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과 조각보 그리고 해녀의 물질 방송 촬영과 올레에서 만난 사람들
제주 농촌 주택을 개조하여 두 아가씨가 운영하는 '탱자싸롱 게스트하우스'의 푸근함을 뒤로하고 21코스 올레에 들어섭니다. 어제 관람한 제주해녀박물관 소나무 잔디광장을 한 바퀴 돌아봅니다. 나무의 상큼함이 그대로 전해져옵니다. 곧바로 작은 숲으로 이어지는 외적의 침입을 알린 통신수단이었던 '연대동산'에 오릅니다. 아침부터 지저귀는 이름 모를 새들의 합창에 기분까지 좋아집니다. 이게 바로 힐링이 아닐까요~
밭담으로 둘러싸인 밭두렁 길을 걸으며 제주 농촌의 특별함을 마음껏 조망합니다. 면수동의 옛 이름 낯물을 넣어서 지은 '낯물밭길'입니다. 밭 가장자리에 돌담을 쌓은 건 바람 많은 제주에서 작물 보호와 동물의 침입을 막기 위해섭니다. 묘지에 쌓은 돌담은 '산담'이라고 합니다. 동물의 묘지 훼손을 방지하려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밭길을 지나면 커다란 성곽이 나타납니다. '별방진'입니다. 제주의 돌담이 듬성듬성 구멍이 뚫린 것에 비해 이 성은 빈틈이 없어 다소 부자연스럽습니다. 인위적으로 복원한 인공이 가미된 것입니다. 복원할 때 좀 심혈을 기울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생깁니다. 별방진은 우도에 접근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조선 시대에 하도리에 설치한 것입니다.
하도리를 지나는데 멀리 바닷가 바위 주변에 사람들이 많습니다. 뭔가를 촬영하는 듯합니다. 잰걸음으로 올레를 벗어나 폰카를 들이댑니다. 커다란 스탠드 카메라와 장대 같은 마이크, 잠수 카메라 등 여러 대의 카메라가 돌아갑니다. 잠수복 입고 방송용 카메라를 든 사람의 지시에 따라 물속에 들어간 해녀들이 일사불란합니다. 해녀분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여유롭게 연출합니다. 물속에 들어간 촬영 보조자는 춥다며 난리 방귀입니다. 하늘에 뜬 드론 카메라도 요리조리 요란합니다. JIBS 방송국의 해녀 물질 녹화 현장입니다. 오늘 아주 특별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또 있습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문주란의 자생지 토끼섬을 조망하고 쉼터에서 잠시 목을 축입니다. 때마침 먼저 쉬고 있는 올레객과 인사합니다. 서울에서 온 세 아기씨는 잠깐 시간을 내서 올레 두세 개 코스를 돌 거랍니다. 펜이의 장기간의 올레 순례를 듣고 부러운 눈칩니다.
그때 아주 낮게 앉은 자세로 부부와 아이들 등 네 명이 탄 특별한 자전거가 지나갑니다. 촬영해야 하는데 너무 아쉽습니다. 한참 가다 보니 그들이 어느 카페에서 쉬고 있어서 하도리 해변 입구에서 일부러 기다렸습니다. 폰카 돌아갑니다. 손 흔들며 인사하니 답례하며 엄마의 구령에 맞춰 네 가족이 페달을 밟습니다. "하나 둘! 하나 둘!" 아주 행복해 보이는 가족입니다.
이번에는 하조 해수욕장 못 가서 어제 19코스 월정 해변에서 본 카약 체험이 또 나옵니다. 요금은 월정보다 5,000원이 더 비쌉니다. 월정이 더 저렴하고 주변 여건도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옆에 남자들의 로망 카라반이 있습니다. 캠카야~ 어서 나오니라~~
다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싸목싸목(느릿느릿의 전라도 방언) 바다를 보며 걷습니다. 이번엔 테왁 위로 빨간 공이 여러 개 보입니다. 올레를 걸으며 네 번째 만나는 해녀 물질 모습입니다. 불규칙한 검은 바위를 딛으며 해안 끝까지 갑니다. 하지만 해녀와 거리가 너무 멉니다. 클로즈업해서 그 모습만 잡고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발을 빼냅니다. 해녀가 갓 잡은 해산물을 시식하는 그날을 위하여~
가지런히 줄을 선 배추밭과 이제 꽃망울을 터트린 감자밭을 지납니다. 지미 오름(166m)이 눈앞에 섰습니다. 제주도에서 섬의 머리라는 17코스 도두봉이 서북쪽에 있다면 꼬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지미봉입니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약간 가팔라 흘러내리는 땀방울 때문에 두어 번 쉬면서 오릅니다. 지미봉에서 바라보니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손에 잡힐 듯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습니다. 맨 처음 걸은 1-1코스인 우도와 23일 만에 만났습니다. 다시 보니 반갑습니다.
제주올레의 산파역을 한 서명숙 올레 이사장은 그의 저서에서 오름에서 내려다보는 들판은 조각보와 같다고 했습니다. 지미봉에서 바라본 종달리와 시흥리가 조각보로 덮여 있습니다. 형형색색, 가지가지 모양을 한 밭두렁과 농작물이 만들어낸 환상의 그림입니다.
경치에 푹 빠져 셔터 누르기에 여념이 없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펜이를 부릅니다. 낯선 이에게 먼저 아는 체를 하는 건 지난번 5코스의 감귤 과수원과 똥돼지 축사를 보여준 할아버지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싸 온 커피와 과일을 함께 먹자며 내밉니다. 너무나 친절한 제주산 두 아저씨입니다. 맹물만 먹다가 만난 호사입니다. 자기네들도 올레 전체를 돌지 못했는데 대단하다며 치켜세워줍니다. 그런데 이 아저씨들 제주어를 쓰지 않습니다. 표준어 그대로입니다. 그들이 걱정하는 건 손자가 할아버지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데 있다고 합니다. 자기들은 다 알아듣는데 이제 그 제주어의 명맥이 끊어질 거라며 흘러가는 뭉게구름을 지긋이 바라만 봅니다. 요즘 청소년들의 함축적인 언어와 은어 사용으로 세대 간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마치 그와 비슷한 꼴입니다. 따뜻하고 정 많은 두 분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지미 오름을 내려옵니다.
어제는 이상하리만치 올레에서 만나 이야기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러니 오늘 만나는 사람들이 반갑습니다. 이렇게 올레의 마지막 코스인 21코스 11km가 마무리됩니다.
이제 맨 처음 걸은 1-1코스 이후 건너뛴 코스를 걷습니다. 1, 2, 3, 4코스와 올레 완주증 받기 위해 남겨놓은 7-1코스 등 5개가 남았습니다. 마지막 코스가 짧게 끝나서 바로 1코스로 이어집니다. 이번엔 주황색 화살표를 따라가는 역주행입니다. 21코스 종점과 1코스가 만나는 종달리 바당('바당'은 바다의 제주어) 입구부터 1코스 시작점 시흥초교 입구까지 역주행합니다. 정주행만 하다 반대로 걸으니 또 다른 새로운 맛입니다. 오로지 주황색만이 펜이 편입니다.
종달리를 거쳐 시흥리로 연결되는 말미 오름(126.5m)의 말굽형 분화구의 크기와 가장자리에 우뚝 솟은 삼나무의 위세에 기가 죽습니다. 인간은 자연 앞에 지극히 미약한 존재입니다. 다시 한번 나를 낮추며 억새밭을 누비며 내려옵니다. 시흥초교 앞 1코스 시작점입니다. 시흥초교에서 지름길로 약 1km 떨어진 1코스 중간 스탬프인 목화휴게소와 연결됩니다.
스탬프를 찍고 조금 걸어 시흥 해녀의 집에서 우회전해 '강병희 이장네 민박집'에 당도합니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숙소입니다. 그동안 줄곧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했었습니다. 1, 2, 3, 12코스에 제주 사람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할망 숙소나 하르방 숙소가 8개 있습니다. 이런 숙소를 일부러 이용하려고 했거든요.
강병희 이장네는 유일하게 남자가 운영하는 숙소입니다. 강병희 이장은 제주올레 탐사팀과 함께 1코스를 찾아낸 장본인이십니다. 관광지와 올레 21, 1, 2, 3코스까지 픽업도 합니다. 민박은 1인당 20,000원(2인 이상은 15,000), 5,000원 추가하면 사모님의 정성 어린 아침상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건 내일 아침 먹어보고 마지막에 후일담으로 쓰겠습니다.
참! 지금은 마을 일을 보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제까지 손님이 많았는데 오늘은 저 혼자랍니다. 여행기를 쓸 땐 독방이 최고입니다. 오랜만에 TV 화면도 봅니다. 게하의 비좁은 공간에 있다가 넓고 따뜻한 온돌방에 있으니 행복합니다. 단, 와이파이가 안 돼요ㅜㅜ 그러나 비도 오고 하니 이불 깔고 티브이 보며 뒹굴어봐야겠습니다.
<후일담>
간밤에 온돌방에서 아주 따뜻하게 잤다. 세탁한 갈옷과 양말이 마르라고 보일러를 좀 세게 틀었다. 이장님한텐 좀 미안하지만ㅎㅎ 보일러 성능이 좋은지 초저녁에 틀었는데 밤 11시가 넘으니 덥다 더워~ 그래서 꺼버리고 잤는데도 아침까지 방안이 훈훈~ 오랜만에 삭신 지지는 밤이었다. 덕분에 옷도 깨끗이 꼬실꼬실 잘 말랐다. 게하에서는 어림도 없는 소리ㅋ
아침 8시가 좀 못 돼 이장님이 식사하라며 "손님~"을 외친다. 거실에 들어가 독상을 받고 보니 기분까지 좋아진다. 사모님이 직접 차려주시는 아침상, 얼마 만에 먹어보누ㅎㅎ 마눌님이 차려준 밥상과 똑같다. 고등어 한 마리를 통째도 구웠다. 기름이 좔좔~~ 된장국에 고사리나물, 오이무침, 파 겉절이에 음식 솜씨가 대단하다. 든든하게 고봉의 밥 한 공기 뚝딱 비웠다.
식사하며 올레 얘기와 당신들 농사짓는 얘기. 밭농사 짓다가 최근 3년 전부터 무화과 농사를 짓는단다. 육지 무안에서 기술을 배워오는데 잘 안 가르쳐주더란다. 사모님의 얘기에 과묵하신 이장님은 티브이만 바라본다. 사람 사는 모습이다.
<오늘의 경제활동>
점심 종달항 해룡호의살아있는갈치 식당 갈치조림 15,000
성산 제주아리마찜질방 사우나 4,500
성산 삼수정 식당 갈비탕 9,000
버스비 3,900
우의 2,000
1코스 시흥리 강병희 이장네 민박 25,000
계 59,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