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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Jun 18. 2021

등잔 밑이 어두운 립밤

단상 (13)


 립밤을 바른다. 바르긴 바르는데, 립밤을 휴대하고 다니면서 습관처럼 바르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에 가깝다. 어쩌다 주머니나 가방에 넣어 둔 채 잊고 있던 립밤을 발견하면 별 생각 없이 쓱 한 번 발라보는 편이랄까. 다행히 입술이 잘 건조해지지 않아서 립밤을 집에 두고 나와도 일상생활에 크게 지장을 받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립밤을 왜 샀냐고 물으신다면, 어쩌다 입술이 메말랐을 때 마침 올리브X 같은 곳을 지나쳐서 하나 사 두었을 뿐이다. 


 어차피 잘 쓰지 않는 물품이라지만 이왕 사는 거 1+1 행사 상품을 골라 덤으로 립밤 하나를 더 챙겼다. 가뭄에 콩 나듯 립밤을 바르니 먼저 쓰기 시작한 립밤도 어느 세월에 다 쓸지 모르겠지만, 덤으로 하나 더 챙겨준다는 데 마다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사 둔 게 어언 1년 전 일이다. 1년이 지났음에도 립밤 하나를 다 쓰긴커녕 여전히 몇 개월간 매일 발라도 다 쓰지 못할 만큼의 양이 남아 있다. 


 근데 참 희한한 게 막상 잘 쓰지도 않는 물건이 마침 필요할 때가 되면 도무지 어디에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겨울도 아니고 건조주의보가 속 봄철도 아닌, 후덥지근한 이 여름철에 때아니게 입술이 부르텄다. 괜히 입고 있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뒤적거려 봤지만 립밤이 있을 리 만무하다. 분명 저번에 나갈 때 가방에 넣고 나갔던 거 같은데... 집에 와서 방에 마음대로 굴러 다니는 가방 주머니를 샅샅히 뒤져 봐도 립밤은 나오지 않는다. 책상 위, 스킨 로션 같은 걸 담아 놓는 작은 상자 속에도 없다. 립밤이 들어가 있을 리 없는 서랍까지 포함해서 서랍을 하나하나 열어 봐도 립밤은 보이지 않는다. 대충 입술에 침을 발라 두긴 했지만 촉촉함은 오래 가지 못한다. 촉촉함이 썩 유쾌한 감촉이 아니기도 하고. 


 짜증이 좀 나긴 했지만, 평소에 자주 쓰는 물건도 아니니 잊어버리기로 하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에 반응한 파블로프의 개처럼 입술이 튼 상태라는 건 까맣게 잊고 크게 뜬 첫술에 맞게 입도 크게 벌린다. 



 기어이 아랫입술 한 가운데가 수직으로 갈라지며 터지고야 말았다. 터진 자리에서 피가 스멀스멀 나온다. 밥맛을 느끼기도 전에 피의 비릿한 맛을 다셔야 했다. (그렇다고 입맛이 싹 달아나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는 건 아니다) 아주 살짝이지만 입술이 한 번 터지고 나니 입을 사용하는 모든 순간이 평소보다 더 신경이 쓰였다. 미봉책임을 알면서도 터진 입술이 더 벌어지면 안 될 것 같아 침을 자꾸 바르며 불쾌한 피의 비릿함을 느낄수록, 물을 마시거나 양치를 할 때 물이 상처에 닿아 따끔거리는 일이 반복될수록 어디에 숨었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는 하나도 아닌 립밤 두 녀석에게 묘한 분노가 일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입술은 제 모습을 되찾았다. 경박하게 벌어졌던 상처도 아물었고 입술도 더 이상 건조하지 않았다. 그 사이 날은 또 날대로 참 많이 더워졌다. 서랍 속에 얌전히 잠들어 있던 반바지 하나를 골라 꺼내 입고 나왔는데 주머니에 묘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혹시나 꼬깃꼬깃 접어 둔 지폐인가...는 개뿔, 찾을 땐 도통 나오지 않던 립밤이었다. 반갑기는커녕 헛웃음만 나올 뿐. 날이 건조하기라도 했다면 발라보기라도 할 텐데, 습하긴 또 왜 이리 습한지 립밤을 입에 치덕치덕 바르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게 반바지에 들어있었다는 건 작년 여름에나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는 건데... 1년을 묵혀 이제야 내 손안에 돌아온 립밤... 1년이란 세월을 같은 방에서 보냈음에도 곁에 두지 못한 등잔 밑이 어두운 나의 립밤 이야기였다.


 하나는 이렇게 찾았다 치는데, 그럼 남은 하나의 립밤의 행방은 어디에...


등잔 밑이 어두운 립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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