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세월이 현제 생활에 에너지가 된다.
이 사진을 보니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나는 25세, 신랑은 27세
철부지 둘이서 만나 아무것도 모른 채 결혼을 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무엇을 해야 되는지 개념 없이 결혼을 하여 아이들 낳고 키웠다.
나의 열등감이 똘똘 뭉쳐져서 큰아이를 키울 때 영재교육에 가입하여 도트 카드를 보여주면서 훈련을 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빨간 점(돗틀)들을 보여주면서 하나하나 훈련을 했다. 언니 오빠들이 나보고 유별나다고 놀리기까지 했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취학 전까지 그렇게 했다. 유독 큰아이한테만 집착을 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리 큰아들한테 집착을 했을까? 하고 의문을 던져본다. 나의 첫 작품 잘 키워야 되겠다는 일념이 가득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제대로 케어 받지 못하고 방치된 채로 혼자 스스로 헤쳐 냈기 때문에 내 아이만큼은 제대로 키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거 같다. 일명 대리만족이랄까?
감정 일기 피드백을 적으면서 난 느꼈다. 나처럼 이렇게 엄마한테 집착하는 것도 바로 이 감정이구나. 집착. 내가 엄마한테 집착을 했고, 아들을 키우면서 아들을 잘 키우려고 집착을 했고, 그러다가 상담 공부에 집착을 했고 이것이 모여서 나의 바로 역사가 되었구나.
아무나 상담 공부를 해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성공했다는 것도 아니다. 딱! 고만큼 성공하고 성장하고 알아차리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배움도 너무 높은 성공에 이른 사람한테 배우는 것하고, 한 뼘 정도 앞서가는 사람한테 배우는 것하고 다르다는 말이다. 나보다 한 뼘 정도 앞서가는 사람한테 배우는 것이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거리이다.
난 딱 한 뼘 정도 앞서가 있기 때문에 감정 일기 피드백을 편하게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 내가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알려진 사람도 아니고, 그저 편하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상대의 성장이 곧 나의 성장이 되도록 해 주는 그런 기술이 있다는 것이다.
이사를 하면서 이런 액자들을 보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 그 시절 사진들을 보면서 추억에 잠겨 본다.
큰아들을 그렇게 잘 키우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키웠지만 결국 평범한 사람이 될 것을 난 영재라도 만들고 싶어서 난리 법석을 떨었던 게 아닌가. 왜 그랬을까? 내가 부족해서,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어서, 아들 덕분에 내가 인정받고 싶어서였을까? 그렇다. 세 가지다 포함된다.
내가 상담 일을 하게 된 것도 아마 이러한 밑거름, 안간힘을 썼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심리는 다 비슷비슷하다. 그런 원리를 알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이 땅에 이바지하고 있는 셈이다. 한 뼘이라도 도움 되는 피드백을 줄 수 있다는 데서 자부심을 느끼는 요즘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그 행동에 의미가 가득하다. 결혼 초에 신랑과 함께 울산 유원지 ‘석남사’ 나들이를 갔다. 그런데 이 남자는 무엇 때문에 한 여자를 만족하지 못하고 두리번두리번해야만 할까? 그것이 나를 자극한다. 나의 존재감이 상실되는 거 같았다. 살맛이 안 났다. 삐졌다. 왜 다른 여자를 쳐다보느냐? 난 못 살겠다. 하면서 닦달했다.
그랬더니 신랑은 아무 느낌이 없었다. 벌이 꽃을 보는 게 당연하다고 한다. 이 남자를 데리고 36년을 살아왔다. 그런 시간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 그렇게 미움이 올라왔던 것도, 상처도, 흉터도 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매달리고 살아야만 할까?
나 또한 어딘가에 매달렸기 때문에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성공에 매달리고, 어떤 사람들은 강박에 매달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관계에 매달린다. 나는 집착에 매달리다 결국 그 집착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집착이라는 것은 나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함이었다. 부모님이 나한테 다 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한테 집착하고 자식한테 집착했던 것이다. 감정 일기 회원 중에서도 부모님께 사랑받으려고 집착했던 회원이 있었다. 난 이심전심 너무 잘 느껴졌다. 그 느낌 그대로 피드백을 주었다. 그래서 이 땅에 이바지하고 있는 셈이다. 나의 말 한마디에 한 사람 한 사람 깨우쳐 간다면 그것이 나에게 큰 보람이다.
사람은 주는 것만도 아니고
받는 것만도 아니다.
주거니 받거니가 삶이다.
나는 주고
필요한 사람은 받는다.
나는 원하는 것을 받고
나에게 준 사람은
또 다른 이에게 받는다.
이것이 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