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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희 Oct 11. 2024

등받이 없는 의자를 위한 소나타

[아버지의 초상]구로사와 기요시의 <도쿄 소나타>

초등학생이 된 나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피아노 학원에 등록했다. 당시 피아노를 배운다는 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는 피아노에 대한 애정도 재능도 없었지만, 방과 후 활동의 하나로 피아노 학원을 오갔다. 지방 도시의 아파트로 거주지를 옮긴 후, 우리 집에는 커다란 나무를 깎아 만든 그랜드 피아노가 생겼다. 피아노는 전축과 함께 중산층 가정의 필수품 중 하나였다. 기껏해야 젓가락 행진곡이나 동요를 연주하는 게 다였지만, 그 존재의 의미는 어떤 수준의 곡이 얼마나 자주 연주되느냐에 국한되지 않았다. 무거운 피아노는 이제 이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자, 이곳에 뿌리내리겠다는 다짐이었다.


언니와 내가 성장하고 집을 떠나면서 피아노 뚜껑이 열리는 날은 거의 없었지만, 피아노는 거실에서 내 방으로 자리를 옮기며 살아남았다. 집에 돌아온 나는 사라진 책상 대신 피아노를 책상 삼아 그 위에서 무언가를 끄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파트 노후로 자체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하게 되면서, 피아노도 다른 오래된 가구들과 함께 집에서 밀려났다. 구매 당시 적어도 백에서 이백만 원은 되었을 피아노는, 팔릴 때는 한 푼의 값어치도 매겨지지 못했다. 수거 기사 쪽에서는 오히려 돈을 받아야 할 것을 무료로 해준다는 투였다. 피아노의 마지막은 그렇게 초라했다.


피아노는 떠났지만 피아노 의자는 남았다. 피아노를 잃은 피아노 의자는 안방으로 위치를 옮겼다. 하농이나 체르니, 015B의 악보가 담겼던 의자 밑 수납 칸은 이제 엄마 아빠의 잡동사니들로 채워졌다. 안방은 늘 남은 의자들의 최후의 보루였다. 껍질이 일어난 4인용 거실 소파 중 살아남은 1인용 소파도 안방에서 여생을 다했고, 나의 학창 시절을 함께했던 바퀴 달린 학생용 줄무늬 의자도 어느 순간 안방으로 옮겨져 아빠 전용 의자가 되었다가 사라졌다. 그중에서도 딱딱한 나무 피아노 의자는 가장 생명력이 강했고, 마지막까지 아버지의 전용석이 되었다. ‘왜 편한 의자 하나 사드릴 생각을 못 했을까’라는 언니의 말에 그제야 '정말 그렇구나' 깨닫게 된 까닭은 의자에 대한 불평일랑 한마디도 안 하신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가구인 듯 의자인 듯 감쪽같이 공간에 적응하는 의자에 시나브로 길든 탓이었다.


아버지의 의자에는 등받이가 없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 <도쿄 소나타>(2008)에서 실업은 등받이 의자를 잃는 것으로 표현된다. 회사에 출근해 여느 때처럼 업무를 보던 과장 사사키(카가와 테루유키)는 상사와의 짧은 면담 직후 그대로 회사를 나와 버린다. 회사를 나온 그가 마주한 건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등받이 없는 의자에 하나둘 앉아 있는 풍경이다. 둥글고 판판한 원통 모양의 구조물을 의자 삼아 멍하니 앉아 있던 이들은 하나둘 무거운 몸을 일으켜 무료 급식 대열에 합류한다. 그날부터 출퇴근하듯 이곳에 드나들게 된 사사키는 역시 양복 차림으로 나타난 친구 쿠로스와 마주친다. 알람을 업무 전화로 위장하며 직장인 연기를 계속하던 쿠로스는 마침내 연기하는 것처럼 무료 급식 줄에 뛰어든다. 속이고 속아주는 두 사람의 위장은 그로써 막을 내린다.


둘은 공공 의자를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낸다. 서점에 비치된 등받이가 있는 독서용 의자는 특히 실업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등을 맞댄 형태로 빙 둘러 배치된 빽빽한 의자에 달라붙은 직장인 차림의 사람들은 마치 의자와 한 몸이 된 구조물처럼 보인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정박한 실업자들이 만든 풍경이 마치 피아노를 잃어버린 피아노 의자 같다고 생각했다. 자리를 잃어버렸으나 자리에 앉던 습관이 몸에 남은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 배회한다. 배회의 끝은 구직 사무소다. 구직 사무소를 향하는 계단에는 사람들의 행렬이 똬리를 틀고 길게 이어지며 사람이 곧 계단이고, 계단이 곧 사람인 풍경을 만든다. 아침 일찍 서두르지 않으면 상담소 문턱에도 다다르기 힘들 정도다. 긴 인내 끝에 겨우 도달한 상담소 앞 의자는 천국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처럼 변변찮은 의자조차 마련되지 않은 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언제라도 재방문해야 하는 반성을 요구하는 자리일 뿐이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사사키는 의자는커녕 탈의실조차 마련되지 않은 곳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쇼핑몰 관리직을 받아들인다.


실업한 가장에게 남은 최후의 보루는 가족의 식탁이다. 그러나 실업은 잃지 않은 본래의 자리에 앉는 일조차 버겁게 만든다. 더는 예전의 그가 아니기에 다시 의자에 앉기 위해서는 자신이 아닌, 자신이었던 다른 사람을 연기해야 한다. 쿠로스는 울리는 전화기로 존재를 위장하고, 사사키는 권위적인 행동으로 존재를 가장한다. 그러나 쿠로스의 식탁에는 그의 연기를 애써 모른척하는 듯한 가족이 있다. 집안의 사사키를 묘사할 때, 안 그래도 단신인 사사키를 아내 메구미보다 낮은 곳에 위치시키며 권위 유지의 불가능함을 폭로한다.


두 명의 가장은 모두 실패한다. 쿠로스는 아내와 함께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사사키와 가족은 각자의 극단으로 치닫는다. 장남은 미군에 입대하고, 아내 메구미는 집안에 든 강도와 세상 끝으로의 기이한 여행을 떠나고, 켄지는 버스 무임승차가 발각돼 경찰서로 넘겨져 구치소에서 밤을 보내며, 화장실 청소 중에 발견한 거액의 현금 봉투를 훔친 사사키는 뺑소니 사고를 당해 생사가 불투명한 상태로 거리에 방치된다.


이들은 마치 나쁜 꿈에서 깬 것처럼 다시 집으로 돌아와 식탁에 앉는다. 새벽녘 아무도 없는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저마다의 걸음이 마지막까지 지연된 피아노 멜로디 같다고 생각했다.


피아노 의자에는 등받이가 없다.


마지막 켄지의 연주가 감동적인 이유는 그 음악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드뷔시의 <달빛>이 영화 속에 삽입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매번 들을 때마다 새롭게 무장해제 되고 마는 무시무시한 곡이다. 하지만 피아노 의자에 한눈을 팔게 되면, 그 장면이 아름다운 이유 중 등받이 없는 의자의 지분이 조금은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진다. 피아노 의자는 등받이가 없어도 괜찮은 드문 의자에 속한다. 오히려 등받이 있는 피아노 의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왜 그런가 하니 간단히 말해 연주자의 움직임에 제약을 없애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도쿄 소나타>에서 만큼은 등받이를 잃어버린 이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으로서의 피아노 의자를 재발견할 수 있다. 등받이 의자를 잃어버려도 당신의 연주는 아름다울 수 있다. 자신만의 피아노를 찾는다면 말이다.


각자의 피아노를 찾던 사사키와 메구미는 이제 피아노를 연주하는 켄지의 모습에서 놓치고 있던 피아노를 지금 막 발견한 참이다. 켄지가 사사키를 향해 내던지고, 끝내는 계단에 자신의 몸을 거꾸로 내던지며 온몸으로 연주했던 그 피아노 말이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는 그 위에 앉았던 누군가의 몸과 그가 바라보았을 풍경과 그 몸이 꿈꾸던 것과 그 멜로디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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