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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희 Oct 16. 2024

죽음을 연습하는 죽음

[죽음과 영화] 커스틴 존슨의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

한 남자가 죽었다. 길을 걷다가 머리 위로 떨어진 에어컨 실외기인지 구형 컴퓨터인지 모를 낙하물에 부딪혀서. 한 남자가 죽었다. 공사장 옆을 지나다가 인부가 휘두른 각목에 찔려서. 한 남자가 죽었다. 자기 집 계단에서 미끄러져서. 그의 죽음은 하나의 가정이자 허구다. 남자의 딸은 아버지의 죽음이 두려운 나머지 그를 죽인다. 다른 방법으로, 여러 번.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2020)는 다큐멘터리 감독인 딸과 정신과 의사인 아버지의 재능을 녹여낸 합작으로서의 사이코드라마다.


죽음을 연습할 수 있을까. 방법은 있다. 누군가가 죽는 영화를 만드는 것. 커스틴 존슨은 잔인하게도 자신의 아버지를 지속해서 죽이는 영화를 만든다. 이 기획을 위해 무대와 소품, 의상, 촬영, 분장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의 스태프들과 엑스트라가 투입된다. 한 사람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투입되는 영화 제작 현실 여기서도 반복된다. 영화가 아버지의 죽음이 너무 두려운 나머지 그를 죽이기로 한(?) 딸의 이야기인 만큼이나 영화 제작 과정 자체에 관한 영화처럼 보이는 이유다. 딸은 아버지가 천국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와 만나 춤추고 콤플렉스였던 발가락도 깨끗하게 치유되는 기적을 맛보게 한다. 그리고 마침내 장례식장에서 부활시킨다.  


딕 존슨의 죽음의 묘사하는 영화의 방식은 일종의 눈속임이다. 사고 장면에서 실제로 타격을 감당하는 건 그와 같은 옷차림의 엑스트라 배우에게 맡겨진다. 엑스트라는 죽고, 죽고, 또 죽으며 그의 죽음은 잊힌다. 엑스트라라고 표현했지만, 그들은 배우다. 죽음은 배우의 특권이다. 내가 배우가 되고 싶었던 이유에는 배우가 가진 죽음의 특권이 내재해 있었을 것이다. 불만족스러운 현실의 나를 죽이고 무대 위에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소심하고 음울한 사람이 아니라, 엉뚱 발랄하거나, 섹시하고 악독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하나의 무대를 만들고, 하나의 무대를 부술 때 나라는 존재도 새롭게 재건되고 새롭게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그와 같은 반복된 폐허와 무를 바라보는 것에 중독되었다. 그 무렵 나는 카뮈의 <시시포스 신화>에 빠져 있었다. 그는 인생의 허무에 빠져 자살하는 대신 할 수 있는 인간의 선택지를 제시한다. 그중 하나는 배우가 되는 것이었고, 다른 어떤 선택지보다도 가장 마음을 끌었다.


할 수 있다면 배우로 살고 싶었다. 가장 두려운 것은 부모님께 선언하는 거였고, 예정된 궁핍한 삶은 조금 걸릴 뿐이었다. 결국 나는 배우가 되지 못했다. 나의 배우 인생은 한 극단에서 신인 단원을 뽑기 위해 진행하던 워크숍에 등록하면서 막을 내렸다. 등록비 80만 원이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대학 시절 연극을 관람한 뒤 한 배우의 연기에 빠진 나는 그가 소속된 극단이라는 이유만으로 동경을 품었다. 그러나 멀리서 보는 풍경과 가까이에서 본 풍경은 너무도 달랐다.


워크숍은 일종의 오디션 현장이었고, 나는 하나의 상품으로서 나의 가치를 평가받게 되었다. 나는 키가 작고 왜소하며, 예쁘거나 개성 있는 외모도 아니었다. 극단의 대표는 나의 문제점을 ‘매력이 없다’로 일축했다. 호흡과 발성, 신체, 연기 훈련 이후에도 이렇다 할 반전을 끌어내지 못했다. 극회가 배출한 나름 촉망받던 배우의 몰락이었다. 대표가 워크숍을 위해 선택한 희곡의 배역은 한정되었고, 워크숍 참여자 수는 그보다 많았다. 한 배역을 세 명이 쪼개서 맡았고, 나에게는 그중에서도 대사가 가장 적은 마지막 파트가 맡겨졌다. 4개의 짤막한 대화체 문장을 상대 배우와 주고받은 뒤, 사라지는 부분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대망의 첫마디에 이른 순간, 나는 입을 제대로 떼지 못하고 절어버렸다. 그동안 캐릭터가 되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하는 방식으로 연기했던 나는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모든 배우가 무대 위에 나와 있게 한 연출 방식과 나의 연기 방식을 끝내 조화시키지 못했다. 무대 위에서 오랫동안 엑스트라로 존재하던 나는 갑자기 남편에게 버림받아 미쳐버린 여자가 되어야 했지만, 연기하는 순간 무대 위에 있던 건 그냥 나였다. 연극 무대 위에서 저지른 최초이자 마지막 대사 실수였다. 미쳐버린 여자에 몰입하다 내가 미쳐버린 것 같았다. 퓨즈가 나가버리듯 그 순간 연극에 대한 모든 희망과 미련도 사라졌다.


연극이 끝나고 참가자들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쌓아온 실망과 불만을 분명히 드러냈다. 자리가 파한 직후, 나와 같은 배역을 나눠맡았던 배우가 다가와 나의 말에 통쾌했다고 말해주었다. 연극 속의 나보다 연극 바깥의 내가 더 괜찮을 수 있다고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마지막 대표와의 면담에서 대표는 배우가 아닌 극작 분야로서의 동행을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대표의 단원에 대한 지속된 성폭행 폭로가 이어지며 극단은 공중 분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만약 내가 극단에 남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피해자였을까, 무언의 공모자였을까. 무지한 일원이었을까, 아니면 탈주자였을까 가늠해 보았지만, 어느 쪽도 확언할 수 없었다.


내 인생의 첫 캐릭터를 빌려 말하면 나는 어떤 방식이든 탈주자에 가까웠을 것 같다. 성당 강당에서 열린 성탄절 학예회에서 동물병원을 방문한 여러 동물 중, 내가 맡은 배역은 항상 충혈된 눈이 고민인 토끼다. 연극이 끝난 뒤 성당 근처에서 한 어린이 관객이 나를 가리키며 “토끼다”라고 외쳤고, 누군가가 나를 알아본다는 것이 신기하고 즐거웠다. 아빠 역시 성탄절 성당에서 진행된 연극 무대에 서신 적이 있다. 나는 이를 까맣게 잊었는데 언니는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무대에서 아빠는 다른 단원분과 콤비를 이뤄 엑스트라처럼 지나가는 감초 역할을 했는데 코믹 연기를 꽤 잘하셔서 의외라고 생각하고 놀랐다고 한다. 그제야 잊고 있던 무대 위 아빠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지나갔다.


아빠는 때때로 어떤 말을 할 때, 연기하듯이 음률을 섞어서 말씀하시곤 했다. 우리 가족은 애정 어린 칭찬이나, 진심 어린 말을 잘 못했다. 가족 모두 조금씩 가지고 있던 연극성은 억눌린 진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진심이 가닿을 수 있는 끝은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무시무시한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우리 가족이 할 수 있는 건 연극이었다. 아빠는 마치 푸념이나 넋두리하듯이 죽음이 점점 가까워져 온다는 두려움을 가족에게 털어놓으려 하셨고, 남은 가족들은 푸념이나 넋두리 뒤에 숨은 진실이 두려워 표면만을 보며 아빠의 말을 가로막았다.  


돌이킬 수 없을 때까지 미루고 미룬 뒤에야, 어쩔 수 없을 때까지 버티고 버티다가 겨우 죽음이라는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마주함과 동시에 커다란 허구의 형식 속으로 삼켜졌다. 내게 닥친 일이 실인지, 꿈인지, 연극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로 장례식장에 도착해 검은 옷을 입은 채 서로의 망연자실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상객을 맡았다. 장례의 형식은 죽음을 감당할 수 없는 이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몰아치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래도 문득문득 이게 다 무슨 일인가 후회와 두려움이 치민다.  


‘오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카뮈의 <이방인>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뫼르소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 그가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오만한 착각일 뿐이었다. 그와 나는 전혀 다르고, 나는 다만 무감할 수 있는 누군가가 부러울 따름이다.


대학원에 다닐 때 수강했던 비평 강의 첫날, 인상적인 장면 세 개를 꼽아 오라는 과제를 받았다. 어떤 영화를 좋아하느냐는 물음은 익숙하지만, 영화 속 장면을 꼽아보라는 주문은 당시로서는 처음 받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세 편의 영화 속 세 개의 장면을 꼽고 보니, 공교롭게도 모두 누군가가 죽는 장면이었다. 한 소년이 다른 소녀를 찔러 죽이고, 남편의 외도를 목격한 여자가 익사하고, 마지막에는 가스 폭발로 한 여자의 삶이 연기 속으로 사라진다. 자극적이기 짝이 없는 장면들이다. 자극적인 것에 길들여 영화를 감각하는 필터가 얼마나 무뎌졌나를 자각하게 하는 장면 모음이었다. 모범답안은 자극 없는, 그렇다고 대단원도 아닌, 누군가는 스쳐 기억도 못 할 만큼의 장면을 재발견하게 만드는 것이다. 시간을 돌이킨다면 나도 좀 더 멋진 장면을 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뽑은 장면이 모두 누군가가 죽는 장면이라 해도, 각각이 주는 느낌은 서로 달랐다. 한 소년이 다른 소녀를 찌를 때, 그것은 하나의 세계를 죽이는 것임을 깨달았다. 익사한 여자의 몸을 안아 올리는 남자의 반복 동작 누군가를 살리고 싶은 마음의 투영처럼 보였다. 커다란 폭발이 단지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스토브를 끄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사실은, 운명의 아이러니를 몸서리칠 정도로 가깝게 느끼게 했다. 시간을 돌이킨대도 다시 이 장면들을 꼽기로 한다.


‘1초에 25번의 죽음’이라는 로라 멀비의 표현처럼 영화는 죽음과 친밀한 매체이며 그 속에는 무수한 죽음들이 있다. 그럼에도 그것이 누군가에게 죽음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도록 돕는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영화는 영화고, 죽음은 죽음이다. 매번 새롭게 태어나고 새롭게 죽는 영화처럼, 죽음의 상처와 아픔 역시 새롭게 태어나고 새롭게 죽는다. 영화가 죽음의 상처를 치유하지도,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지도 못할 테지만, 영화는 죽음 옆에 나란히 존재한다. 일단은 그것으로 괜찮다고 말하기 위해 나는 영화를 다시 보고, 복기하고, 나의 시각으로 박제한다. 영화를 복기하는 일이 마치 누군가의 생명을 되살리는 일이라도 된다는 듯 절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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