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13)
립밤을 바른다. 바르긴 바르는데, 립밤을 휴대하고 다니면서 습관처럼 바르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에 가깝다. 어쩌다 주머니나 가방에 넣어 둔 채 잊고 있던 립밤을 발견하면 별 생각 없이 쓱 한 번 발라보는 편이랄까. 다행히 입술이 잘 건조해지지 않아서 립밤을 집에 두고 나와도 일상생활에 크게 지장을 받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립밤을 왜 샀냐고 물으신다면, 어쩌다 입술이 메말랐을 때 마침 올리브X 같은 곳을 지나쳐서 하나 사 두었을 뿐이다.
어차피 잘 쓰지 않는 물품이라지만 이왕 사는 거 1+1 행사 상품을 골라 덤으로 립밤 하나를 더 챙겼다. 가뭄에 콩 나듯 립밤을 바르니 먼저 쓰기 시작한 립밤도 어느 세월에 다 쓸지 모르겠지만, 덤으로 하나 더 챙겨준다는 데 마다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사 둔 게 어언 1년 전 일이다. 1년이 지났음에도 립밤 하나를 다 쓰긴커녕 여전히 몇 개월간 매일 발라도 다 쓰지 못할 만큼의 양이 남아 있다.
근데 참 희한한 게 막상 잘 쓰지도 않는 물건이 마침 필요할 때가 되면 도무지 어디에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겨울도 아니고 건조주의보가 속 봄철도 아닌, 후덥지근한 이 여름철에 때아니게 입술이 부르텄다. 괜히 입고 있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뒤적거려 봤지만 립밤이 있을 리 만무하다. 분명 저번에 나갈 때 가방에 넣고 나갔던 거 같은데... 집에 와서 방에 마음대로 굴러 다니는 가방 주머니를 샅샅히 뒤져 봐도 립밤은 나오지 않는다. 책상 위, 스킨 로션 같은 걸 담아 놓는 작은 상자 속에도 없다. 립밤이 들어가 있을 리 없는 서랍까지 포함해서 서랍을 하나하나 열어 봐도 립밤은 보이지 않는다. 대충 입술에 침을 발라 두긴 했지만 촉촉함은 오래 가지 못한다. 촉촉함이 썩 유쾌한 감촉이 아니기도 하고.
짜증이 좀 나긴 했지만, 평소에 자주 쓰는 물건도 아니니 잊어버리기로 하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에 반응한 파블로프의 개처럼 입술이 튼 상태라는 건 까맣게 잊고 크게 뜬 첫술에 맞게 입도 크게 벌린다.
쩍
기어이 아랫입술 한 가운데가 수직으로 갈라지며 터지고야 말았다. 터진 자리에서 피가 스멀스멀 나온다. 밥맛을 느끼기도 전에 피의 비릿한 맛을 다셔야 했다. (그렇다고 입맛이 싹 달아나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는 건 아니다) 아주 살짝이지만 입술이 한 번 터지고 나니 입을 사용하는 모든 순간이 평소보다 더 신경이 쓰였다. 미봉책임을 알면서도 터진 입술이 더 벌어지면 안 될 것 같아 침을 자꾸 바르며 불쾌한 피의 비릿함을 느낄수록, 물을 마시거나 양치를 할 때 물이 상처에 닿아 따끔거리는 일이 반복될수록 어디에 숨었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는 하나도 아닌 립밤 두 녀석에게 묘한 분노가 일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입술은 제 모습을 되찾았다. 경박하게 벌어졌던 상처도 아물었고 입술도 더 이상 건조하지 않았다. 그 사이 날은 또 날대로 참 많이 더워졌다. 서랍 속에 얌전히 잠들어 있던 반바지 하나를 골라 꺼내 입고 나왔는데 주머니에 묘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혹시나 꼬깃꼬깃 접어 둔 지폐인가...는 개뿔, 찾을 땐 도통 나오지 않던 립밤이었다. 반갑기는커녕 헛웃음만 나올 뿐. 날이 건조하기라도 했다면 발라보기라도 할 텐데, 습하긴 또 왜 이리 습한지 립밤을 입에 치덕치덕 바르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게 반바지에 들어있었다는 건 작년 여름에나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는 건데... 1년을 묵혀 이제야 내 손안에 돌아온 립밤... 1년이란 세월을 같은 방에서 보냈음에도 곁에 두지 못한 등잔 밑이 어두운 나의 립밤 이야기였다.
하나는 이렇게 찾았다 치는데, 그럼 남은 하나의 립밤의 행방은 어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