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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희 Nov 14. 2024

올려다본다, 누군가 있다

[closing]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행복한 라짜로'

폐막작은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2018년 작, <행복한 라짜로>입니다.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행복한 라짜로>에는 인물들이 무언가를 올려다보는 행위가 반복됩니다. 이는 늦은 밤 구혼자와 일행이 신부의 집에 당도한 첫 장면부터 두드러지지요. 일행은 2층에 위치한 신부의 방을 올려다보며 노래합니다. 신부의 가족들은 창가에서 이들을 내려다봅니다.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는 위치의 차이는 언뜻 수직적 상하관계를 표시한다고 오해되기 쉽지만, 그 동작이 결혼 풍습에서 드러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풍습은 하나의 연극이자, 결혼을 위한 절차입니다. 결혼을 앞둔 신랑, 신부와 지인들은 이것이 결혼을 성사하기 위한 하나의 연극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편, 라짜로가 사는 마을 전체에서 모종의 연극이 진행 중입니다. 이 사실은 연루된 소수만이 알고 있습니다. 폐쇄적인 삶을 사는 마을 사람들은 구시대의 풍습인 농노 제도와 귀족 제도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열심히 일한 대가를 귀족에게 지불하고, 평생을 가난하게 삽니다. 먹이 사슬의 정점에 위치한 데 루나 후작 부인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저택에 자리 잡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관찰하며, 자신이 마을 사람들을 착취하듯, 마을 사람들은 라짜로를 착취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 해도 그의 착취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죠.


데 루나의 아들 탄크레디는 마을을 통제하기 위한 연극을 은밀히 폭로하는 자입니다. 탄크레디가 라짜로에게 무기로서 새총을 하사하며, 귀족과 신하의 구도를 연기하는 모습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을 축약해서 보여주는 동시에 그 허구성을 폭로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연극 속에 살아온 라짜로에게 그것은 허구가 아닌 진실입니다. 탄크레디는 자신이 라짜로에게 인질로 납치된 상황을 꾸미지만, 아들을 잘 아는 데 루나는 장난임을 눈치채고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러나 심복의 딸 탄크레디의 연극에 속아 경찰에 신고하면서 마을의 상황이 세상에 알려지고, 연극은 끝이 납니다.


라짜로는 착취가 드러나기 이전과 이후의 단절된 세계를 잇는 존재입니다. 산에서 추락해 정신을 잃은 라짜로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이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깨어납니다. 그 사이 그가 알던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 어른이 되고, 나이를 먹습니다. 이전과 다름없이 깨어난 라짜로의 모습은 마치 그림이나, 사진에서 튀어나온 사람처럼 보입니다. 죽은 사람이 더는 나이를 먹지 않는 것처럼 라짜로 역시 그렇습니다.


라짜로가 잠든 사이, 마을 사람들은 허구의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이동합니다. 다만, 현실 세계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연극을 합니다. 올리비아는 저택에 방치된 후작 부인의 물품들을 가져다가 몰래 팝니다. 판매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상품의 질보다는 연기력입니다. 올리비아는 수모를 당하는 판매상을 연기해 타깃이 된 행인의 관심을 끈 다음, 내용물은 쏙 빼고 포장지만 건네는 수법으로 돈을 갈취합니다. 탄크레디의 연극 무대는 자신을 빈털터리가 되게 만든 은행입니다. 그는 투자자처럼 속여 직원으로부터 대우를 받습니다. 그의 행각은 곧 들통이 나 쫓겨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잠깐의 대접과 대상이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것으로 그는 만족하는 듯 보입니다.


올려다보는 행위에 주목할 때, 두드러지는 대상은 달입니다. 초반 장면에서 달은 홀로 닭장을 지키던 라짜로를 가만히 지켜봅니다. 카메라는 달을 클로즈업하며 이를 강조하죠. 라짜로와 사람들이 살던 마을의 특정 장소는 달을 연상시킵니다. 라짜로와 탄크레디가 함께 걷던 건조한 흙빛 도랑은 마치 ‘달 표면’ 같습니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은 달 표면에서 달을 바라보는 사람들일 겁니다. 라짜로는 달을 의인화한 인물처럼도 보입니다. 마을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은 라짜로의 추락으로 표면화됩니다. 그와 동시에 마을사람들은 달의 세계에서 태양의 세계로 건너갑니다. 어쩌면 그 순간 라짜로와 함께 추락한 건, 달이라는 이름의 하나의 세계일지도요.


올리비아와 가족의 새로운 터전은 집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임시 구조물이자, 양의 세계에 어정쩡하게 불시착한 달 기지처럼 보입니다. 라짜로의 부활은 곧 달의 부활이기도 합니다. 라짜로의 등장과 함께 올리비아의 집에 달 모양의 둥근 냄비가 뜨면 거짓말처럼 시간은 과거로 돌아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 됩니다.


영화 속 가장 커다란 기적 은은 달빛 아래에서 벌어집니다. 탄크레디에게 바람맞은 라짜로와 올리비아의 가족들은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던 중, 성당에서 들려오는 오르간 소리에 발을 멈춥니다. 소리에 이끌려 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 있던 이들은 비공개 미사라며 들어오지 못하게 막습니다. 오르간이 설치된 상단에 위치한 연주자는 아래쪽에서 일어난 소란에 잠시 연주를 멈췄다가 다시 연주를 시작하려 하는데, 갑자기 악기는 아무런 소리 내 않습니다. 그러다 멜로디가 성당에서 점점 멀어지더니, 방금 그곳에서 쫓겨난 이들을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음악이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지 않는 음악과 시선을 맞추고 있다고 믿게 됩니다.


이러한 기적이 주는 풍족함과는 대조적으로, 영화의 결말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탄 크레디가 가진 재산을 빼앗은 건 ‘은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라짜로는 과거 하사 받은 새총을 뒷주머니에 넣은 채, 은행의 창구에 가서 당당하게 돈을 돌려줄 것을 요구합니다. 은행에 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겁을 먹었지만, 나중에는 그의 주머니에 든 것이 새총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그를 마구 폭행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겁을 먹고 몸을 낮춰 그를 올려다보지만, 그가 위협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는 발밑에 깔아뭉개 버립니다. 허구와 연극의 세계는 그렇게 죽음을 맞는 걸까요.


처음 <행복한 라짜로>를 함께 보고 싶었던 이유는 ‘부활’과 ‘기적’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나보낸 이들은 한 번쯤 기적과 부활이라는 단어에 기대게 됩니다. 혹은 윤회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라짜로는 ‘예수님이 사랑해 부활시킨 자’로 기록되어 있으니, 그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부활이나 기적을 붙드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영화를 다시 보면서 저는 부활이나 기적이 아니라, 무언가를 올려다보는 소박한 동작 하나를 마음에 새겨두자고 다짐했습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 마주 보는 그리운 얼굴을 발견하고, 기적 같은 멜로디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올려다보는 동작은 한편으로 영화관을 떠올리게 합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 관객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화면을 비스듬히 올려다보는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물론 좌석의 위치에 따라 더하고 덜한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요. 혼자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으로 감상할 때와의 결정적인 차이도 이 거리감에 따른 고개의 방향이 아닐까 합니다. 영화는 또한 태양보다는 달에 가깝습니다. 극장의 어둠 속에서 영화는 달처럼 밝게 빛납니다. 바라보도록 추동할 뿐, 눈이 부셔서 볼 수 없을 정도로 밝진 않습니다. 우리는 가끔 달을 보면서 소원을 빕니다. 영화를 보면서도 때로는 간절한 마음이 됩니다. 어쩌면 영화가 달과 비슷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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