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ernweh Jun 28. 2021

아메 오토코

단상 (14)


 어딜 가나 비를 몰고 다니는 남자에게 일본어로 붙는 별명, '아메 오토코'(雨男). 살다 살다 비 오는 타이밍이 이렇게나 잘 맞을 수 있나... 싶어서 스스로를 아메 오토코라고 칭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애써 기후 변화라는 거국적인 용어를 갖다 붙이면서, 그 탓에 우리나라 날씨도 오락가락해진 게 오늘 이 사달이 난 이유라고 위로하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다. 기후 변화 영향이 체감할 만큼 성큼 다가왔다고 느끼는 건, 어렸을 땐 안 그랬는데 언제부턴가 비가 한 번 오면 동남아 우기 때의 스콜처럼 언제 얼마만큼 쏟아졌다 언제 그칠지 도통 알 수 없는 패턴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분명 오늘 수도권에는 나 말고도 '아메 오토코'와 '아메 온나(같은 뜻으로 여성에게 붙이는 별명)'가 엄청 많았을 테고. 


 사실 날씨 운이 아주 나쁜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날씨 요정'은 못 됐지만, 아주 중요한 순간에 날씨가 엉망이어서 일을 그르친 적을 곰곰이 떠올려 봐도 잘 생각이 안 나는 걸 보면 감히 악천후를 몰고 다닌다고 할 순 없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여행 때 대성당에서 열릴 일루미네이션 축제가 갑작스러운 비로 취소되어 아쉬워했던 경우가 떠오르긴 했다. 근데 같은 이유로 취소될 뻔했던 마카오 빛 축제가 비를 뚫고 열리면서 오히려 우중 축제라는 색다른 감상을 자아냈으니, 겉으로 보기엔 날씨 운이 따라주지 않은 날의 속엔 기가 막힌 날씨 운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아메 오토코'와는 거리가 멀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꼭 비가 아니더라도 그보다 더한 자연재해를 비껴간 적이 꽤 많아서 내 기운에 불운이 그득그득 자리한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예를 들자면, 구마모토 여행을 다녀오고 3일 뒤 도시에 큰 지진이 났다거나 하는 경우가 은근히 많았다) 자연재해를 고작 오늘 갑자기 내린 폭우에 비할 수는 없겠다만, 그때 슬며시 피해갔던 불운이 보이지 않게 똬리를 틀고 있다가 오늘 갑자기 내 위로 덮치고야 말았다.


  3시 정도까지 내가 있던 서울에는 비가 안 왔다. 날씨가 후덥지근하고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긴 했지만. 집으로 가는 광역버스를 타기 위해 시내버스를 탄 순간부터 버스 창문에 비가 한두 방울 스쳐 지나더니 5분도 채 안 돼서 폭우로 돌변했다. 광역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다행히 비를 피할 수는 있었지만 얼마나 비가 세차게 내리던지 사방에서 흩뿌리는 빗방울에 옷이 조금씩 조금씩 젖어갈 정도였다. 애초에 집에서 나올 때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우산을 챙겨 나왔어야 했건만, 정작 필요할 땐 안 보더니 버스 정류장에서 고양시에 비가 오는지를, 그제야 확인했다. 다행히 구름 모양만 보였고 비 예보는 없어 안심했다. 


 이윽고 도착한 버스에 오르는 찰나에도 꽤 많은 빗방울을 맞을 만큼 억수 같은 비였다. 일단 버스에 올랐고, 예보 상으론 동네에 비 예보가 없으니 안심하고 잠깐 눈을 붙였다. 곤히 잠이 든 내 귀에 북 치는 소리가 불규칙한 리듬으로 울렸다. 잠을 깨운 그 소리는 육안으로 보기에도 굉장히 굵은 빗방울이 버스 천정을 때려 둥- 둥- 울리는 경쾌한, 아니 불쾌한 소리였다. 버스는 서울을 벗어나 이미 고양시에 들어왔는데, 아까 전에 확인한 고양시 일기예보와는 전혀 상반된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비가 그치리라는 일말의 희망조차 품기 힘들 만큼 고약하게도 내리는 비였다. 


 점점 내려야 할 정류장이 다가왔다. 정류장에서 집까지는 5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평소에는 가깝게만 느껴지던, '까짓것' 5분짜리의 거리였는데...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물세례를 지켜보고 있자니 가깝기는커녕 끝을 모르고 헤쳐나가야 할 망망대해 한가운데 똑 떨어져 있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가야 할지 다섯 정거장 전부터 머리를 굴렸다. 한 정거장 전에 내리자는 결론이 났다. 그 정거장 바로 뒤에는 카페가 한 군데 있다는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온종일 빨빨대고 돌아다니느라 커피 한 잔 제대로 마실 시간이 없었다며 이참에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카페에 있는 동안 어느샌가 비가 그쳤다. 슬슬 가볼까 하다가 결말까지 몇 페이지 남지 않은 읽던 책을 마저 읽고 가기로 했다. (이쯤 되면 왜 오늘 내가 나를 '아메 오토코'라 칭했는지 눈치채셨을 수도...) 책을 다 읽고 나오니 또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진다. 걸음을 재촉하는 만큼 빗방울도 점점 거세진다. 비를 피한답시고 한 정거장 전에 내렸으니 갈 길은 원래 내렸어야 할 정류장에서보다 더 길어진 상태라서 이 비가 아까처럼 거세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걱정했던 대로 빗방울은 기하급수적으로 굵어졌다. 한 방울과 한 방울이 합쳐져 두 방울 크기가 된 후, 또 한 방울이 합쳐져 세 방울 크기가 되는 게 아니라 두 방울이 곱이 되어 네 방울이 된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 가다간 물에 빠진 생쥐가 될 것만 같아 정류장과 집 사이, 가운데 즈음에 있는 헬스장으로 피신했다. 예정에도 없는 운동을 이렇게 하게 만들었으니... 365일 아가리 다이어터인 내가 비한테 고마워해야 할 지경인가...


 서울에 있을 땐 서울에 비가 오고, 일산으로 넘어오니 일산에 비가 오고, 카페에 들어가니 비가 멎었다가 카페에서 나오니 비가 내린 날. 헬스장에서 나왔을 때도 멎었던 비가 또 내렸으면 진정한 아메 오토코였겠지만, 이 정도도 가히 아메 오토코라 칭할 만큼은 되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등잔 밑이 어두운 립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