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말 대역전극~ 그리고 소중한 인연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제목처럼 정말 지루한 코스가 마지막 표선 해비치 해변 백사장 한 방에 날아간 코스입니다. 올레의 9회 말 대역전극입니다. 이거 한 방 때문에 힘든 길 참고 참으며 걷고 또 걸었는지 모릅니다. 통오름과 독자봉을 제외한 길이 모두 콘크리트 아니면 아스팔트 길로 정말 지루했습니다. 그런데 표선 해비치 백사장의 너울이 만든 물결 모래에 자동으로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었습니다. 단단한 물결 모래를 걷거나 바닷물 위를 걸으니 피로가 싹 가십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지루함이 편안함으로 뒤바뀌는 대역전극이 펼쳐졌습니다. 몇 년 전에 와서 이런 맛을 느꼈는데 그곳이 3코스였는지 오늘에야 알았거든요. 정말 기막힌 역전 드라마입니다.
오늘은 또 정말 소중한 인연을 만났습니다. 250일 동안 오직 걸어서 텐트에 숙식하며 7,000km 해안선을 걷는 환경운동가입니다. 또 한 분은 블로그 서로이웃으로 표선 해비치 해변에서 카페를 운영하시는 제주 성산 서부교회의 장로님입니다. 인연 얘기는 만나는 지점에서 풀겠습니다ㅎㅎ
온평 포구에서 출발해 6.8km 통오름 입구까지 마을과 밭이 이어지는 지루한 콘크리트 길을 걸었습니다. 다행히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 감귤 꽃향기에 매료되어 그 지루함이 커버되었습니다. 귤꽃 향기를 여러분에게 보낼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향기가 얼마나 진하고 멀리 가는지 걸으면서 계속 코를 벌름거렸습니다. 백서향이나 천리향 꽃을 보면 몇 개 따서 주머니에 담고 한 개씩 꺼내 코에 물고 다니면서 그 향기에 빠지곤 했거든요.
소나무와 삼나무 숲이 있는 통오름(143.1m)과 독자봉(159.3m)에서는 정말 내려오기 싫었습니다. 미세먼지가 전국을 강타한 오늘, 제주도도 대도시보다 높은 수치였으니까요. 아침 출발할 땐 어제 온 비로 파란 하늘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먼발치 산은 온통 뿌옇습니다. 제주의 오름은 산림욕장입니다. 따로 산림욕장에 갈 필요가 없거든요. 산새 지저귀지, 산소 펑펑 쏟아지지, 이미 펜이는 자연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천천히 걷습니다. 하지만 오르면 내려와야 하는 게 세상의 이치
또다시 시작된 고단한 길, 그 이름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입니다. 올레에서 그 흔한 흙길이나 잔디길, 풀길은 코빼기도 안 보입니다. 그래서 3코스나 4코스가 힘들어 올레객이 꺼린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내일 4코스도 걸어봐야 알겠지만요.
제주에서 필을 받아 20년간 살면서 제주의 참모습을 앵글에 담은 사진가 김영갑 갤러리에 들렀습니다. 그의 책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리뷰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삶을 처절하게 사진과 맞바꾼 인생에 대한 얘기를 처음 접하고 반드시 갤러리에 가보겠단 생각이 들었거든요. 사진 촬영 금지라는 직원의 얘기에 고인의 뜻으로 알고 분위기만 전하는 딱 한 컷만 찍었습니다.
루겔릭 병으로 촬영할 수 없는 그 날까지 작품을 만들고 전시회를 개최하고 당신의 손으로 폐교를 갤러리로, 운동장을 숲으로 만들었습니다. 갤러리에 틀어진 영상을 한참 보았습니다. 사진과 제주를 사랑한 김영갑, 그대는 진정 제주 사람이었습니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리뷰를 붙입니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리뷰
갤러리 옆에 있는 아기자기한 '오름 카페'에서 점심으로 파스타를 먹고 또 출발합니다. 역시나 콘과 팔트 길입니다. 걸을수록 오전의 산소 저장 탱크 오름 길이 생각납니다. 이제 남은 올레 코스도 두 개밖에 남지 않았으니 오름 오를 일도 별로 없을 것 같아 아쉽습니다.
360여 개의 오름을 주제로 오름을 오르는 '오름 종주 계획'도 도전해볼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오름 무아지경을 생각하며 걸어가는데 별안간 꾸룩꾸룩하며 푸드덕하며 날아갑니다. 장끼시키 날아가는 바람에 펜이 깜놀해 새가슴이 되었습니다. 지도 놀랐겠지만 나도 놀랐시야ㅜㅜ
어느덧 육지길(?)이 끝나고 B코스와 만나는 바닷길 신풍 포구입니다. 갑자기 시원하게 녹색 향연이 펼쳐집니다. 신풍신천 바다목장입니다. 소들의 방목지입니다. 확 트인 초록 잔디와 파란 바다가 발로 찍어도 작품이 나올성싶습니다.
때마침 만난 7,000km 해안선을 걷는 '대한민국 곰' 닉네임을 가진 분과 사진도 찍습니다. 길에서 만난 인연은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처럼 이렇게 서로 찍어주고 셀카도 찍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꽤 유명한 사람입니다.
올해 56세로 거의 40kg에 육박하는 배낭을 메고 인천광역시 강화도에서 출발해 서해안, 제주도, 남해안을 거쳐 동해안 강원도 고성까지 간다고 합니다. 펜이 연방 혀를 내두릅니다.
이번이 세 번째 해안선 종주 도전이란다. 오늘로 82일째인데 그동안 신발 세 켤레를 교환했고, 그동안 면도를 안 했는지 하얀 수염이 마치 도사 같았습니다. 그동안 18개의 섬을 돌았고 제주도도 약 한 달 계획으로 17일째랍니다. 펜이 올레 완주 한 달은 명함도 못 내밀 형편입니다.
우도에서 몸에 종기가 생겨 수술 후에도 계속 걷는다는 그와 바다목장에서 작별했지만, 안산에서 온 낚시하는 사람들을 만나 농땡이 치다 그와 또 만났습니다. 서로 얘기하다 보니 낚시꾼과 대한민국 곰은 같은 안산 시민으로 얘기가 길어집니다. 덕분에 커피도 얻어먹고 낚시 구경도 합니다. 펜이와 곰은 숙박지가 표선으로 똑같습니다. 한 사람은 게스트하우스에 또 한 사람은 텐트에서 말입니다. 펜이 또 다른 인연이 기다리고 있기에 먼저 자리를 뜹니다.
시원하게 확 트인 바다를 보며 또 다른 만남을 생각해봅니다. 만남을 생각하니 가슴이 통게 통게 하며 미소 지어집니다. 하얀 소금막 해변과 약 8만 평의 드넓은 표선 해비치 백사장의 자연을 음미하며 맨발로 걷다 보면 3코스 종점에 다다릅니다. 종점 바로 앞에 '까떼커피' 카페 안으로 들어갑니다. 주방에 인터넷에서 뵌 중절모 쓰신 신사 한 분이 계십니다. 서로 몇 번 만나 아는 사람처럼 악수하며 반갑게 맞습니다. 블로그 서로 이웃 '하늘 나그네'님입니다.
그분도 블로그에서 저와의 만남을 <서로이웃 '펜이'를 직접 만나다 http://naver.me/GWmUazdT>로 표현했습니다. 오프라인에서 처음 만난 셈이죠. 고창에서 복분자 농사를 짓는 '상희네 복분자'님과 오프라인 만남 이후 두 번째입니다.
까떼커피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민속해안로 594, http://naver.me/xM98uG62
상희네 복분자 블로그 http://naver.me/GWmUazdT
펜이보다 세 살 많아 형님으로 호칭했습니다. 그래야 더욱 친근감이 생겨서죠. 대구 분으로 2년 전에 제주로 이주해 많은 고생 끝에 현재에 이른다며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하시다며 당시를 회상하는 것 같아 마음이 찡합니다. 영남과 호남의 만남입니다. 같은 크리스천에 직렬은 다르지만 같은 공직자 출신이라 서로 얘기도 잘 통했습니다. 마침 시간이 되어 함께 사우나를 가고 함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남자들이 가장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을 동시에 해결했습니다.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다음에 마눌님과 함께 꼭 찾아뵙겠다며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표선 '이레 게스트하우스'에 여장을 풉니다.
올레 완주 이후 지난 여름휴가 때 꼬마 캠핑카를 가지고 마눌님과 함께 찾아뵀습니다. 형님과 형수님이 아주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그날 저녁은 펜이가 대접했습니다. 표선 해비치 해변을 두 부부가 함께 걸으며 제주의 아름다운 일몰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남은 서울 어느 하늘 아래였습니다. 펜이는 여행 대학 강의 들으러, 형님은 사업차 상경했던 거죠. 우연히 서로의 블로그를 통해 상경 사실을 알게 돼 재회했습니다. 제주와 광주가 아닌 제3의 장소에서 만나니 또 다른 맛이 났습니다. 그래서 또 다음을 기약했는데 그때가 곧 오리라 확신합니다.
오늘 만남을 생각하며 제주올레에서 만난 인연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서로 생김새와 지역 출신이 다르지만 하나같은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욕심내지 않고 자기 것을 더 내어주고 싶은 마음이 서로 마음의 벽을 허문 것 같습니다. 수많은 인연 중에 육신의 장막이 벗어지는 날까지 이어지는 인연은 과연 몇이나 될지... 자기 하기 나름이겠죠~
<오늘의 경제활동>
점심 김영갑 갤러리 오름카페 문어전복토마토 파스타 16,500
김영갑 갤러리 입장료 3,000
표선 수복 사우나 10,000
저녁 하늘나그네 이웃님께 대접받음
표선 이레하우스 30,000
계 59,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