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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Jul 12. 2021

서핑과 스테이플러의 상관관계

여행에세이, 강원도, 양양

    


 전날 예보대로 저녁이 가까워질수록 날씨는 거칠어졌다. 바다에서의 거친 날씨에는 높아지는 파고도 포함이 된다. 넘실거리는 파도의 규모는 조금씩 거세졌다지만 해봐야 발이 닿는 수심에서 보드를 붙잡고 어기적거리는 초심자가 실감할 만큼의 위력은 아니었다. '나 서핑 좀 한다'는 서퍼들이 점점 더 바다로 높아진 파도를 타기 위해 모여드는 걸 보면서, 발이 닿는 수심에서도 크게 도약을 해야만 물 속에 가라앉지 않을 파도를 때때로 넘겨대면서 그나마 파도가 세졌다는 걸 느낄 뿐이었다. 머리 위로는 이미 꽤 굵어진 빗방울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고.


 강습 후 자유 서핑은 여섯 시까지였지만 더 이상의 체력도 남아 있지 않은 우린 5시 40분 즈음 슬슬 바다에서 나가자는 무언의 신호를 눈빛으로 주고 받았다. 보드를 오른쪽 골반 께에 걸치고 바닷물을 머금어 무거운, 체력이 고갈되어 체감상 더 무거운, 시작부터 온 몸을 조여 온 수트 때문에 더더 무거운 몸을 질질 끌며 바다를 나오고 있었다. 백사장에 거의 다 왔을 무렵, 그러니까 바다에 잠긴 몸은 발목 언저리 밖에 되지 않은 그 시점에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처음 접한 서핑에서 벌써 '애증'이란 단어를 붙이게 될 줄, 이 때는 알았을까.



 바다에 다 나왔다고 안심한 나를 그날 가장 높이 솟아오른 파도가 덮쳤다. 차라리 그때 바다 안에 있었다면. 단 5분 전까지만 해도 몸을 담그던 위치에 있었다면. 파도가 솟았다고 한들 몸이나 한 차례 붕 뜨고 말았을 텐데... 바다 끝에서 마주한 파도의 위력은 생각보다 거칠었다. 그 위력에 몸이 휘청-, 밀리며 중심을 잃고 주저 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는 모양새로.


 '어푸푸푸!', 얼굴에서 바닷물을 쓸어내며 몸을 세울 때 아래 보인 건 보드였다. 얼핏 스크래치 모양의 무언가가 보였고 순간 피라는 걸 직감했다. 신기한 건 파도가 덮칠 때 보드에 부딪히는 느낌을 전혀 못 받았는데 '엎어져도 코가 깨지는' 이력 때문인지 부상을 당했음을 직감했고 왼쪽 손으로 머리를 훔쳤는데 손에는 시뻘건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파도는 바다 한 가운데가 아닌 바다 끝에서 가장 강력한 위력을 띈다.


여기서 잠시 엎어져도 코가 깨지는 어처구니 없는 에피소드를 간략히 소개하자면,

1) 빨래 줍다가 건물 밖으로 튀어 나온 보일러 연통에 관자놀이가 긁혀 꿰맴. (대학 시절 농활 때의 사건으로 마을회관 옥상에서 빨래를 걷던 도중 하필 빨래가 회관과 옆 건물 사이로 떨어져서 발생한 일)

2) 스쿼트를 하다가 오른쪽 손목 인대를 다침. (이 사건은 브런치 글로 적은 게 있어 아래 링크로 공유)

https://brunch.co.kr/@ksh4545/64


 위의 두 가지 경우가 있겠다. 빨래 걷다 얼굴을 다치고, 하체 운동을 하다 다리, 무릎이라든지 허리도 아닌 손목을 다치는 그야말로 '엎어져도 코가 깨지는' 일 아닌가. 서핑을 잘하는 체대 출신 친구는 "프로 서퍼도 아니고 서핑 처음 배워서 보드에서 서네 마네 하는 애가 다치는 건 또 처음 보네, 어휴"라고 했으니 이게 다 엎어져도 코가 깨지는 팔자 때문이다. 서핑하다가 다쳤으면 그나마 덜 억울할까, 싶을 정도였다.

 

 혹자가 강습을 주관한 센터에서 안전 수칙을 안 지킨 거라 오해할까봐 센터에선 실내, 실외 강습 내내 안전에 최우선 순위를 두었다는 걸 덧붙인다. 입수 후부터는 강습자가 보드에서 중심을 잃고 완전히 바다에 빠질 때 지켜보던 강사는 아주 큰 소리로 "머리! 머리!"라고 외치기도 했다. (이 부분은 실내 강습 때 교육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내 부주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서핑을 다 끝마치고 나오는 길이었으니 나 역시도 억울한 면이 있어 전적으로 운이 안 좋았다고 결론 짓겠다.

 

 피를 보곤 뒤따르던 친구에게 보드를 맡긴 채 부랴부랴 센터로 향했다. 마침 바다 쪽으로 오던, 그날 우릴 강습한 강사가 날 발견하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와 환자 케어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왼쪽 이마 위 헤어라인에 수직으로 2~3cm 정도의 자상이 보였다. 엎어져도 코가 깨지는 1번 경험이 데자뷔처럼 스치며 어쩌면 꿰매야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제목을 버젓이 달아놓았으니 결론부터 말하자면 꿰매는 대신 스테이플러 3방으로 봉합(?)이 되었다. 그런데 꿰맨 건 내가 아니라 내 일행 중 한 명이었다.

 

 이전 포스팅 <서핑과 악천후의 상관관계>에서 여행 시 어느 정도의 악천후는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자는 교훈을 얻었다고 썼지만, 여행 시의 불운은 악천후와 달리 마음을 열었다고 쉬이 받아들일 수도 없거니와 일단 찾아오면 비껴 가기도 어려운 존재란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파도가 덮친 순간 부상당한 건 나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행은 똑같은 이유로 두피 대신 입술에 보드를 스치면서 입술이 찢기고 만 것이었다. 다행히(란 말을 자꾸 붙이려 하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차가 있어서 센터에서 응급처치한 후 응급실로 가 각자 처치를 받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 그리고 그 둘은 지금 다 심도 빼고 실밥도 풀고 본래의 상태로 돌아왔다고 한다. (휴)

응급실에 다녀온 후...

소동은 그날 밤 코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려대던 비바람처럼 짧고 굵게 스쳐 갔다. 서핑 후 미리 짜 둔 계획도 없고 밖을 더 돌아다닐 수도 없는 날씨라서 그날 밤은 숙소에서 조촐하게 우리만의 만찬을 즐기며 보냈다. 전날 세차게 내리던 비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 다음 날 아침. 베란다 너머로 바라 본 양양 바다는 고요했다. 구름이 잔뜩 껴 있긴 했지만 고요함이 감돌았다. 체크아웃 시간까지 여유를 부리고 숙소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고 서핑 센터에 잠시 들렀다가 '양양'하면 떠오르는 '서피 비치'에 잠시 들렀다. (서핑 센터를 또 간 건, 부상과는 별개로 일행의 옷이 분실됐었는데, 옷을 발견했다는 연락이 와서 옷을 찾으러 간 것. 쓰다 보니 느낀 건데 참 별일이 다 있었다...)


 바닷바람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걸까. 아침의 고요가 한 톨 만큼도 남아있지 않은 서피 비치는 숱한 인증샷에서 보던 감성 넘치는 장소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고약한 날씨 속에서 요동치는 해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바닷바람이 너무 센 탓에 한기까지 느낀 우린 구경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다 나왔다.

아침에 저 멀리 보이는 바다에선 이상하게 고요함이 느껴졌다.
photo by @yooym2000
숙소 포토존에서 사진도 몇 장 찍고,
전날 서핑을 한 죽도 해변도 잠시 들렀다가,
핫하다는 서피 비치도 들렀는데... 날씨 때문인지 핫은 개뿔, 쿨을 넘어서 콜드하기까지 한 서피 비치였다.


 우리의 점심 메뉴는 몸소 받아낸 바닷바람의 한기를 떨치기 위해 '국밥'으로 정해졌고, 소머리국밥이 유명하대서 찾아간 강릉의 광덕식당에서 소머리국밥 대신 시그니처 메뉴라는 '소순이'(소고기+순두부 국밥)를 선택했고 그 선택은 첫술을 뜸과 동시에 옳았다고 판가름 났다. 한기와 피로, 하루 전 불운이 남긴 약간의 스트레스, 부상자 제외 전날 술을 마신 이들의 숙취를 모두 싹 내려버린 국밥, 어쩌면 전날의 불운마저 씻어 보내는 듯한 실로 엄청난 국밥이었다.


 불운이 국밥에 씻겨 내려간 건지, 내 두피의 스테이플러와 일행 입술 위의 실밥으로 봉인된 건지, 서울로 오는 길은 행운의 연속이었다. 강릉에 온 김에 맛난 커피를 마시자며 찾은 보헤미안 박이추 커피 공장의 커피는 더 할 나위 없이 향긋했고(몇몇 일행은 원두까지 사 갈 만큼), 커피 마시며 수다 떨다 보니 고속도로가 뚫려 예상보다 일찍 수도권에 진입한 덕에 덕에 일행이 자주 간다던 남양주의 한 오리로스 맛집 '맨윗집'에 들러 화룡점정을 찍었으니까.


광덕식당의 소순이
보헤미안 박이추 커피 공장
맨윗집의 오리로스 photo by @world-traveler


 * 거리두기 방역 단계 강화 전 다녀왔습니다.



+) 양양 여행기를 쓰며 알게 된 소름돋는 사실 하나. 파도에 덮쳐진 순간 봤다는, 보드 위에 묻어 있던 빨간 스크래치는 바다에 들어가기 전부터 보드에 묻어 있던 흔적이었다. 그땐 그 스크래치가 피인줄 알고 피가 난다는 걸, 어딘가 상처가 났다는 걸 직감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그러고 보니 내가 받은 수트가 서핑을 해 본 일행들도 처음 보는 형태로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몰라 직원이 환복을 도와주러 올 때까지 홀로 탈의실에 덩그러니 남겨지기도 했는데... 이 모든 사소한 조짐이 불운을 알려주는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여름이라서 공포스럽게 마무리지어 보고 싶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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