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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May 31. 2021

설탕을 넣지 않은 에스프레소 한 잔

단상 (10)

 



 파리에서는 에스프레소를 참 많이 마셨다. 집에 네스프레소 머신이 있어서 거의 매일 아침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시고 하루를 시작했다. 물론 커피의 질보다는 양에 집착하는 데다가 얼죽아인 지라, 계절을 따지지 않고 아주 조금이라도 더운 날엔 에스프레소 대신 별다방에 찾아가 아아를 흡입했지만 한국에 있을 때와 비교하자면 압도적으로 많은 횟수로 파리에선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압도적'이라고 과장을 덧붙인 이유는 한국에선 에스프레소를 먹은 적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무리 기억을 샅샅이 뒤져봐도 한국 카페 어딘가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단골 책방 사장님이랑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 커피 이야기가 나와서 이 이야기를 했다. 사장님 역시 유럽에서는, 특히 파리에선 에스프레소를 참 많이 마셨다고. 우린 '프랑스 뽕'에 홀려 그런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파리에서 마셨던 에스프레소를 떠올려보면 이걸 돈 주고 왜 마시냐는 생각이 날, 인상을 찌푸리게 할 만한 쓰디쓴 맛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한국 카페에서는 왠지 모르게 에스프레소는 그런 맛이 날 것만 같고, 누구 코에 붙이냐고 불평할 적은 양 때문에 가성비, 가심비 둘 모두 만족스럽지 않다. 거기에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만큼 커피의 질을 따지고 들면 가성비는 악순환 속으로 빠져든다. 파리 카페에선 에스프레소 한 잔에 1유로~1.5 유로(1,500원~2,000원)인데, 우리나라에선 못해도 최소 3,000원, 프리미엄이 붙으면 4,000원까지도 가격이 올라가니까. 


 같은 값에 넉넉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전면 배치되어 있기도 해서 한국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실 일이 있을까 했는데,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다고 그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신유진 작가가 파리의 카페와 그곳에서의 삶에 관해 기록한 에세이 '몽 카페(Mon café)'를 읽던 중 '파리 카페 뽕'이 불현듯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굳이 코로나 시국 어쩌고저쩌고, 운운하지 않아도 '파리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 따위의 콘셉트로 프랑스까지 날아갈 건 아니니까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한 달 살기라면 모를까) 동네에 에스프레소를 잘한다는 카페를 찾아 에스프레소를 마시러 들렀다. 




 카운터로 가자마자 메뉴판도 보지 않고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쭈뼛대면 괜히 에스프레소를 처음 마셔보려는 사람처럼 보일 거 같아서. (별걸 다 신경 쓴다) 과연 커피 맛의 평판이 꽤 좋은 곳이라 그런지 카페 사장님은 에스프레소 한 잔임에도 정성을 들여 커피를 내렸다. 그리고 "혹시 설탕 필요하세요?"라고 내게 물었다.


 파리에서 터득한 내 나름의 '에스프레소 맛있게 마시는 방법'이 있다면 바로 설탕을 넣는 것. 바로 얼마 전에 쓴 에세이에 단맛이 조금이라도 나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던 건 잠시 잊어주시길. 단맛을 내기 위해서라기보단 쓰디쓴 에스프레소의 끝을 개운하게 마무리하기 위함이니까.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면 보통 각설탕을 잔 받침에 같이 얹어 주는데 그걸 하나 쏘-옥 커피에 넣어서 살살 저어준다. 여기서 중요한 건 '살살' 젓는 것. 어디까지나 설탕을 다 녹여서 에스프레소를 설탕물로 만들자는 게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뭉쳐진 각설탕이 스르륵 풀어져 커피 아래로 가라앉기를 잠시 기다린 후 에스프레소를 천천히 음미한다. 마지막 한 모금이 잔에 남을 즈음에 입에는 에스프레소의 맛이 알싸하게 남아 있다. 가라앉은 설탕이 사르르 녹아 있는 마지막 한 모금. 입속에 쓴맛을 남긴 채 카페를 나서면 괜히 기분도 씁쓸할 테니 과하지 않은 단맛으로 입을 가시는 루틴이다. 


 그때 그 맛이 선명히 떠오르니 설탕을 넣을 법도 한데 필요하면 달라고 하겠다며 일단 거절했다. 한국 카페에선 처음으로 '영접'하는 에스프레소여서 설탕을 넣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쓴맛이 파닥파닥 생동하는 에스프레소를 느끼고 싶었던 걸까. 받아든 커피가 일반 에스프레소보다도 양이 약간 적은 리스트레토(Ristretto)였다는 점도 과감히 설탕을 넣지 않을 용기에 힘을 실어 주었다. 스읍- 한 모금 마시니 진한 에스프레소의 풍미가 입과 코로 퍼진다. (책 표지처럼 새끼손가락은 들지 않았다) 읽던 페이지를 펴서 다시 카페 이야기를 읽기 시작한다. 중간중간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씩 마시면서. 이미 커피 자체에 쓴맛에  적응할 대로 적응한지라 리스트레토의 진한 맛도 그리 과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책과 장소 때문인지 에스프레소엔 절묘함이 베어들어 쓴맛 뒤에 달달한 여운이 남았다. '카페'에서 '몽 카페'(나의 카페)를 읽으며 마시는 '카페'니까. 

(* 불어 단어 카페(Café)는 장소의 의미와 커피의 의미를 둘 다 가지고 있다)  


 어느 날 또 에스프레소가 마시고 싶어지는 날이 오면, 설탕은 그때 넣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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