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 좌충우돌 올레 이야기와 미완의 2코스
1코스 '강병희 이장네 민박'의 친근함과 입에 맞는 건강한 아침상에 든든하게 출발합니다. 어제 초저녁부터 내리던 비는 출발하는 찰나에 멈춰줍니다. 시흥리에서 성산리까지 이어지는 해변 길을 따라 쭉 걷습니다. 비구름에 드리워진 우도는 가물가물합니다. 우뚝 솟은 성산일출봉은 구름 모자 쓰고 어디론가 갈 채비입니다. 곧 있으면 못 볼 것 같습니다.
성산갑문을 건너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종잡을 수 없는 바람에 쓰고 간 우산이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입니다. 내리는 비는 참을 만한데 갈피를 못 잡는 갈대 같은 바람에 육지 촌넘 제대로 당합니다. 비 오는 방향으로 우산을 들면 금세 반대로 방향이 바뀌면서 우산이 확! 뒤집힙니다.
"이런 우라질ㅜㅜ"
사나이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몇 번 뒤집히다 보니 우산 살대 끝부분이 결국 부러지고 맙니다. 비가 차라리 주룩주룩 내리면 우의를 입겠는데 아니올시다 입니다. 비는 비인데 아주 조금 내리는 거 머시냐? 가랑비? 이슬비? 보슬비? 우산으로만 잠깐 가려도 되는 비입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슬슬 바짓단부터 차가움이 시원하게 전해져옵니다.
성산일출봉 입구 가게를 막 지나는데 쥔장 할머님이 쉰다리 음료 드시고 가랍니다. 그렇지 않아도 비바람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데 잘 됐습니다. 자리에 앉아 할머님이 주시는 쉰다리를 사발에 따라 천천히 음미합니다. 올레 기행문에 6코스 가면 꼭 먹으라고 강요했거든요. 6코스에서 다음 가게 다음 가게 하다가 결국 21코스 돌 때까지 못 먹었습니다. 쉰다리 색깔이 미숫가루 탄 것 같기도 하고 새콤한 게 요구르트 같기도 하고 끈적거림이 요러브 녹은 것 같기도 한 오묘한 맛? 느낌? 이랄까요~ 그리 달지도 않아서 간식으로는 최고입니다.
펜이 질문에 걸려든 할머님께서 쉰다리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주십니다. 옛날에는 밥이 쉬기 직전 먹기도 애매할 때 발효해서 음료수로 먹었다. 그런데 올레가 개장되면서 목마른 올레객이 어떤 할머니 댁에서 먹어보고는 베리굿했다는. 그래서 올레꾼이 팔라고 해서 직접 만든 쉰다리를 유통하기 시작했다고. 그게 6코스에서 맨 처음 일어난 일. 이제는 시청에서 어르신 일자리 창출을 위해 쉰다리를 만들어 판다고. 위생관리 상 쉰밥 대신 쌀과 보리를 2:1 비율로 밥을 해서 누룩을 넣어 발효한다고. 500mL 일반 생수병에 담아 3,000냥 받기에 시청에 건의해서 고유 상표를 만들어 페트병에 붙여서 팔면 홍보가 돼 잘 팔리지 않겠느냐며 귀띔해드렸습니다.
한 병을 순식간에 비우고 할머님께 양해를 구하고 함께 셀카를 찍습니다. "늙은이를 찍어서 뭐 하게?" 하시며 핀잔을 주시지만 포즈는 진지합니다. 그런데 블로그 글을 쓰고 사진 붙이기를 하는데 사진 여러 장이 날아가고 없습니다. 비 맞은 폰카가 펜이를 순식간에 사기꾼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할머니 죄송해요ㅜㅜ 할머니 저 사기꾼 아니랑게~' 어제 비 맞았던 핸드폰의 이동식 SD 카드가 말랐는지 하루 만에 다시 읽힙니다. 바로 할머니 사진 바로 투척~~
또 가게를 나서자 비와 바람과 우산과 한판 씨름이 붙습니다. 그래서 성산일출봉 오르는 것을 생략합니다. 하지만 관광객은 비바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망 불투명의 세계로 빠져듭니다. 가까스로 성산 터진목 4.3 사건 집단학살 유적지 해변을 지나 모래가 검다는 광치기 해변에 도착합니다. 1코스 종점입니다. 광치기 해변은 썰물 때 넓은 암반지대가 펼쳐져 광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광치기'는 빌레(너럭바위)의 제주어입니다.
해변 한쪽에 비를 맞고 있는 말이 안쓰럽습니다. 말 쥔장들은 뭐 할까요? 2코스까지 돌며 비에 방치된 말을 여러 번 봅니다. 원래 그렇게 키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큰 도로를 건너 성산갑문을 보며 내수면 둑길을 바라봅니다. 비바람 치는데 식산봉(60.2m)을 오를 것인가 말 것인가 갈등합니다. 평소 같으면 비 오는데 산에 간다면 뭐라 할까요? 답은 뻔하지만, 올레니까 용서가 되고 이해가 됩니다. 오늘 이 판단이 대낮에 목욕탕에 가게 되고 코스를 벗어나는 게 살길이란 교훈을 얻었습니다.
비는 오는데 아무도 걷지 않은 식산봉을 홀로 걷습니다. 내가 미쳤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행히 산과 마을로 접어드니 바람은 잠잠해집니다. 금방 식산봉 전망대에 이릅니다. 올레책과 기행문에 식산봉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감탄사 연발인데 현실은 비구름에 가려 시계 5m 이내입니다. 내가 미쳤지... 대신 전망대 밑에 하얗게 핀 야생화 무더기에 위로를 삼습니다.
식산봉이 있는 오조리는 왜구 침입이 잦아 조방장이 군인이 많게 속이려고 식산봉을 군량미가 많은 것처럼 꾸민 후로 불렀다고 합니다.
남녀가 따로 사용했다는 샘 '오조리 족지물'을 지나 해녀 신춘자 할망네와 오조 홍무생 할망네 민박이 근접해 있습니다.
마을을 지나 어느새 철새도래지에 접어듭니다. 비 오는 중에도 철새 특히 노랑부리저어새를 보기 위해 저수지인지 바다인지 모를 곳까지 깊이 들어갑니다. 노랑부리저어새가 2코스 스탬프 그림이거든요. 노랑부리저어새가
그만큼 상징성이 있습니다. 길이가 86cm이고 부리 끝이 노랗다고 하는데, 몇 종류의 새들을 보긴 했는데 긴가 민가입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이 동그랗게 둘러싸인 바다. 그 가장자리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우산 받쳐 들고 비로 흠뻑 젖은 수풀 나무 사이를 헤맵니다. 오로지 리본만 바라보고 따라갑니다. 나무가 빽빽한 산을 걷고 갈대숲을 지나 어떤 땐 바닷물을 밟을락 말락 하게 초근접 해서 가기도 합니다. 주변은 오로지 펜이 혼자입니다. 짙은 구름과 비로 시야는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근처에 무슨 건물이라도 보여야 감을 잡을 텐데...
그러면서도 우중에 사진 찍을 건 다 찍고 갑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신발 안까지 물이 철퍽철퍽합니다. 이미 바지와 상의 앞부분과 소매는 젖었습니다. 글을 정리하며 사진 파일 정보를 보니 거의 30분 이상 헤맸습니다. 가까스로 철새도래지를 빠져나와 성산읍내에 도착하니 안심이 됩니다.
그런데 꼴이 가관입니다. 완전히 젖은 바지와 신발 그리고 상의까지... 홍마트 앞에서 중간 스탬프 찍고 옆 중국집에서 짬뽕을 먹으며 생각합니다. 이대로 올레를 걷는 건 무리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따뜻한 짬뽕 국물이 크나큰 위안을 줍니다. 인터넷 폭풍 검색해서 목욕탕을 찾고 코스를 벗어나기로 합니다.
대수산봉과 섭지코지를 맞바꾸기로요. 한 번 젖었으면 됐지 대수산봉에서 또 당하면 안 되지요. 200m 지점의 동남탕에 갑니다. 왠지 주인일 것 같은 이발사 아저씨의 눈치를 보며 드라이기로 젖은 옷과 양말 그리고 신발을 말립니다. 다 마를 순 없지만 응급조치하고 샤워를 합니다.
옷을 다시 챙겨 입고 4km 떨어진 섭지코지까지 걸어갑니다. 이젠 걷는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아직 섭지코지에 다다르지 못했는데 차량 행렬이 길게 늘어집니다. '아무리 어린이날 연휴라지만 섭지코지가 이렇게 인기가 많아?' 하면서 멈춰선 차들이 부럽게 펜이는 보무도 당당하게 걷습니다. 운전기사 빼놓고 차에서 아예 내려 걸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 어린아이들 손을 잡고요.
한화 아쿠아 플래닛에 왔을 땐 상·하행 차들이 서로 뒤섞여 오도 가도 못 합니다. '어린이 손님이 이렇게 많아?' 오늘이 어린이날이라 부모 손 잡고 수족관에 가는 가족이 많았던 겁니다. 밖에 싸돌아다니니 날짜 감각, 요일 감각이 무뎌집니다.
섭지코지 입구 매표소에 다다릅니다. 입장료는 무료! 단, 해마열차, 전동카트, 전기(일반)자전거, 꽃(관광) 마차, 세그웨이, 전동바이크는 유료! 탈것도 많습니다. 펜이는 주님이 주신 자가용으로 갑니다.
다행히 오후 들어 비는 소강상태입니다. 하지만 곧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하늘 탓에 아무리 멋진 경치가 있어도 산지기 거문고입니다. 더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가장 가까운 올레로 가기로 합니다. 이미 시간이 오후 3:30분이 넘어섰습니다.
마침 빈 택시가 있어서 신양교차로까지 이동해 한참을 걸어 휴리조트를 지나 혼인지 입구 올레에 올라탑니다. 혼인지(婚姻池)는 삼성혈(三姓穴)에서 솟아난 탐라의 개벽 시조인 고(高), 양(梁), 부(夫) 삼신인(三神人)이 있었다고 합니다. 삼신인이 동쪽 바닷가에 떠밀려온 함 속에서 벽랑국, 즉 푸른 파도의 나라에서 온 세 공주를 맞아 혼인한 곳이 혼인지입니다. 삼신인과 세 공주가 합방한 신방굴을 보면서 일본의 동굴 진지가 왜 생각날까요...
삼신인은 함에서 나온 송아지, 망아지를 키우고 오곡 씨앗을 뿌려 탐라의 농경 생활 시작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제주의 건국신화입니다. 오전에 비가 내려서인지 혼인지 경치가 더 선명하고 진합니다. 진한 녹색의 수려한 경치를 보며 데크를 따라 천천히 걸으니 마치 신선이 되는듯합니다. 이곳에서 치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온평마을에 접어들자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바로 '백년해로 나무'입니다. 온평 포구 앞에서 종점 스탬프를 찍으며 2코스를 마무리합니다. 비바람 때문에 좌충우돌한 2코스. 날씨가 맑았으면 더할 나위 없는 철새도래지 조망 지역입니다. 각종 철새의 삶과 비상 그리고 갈대와 어우러진 주변 풍경이 그려질 텐데... 너무 아쉬운 2코스입니다. 제주를 다시 찾게 될 이유가 생겼습니다. 미완의 2코스입니다.
<오늘의 경제활동>
제주전통음료 쉰다리 3,000
점심 성산읍 유성반점 삼선짬뽕 8,000
젖은 옷, 신발 응급조치 동남탕 4,500
섭지코지~신양교차로 택시비 4,300
저녁 온평포구식당 아나고탕 10,000
바랑쉬 게스트하우스 17,900(쿠팡가)
계 47,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