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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희 Sep 11. 2024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의 초상]프랭크 카프라의 <멋진 인생>

“제발 저희 아빠를 살려 주세요”


영화의 대사를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캐릭터의 말은 때로는 비슷하게, 혹은 전혀 다르게 기억된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영화 대사를 정확히 맞춰야 하는 퀴즈가 진행되고 있었다. 영화 <봄날은 간다>(2001) 속 은수의 대사가 “라면 먹고 갈래요?”가 아니라, “라면 먹을래요?”라니 놀라웠다. 단지 한 글자가 추가됐을 뿐이지만, 마치 누군가의 이름에 점 하나 잘못 붙인 것처럼 커다란 차이로 다가왔다. 같은 대사가 예능이나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해 여러 차례 패러디되는 가운데, 패러디가 원본을 밀어내며 마침내 집단 기억 교정술에 성공했음을 뒤늦게 인지했달까?


반면 대사가 잘못 기억되는 과정이 집단적이기보다 개인적일 때도 있다. 내가 프랭크 카프라의 <멋진 인생>(1946) 대사를 착각한 건 명백히 후자다. 도입부에 등장하는 기도하는 목소리 중 “저희 아빠를 살려주세요.”라는 대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재생을 반복해도 그런 대사는 없었다. 다만 어린 딸이 “저희 아빠를 집으로 돌려보내 주세요.”라고 기도했을 뿐이다.


내 기억의 오류는 더욱 심각한 착각을 기저에 깔고 있었다. 나는 조지(제임스 스튜어트)가 가족과 지인의 간절한 기도로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착각했다. 조지는 크나큰 좌절에 빠졌지만, 아직 그는 보험증서를 손에 쥐고는 다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뿐이다. 내가 착각한 이유는 “제발 아버지를 살려주세요.”라는 기도에 응답하는 영화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착각은 영화의 구조 속에 내재해 있다. 영화는 거대한 플래시백으로 이뤄져 있다. 죽음을 맞기 직전, 눈앞에 자기 삶의 중요한 지점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고 할 때, 플래시백은 그것을 가시화하는 기법이다. <시민 케인>(1941)은 케인이 유언 대신 남긴 마지막 말, ‘로즈버드’의 비밀을 풀기 위해 그의 삶을 과거에서부터 반추는 이야기로, 회상의 주체로 기자 캐릭터를 내세운다. <멋진 인생>의 플래시백은 조지를 위한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의 천사에게 이상 신호로 감지되어 수호천사를 파견하기로 하고, 수호천사 클레런스에게 조지의 인생을 브리핑하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어떤 방식이든 누군가의 삶을 반추한다는 건 분명 죽음을 연상시킨다.  


천사들의 육체 없는 목소리의 안내에 따라 관객인 우리는 조지의 삶을 엿본다. 어린 시절 조지는 얼음물에 빠진 동생 해리를 구하고, 약국을 운영하던 가우어 씨가 잘못 처방된 약으로 과실치사를 저지를 위험에서 구제한다. 성장한 뒤에는 악덕 고리대금업자인 포터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가업인 건축 사무소를 잇는다. 온 세계를 떠돌고 싶었던 그의 꿈은 대신 동생이 이룬다. 조지는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인 베드포드 폴즈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다는 부분에서 자꾸만 마음이 맴돈다.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 속에서 가장 마음이 아프면서도 감동적인 부분은 조지가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나기 직전, 은행 파산으로 회사에 위기가 닥친 에피소드에서다. 조지는 허니문카를 타고 이동하던 중 투자자들이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며 회사로 몰려드는 상황을 목격한다. 사무실에 도착해 보니, 동업자인 빌리 삼촌이 투자금을 몽땅 은행 빚을 갚는 데 쓰면서 회사에는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이 이미 동이 난 상황이다. 조지는 닫아걸었던 문을 열어 사람들이 사무소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그들에게도 회사가 필요함을 상기시키며 투자금을 빼지 말라고 설득한다. 대신 은행이 다시 문을 열기까지 2주간 쓸 생활비를 각자가 필요한 만큼 조건 없이 빌려준다. 어느새 동석한 아내 메리는 수중에 있던 신혼 자금을 몽땅 내놓는다. 조지는 각자 조금씩 더 많이 가지려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액수를 조정하며 하나하나 장부에 기록한다. 최소 20달러 이상의 금액이 오가던 중 데이비스 부인이 “17달러 50센트”라고 말한다. 조지는 몸을 일으켜 부인의 볼에 진하게 키스한다. 이렇게 감동적인 액수라니.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할 때, 조금이라도 아껴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 숫자에 담긴 마음이 찡하도록 감동적이다.


누군가에게 조지는 운명에 순응한 선한 사람 정도로 보이겠지만, 실은 그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가 투쟁한 대상은 포터라는 인물로 의인화된 자본주의다. 포터는 마을 전체를 자신의 소유로 두고, 사람들이 위에서 군림하며 부를 축적하고자 한다. 오늘의 시선에서 포터는 현대적 인물이고, 조지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옛날식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그 이상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그러면서도 영화가 재생되는 순간마다 얼마나 밝은 빛으로 빛나는지를 보게 된다. 도입부 반짝이는 별의 이미지를 품은 영화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먼 거리에 놓여있지만 우리 눈에 관측되는 별처럼, 재생하는 순간 시공간을 초월해 우리에게로 다가온다.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플래시백은 플래시백 이후 작동하는 허구의 플래시백이자, 부정의 플래시백이다. 이번에는 조지가 직접 자기 없는 자기 삶을 본다. 영화는 만약 조지가 마을에 없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를 보여준다. 동생 해리는 물에 빠져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가우어 씨는 독약을 먹여 살해한 죄를 평생 족쇄처럼 달고 사는 폐인이 되었다. 메리는 결혼하지 않은 채 평생 독신으로 지낸다. 메리와 조지가 함께 가꾼 집은 흉물로 남아 있다.  시간여행을 주 장치로 사용하는 오늘날의 영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다. 과거를 바꾸자, 현재 바뀌 예기치 못한 결과가 초래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멋진 인생>만큼 한 존재의 힘을 강조하경우는 없었다. 조지가 전 재산을 잃고 공금 횡령 혐의로 수감될 최악의 위기 속에서, 어떤 불행도 현재 그에게 닥친 불행을 이길 수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가 없던 세상에서 부활한 뒤, 끔찍한 비극을 맛본다. 그가 부활했고, 다시 태어난 것은 나의 착각이 아니라 엄연히 재현된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돈이 모이고, 함께 노래를 부른다. 장례식의 풍경도 이와 비슷하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돈이 모이고, 함께 노래를 부른다. <멋진 인생>의 마지막을 다시 보며 이것이 장례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이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마저 작별을 그리는 ‘올드랭사인’이다. 물론 그 장면은 충만한 행복감을 주지만, 동시에 그 행복감이 이미 상실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 장면은 <나의 올드 오크>(2023)의 마지막을 연상시킨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꽃이 모이고, 연대의 행진이 이어진다. 켄 로치는 자신의 영화에서 지속해서 장례식을 그리고 있다. 누군가는 알 것이다. 장례식이라도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장례식이 끝나면 모든 것이 사라질 것만 같은 두려움과 불안을. 어쩌면 이제는 작별의 영원한 유예를 위해 <멋진 인생>을 꺼내보게 될지 모르겠다. 한 번도 가지지 못했던 벅찬 포옹의 순간이, 내가 상실한 것이라 착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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