된장도 젓가락으로 마구 찍어 먹는 앤디. 고추는 한 번 찍어 먹어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맛있게 먹어주니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니 오히려 맛있는 음식을 소개해줘서 감사하다며 연방 땡큐다. 숙소에 돌아와 앤디가 인스타그램을 보여준다. 사우나 안내문과 희미한 남의 나신까지 그리고 저녁 먹는 펜이 사진까지 올렸다. 블로그 작성이 아직 덜 됐지만 앤디를 위해 불을 좀 일찍 끄고 단잠에 빠졌다. 미완의 블로그는 쉬는 짬짬이 작성하고 있다.
<오늘의 경제 활동>
덕후 게스트하우스 모닝커피 2,500
송악산 중간 모둠회(소) 10,000
모슬포 점심 짬뽕상회 흑돼지짬뽕 9,000
콜핑 바지 44,000
동명세탁소 바짓단 수선 3,000
모슬포우체국 택배 5,300
대정월마트 면도기 10,200
모슬포 중앙시장 양말 3,000
대정해수사우나+음료수 8,000
고향집 andy와 고기국수 16,000
레몬트리 게스트하우스 20,000
계 13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