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바쟁은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에서 시체 방부의 관습에서 엿보이는 욕망과 예술의 관계를 서술한다. 고대에는 “인간의 육신 외관을 인위적으로 보존하는 것”이 “지속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그것을 떼어내는 것, 곧 그것을 생명권 내에 안치시키는 일”로 여겼다면, 문명과 예술의 진화에 따라 초상화가 실제의 외관을 대체했다. 회상을 통해 정신적인 죽음으로부터 대상을 구하도록 돕는, 초상화의 보존적 역할을 인정한 것이다. 이후 사진은 “인간을 배제한 기계적인 재현”을 통해 “불가피한 주관성”의 왜곡 가능성에서 대상을 구했고, 영화는 특정 시간을 방부처리 하는 데서 벗어나 시간 속에서 ‘지속성의 상’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영화의 기원에 죽음(시간)에의 저항과 보존의 욕망이 있음을 강조한다.
바쟁의 논의에 따르면, 예술의 발전으로 인해 보존의 초점은 죽음에서 삶으로 이동했다. 육신의 보존이 죽음 이후 처리에 관한 문제라면, 사진과 영상은 살아 있는 상태와 관련된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한 경험이 내게 남긴 건, 할 수만 있다면 육신의 외관을 보존하고 싶다는 기원적 욕망으로의 회귀였다.
영화나 영상물을 통해 접한 서양의 장례 문화와 한국 장례 문화의 결정적인 차이는 관 속에 누운 이의 얼굴을 볼 수 있는지 여부다. 공개된 얼굴은 사진을 찍거나 영상으로 기록될 수 있지만, 한국의 장례 문화에서 관 속에 누운 시신의 얼굴이 공개되는 일은 없다. 죽은 이를 보는 것은 엄격하게 금기시되며 가족과 친지들에게만 제한된 형태로 허용된다. 그 시간은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위해 쓰일 뿐, 그 시간이 기록되는 법은 없다.
내게도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임종을 기다리며 작별할 시간 말이다.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사람들이 부럽다. 내가 아버지께로 향하는 동안, 아니 그 전에 이미 많은 일들이 끝나 있었다. 끝까지 아빠를 살릴 수 있다고 믿었던 엄마는 구급대원에게 주치의 선생님이 있는, 멀리 떨어진 병원으로 가자고 말했다. 구급대원들은 안된다며 가까운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깨어날 거라고 믿었던 엄마는 우리에게 알리는 것을 미뤘다. 아빠가 깨어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겨우 납득하신 다음에야 엄마는 우리에게 연락하셨다.
아버지께로 향하는 동안 나는 내가 없던 시간의 공백을 무수한 가정법으로 메우고 있었다. 만약 내가 곁에 있었다면. 심폐소생술을 좀 더 일찍 했다면, 심폐소생술을 좀 더 했다면, 병원에 입원하셨다면 좀 더 사실 수 있었을까. 아빠가 추운 겨울날 운동을 하시기보다는 쉬셨다면 나았을까. 산소발생기 사용을 조금 더 일찍 했다면, 혹은 더 늦게 했다면 어땠을까.
내가 무수한 가정법으로 의심한 시간은 누군가의 충실한 노력으로 채워졌다. 구급대가 도착할 동안 심폐소생술을 도와주신 이웃분들은 아버지의 갈비뼈에 금이 갈 때까지 살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하셨다. 그러나 쓰러지신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눈을 뜨시거나 생존 반응을 나타내신 적은 없었다고 한다. 병원에서 형부는 포기하는 의사에게 한 번만 더 해달라고 부탁했다. 패닉 상태의 엄마를 가만히 안아 위로해 준 이는 구급대원이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기도만 하는 동안, 누군가는 아빠를 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장례식장에는 아빠와 닮은 얼굴 사진이 놓여 있었다. 마땅한 사진을 찾지 못해 언니의 휴대폰에 있던 사진 중 아빠의 얼굴 부분을 확대해 영정 사진으로 썼다. 대부분의 사진 속에서 아빠는 늘 조연이었다. 가족들이 모여 있을 때도 조금 떨어진 자리에 계시곤 했다. 제대로 된 아빠의 독사진을 찍어드리지 못한 걸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병원 장례식장과 연계된 사진관에서는 별다른 상의도 없이 아버지의 얼굴에서 주름을 지우고 포토샵 처리를 한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 속 아버지는 아버지와 닮았지만, 끝내 아빠가 아닌 것 같았다.
아빠의 진짜 얼굴은 입관식이 되어서야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순간이 마지막이고, 그 이후가 없다고 생각하니 초조했다. 아버지는 노란색 삼베로 짠 수의에 단단히 묶인 채 누워계셨다. 아버지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무척 아름다웠다. 그 얼굴을 사진으로 찍어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휴대폰을 꺼내 들 수는 없었다. 그 자리는 유족들이 슬픔에 잠겨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자리일 뿐, 사진을 찍는 것은 추모하는 태도에 어긋난 불손한 행위처럼 여겨졌다. 나는 차라리 나의 눈이 카메라 렌즈가 되기를 갈망했다. 눈으로 찍고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내 뚫어지도록 아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을 잃는 것이 너무 아까웠다. 아버지는 금방이라도 일어나 말하실 것 같았다. 흔들어 깨우고 싶었지만, 접촉은 허용되지 않았다. 아빠의 얼굴에서 입술 부분이 자꾸만 벌어졌다. 유언을 남기지 못한 아버지가 무언가 말씀을 하시려는 걸까. 귀 기울이면 들릴 것만 같았다.
내가 죽어 잠든 이의 모습을 실제로 마주한 것도, 아버지의 얼굴을 그렇게 오랫동안 바라본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칼 드레이어의 <오데트>(1955)를 다시 꺼내 본 건 아버지의 얼굴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길 기다렸던 순간에 대한 심리적 보상이었다. 내게 영화관은 누군가의 얼굴을 마음껏 응시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그런 의미에서 얼굴의 영화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곧 얼굴이다. 드레이어의 영화 중 얼굴 영화로 주로 언급되는 건 <잔 다르크의 수난>(1928)이지만, <오데트> 역시 중요한 얼굴 영화 중 하나다. <잔 다르크의 수난>에서 장면 대부분을 장악하는 클로즈업된 얼굴과는 달리, <오데트>에서 얼굴과의 접촉은 문 너머로 조심스럽게 차단된 채 이뤄진다. 한 시골 농가의 며느리인 잉거는 출산 도중 아이를 잃고 그 자신도 위험에 빠진다. 영화는 잉거의 모습을 비추기보다 문을 드나들며 동요하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접촉이 차단된 채 지연된 시간은 죽음에 관한 직접적인 발언이기도 하다.
죽은 줄 알았던 잉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일어나길 명한다’는 요하네스의 말에 손을 움직이고 서서히 눈을 뜬다. 잠든 얼굴이 서서히 깨어나면서 죽음은 삶으로 이동한다. 때때로 영화는 이 같은 방식으로 잠든 얼굴을 깨워왔다. <오데트>를 다시 쓴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침묵의 빛>뿐만 아니라,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은 눈 뜬 채 정지한 에르난의 얼굴을 통해 삶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삶으로의 이동을 그렸고, 미겔 고메스는 <그랜드 투어>에서 죽음에서 삶으로 이동이 영화의 작동임을 표시하는데, 이로써도 기적은 손상되지 않는다.
이 영화들과 더불어 나는 아버지의 잠든 얼굴을 여러 번 마음으로 일으켜 세웠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사진 찍는 것은 그것들을 정신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다”라는 카프카의 말은 내게 도리어 희망이다. 그렇다면 내가 끝내 찍지 못한 어떤 것이 나의 정신에서 영원히 추방되지 않고 보존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