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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Aug 22. 2021

차돌부스러기박이

오늘의 단상(20) 이게 무슨 메뉴다냐...


배가 고팠다. 아니, 허기졌다. 고작 배고프다는 말로 '몹시 굶어 기운이 빠진' 내 상태를 표현할 수 없다. 아침에 빵이라도 한쪽 먹었으면 덜하련만, 왜 빈속에 냅다 커피만 들이 부엇는지... 허기진 탓에 기운은 없는데 혈관을 타고 몸 구석구석으로 퍼진 카페인 때문에 손까지 떨릴 지경이었다. 최대한 빨리 요리해 먹을 수 있는 걸 먹겠다는 각오로 냉장고를 뒤졌다.


'이거다!' 

냉동실을 열자마자 눈앞에 냉동 차돌박이 한 세트가 보였다. 다른 부위였다면 익는 시간이 꽤 걸릴 테니 차라리 라면을 끓이는 게 낫겠지만,  얇디 얇은 차돌박이는 불판에 올려 치이익- 구워내는 찰나만 버티면 당장 입에 넣을 수 있으니 굶주린 내게 마침맞은 메뉴였다. 인덕션 위의 프라이팬이 차돌박이를 온몸으로 구워내기 위해 달아올랐을 때가 돼서야 순서가 잘못 됐음을 깨달았다. 


해동. 집어 든 고기는 그냥 차돌박이가 아닌 '냉동' 차돌박이였으므로 '해동'하는 게 먼저였어야 했다. 불판 위로 왼손을 사악 올려본다. 고기를 굽기에 충분히 뜨거웠다. 그 열감과 뱃속에서 꾸르륵거리는 썩 유쾌하지 않은 느낌에 해동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야 말았다. 차돌박이는 얇다는 구실이었다. 얼어붙은 덩어리를 달궈진 팬에 올리면 전체가 서서히 녹을 테고, 적당히 녹았을 때 맨 위부터 한 장 한 장 떼어 내며 구우면 된다고 착각했다. 글을 읽으며 이렇게 하면 된다고 똑같이 생각하신 분들이라면, 당신은 나와 같은 요리 똥손... 혹은 위 문단까지 읽고 얇은 고기는 냉동 상태 그대로 구워도 된다고 판단하신 분들이라면, 지금 당장 해동부터 하시길...


서서히 녹으며 한 장씩 떼질 듯했던 차돌박이는 여전히 견고하게 붙어 있었다. 살코기 부분은 어떻게든 떼어낼 수 있는데, 비계 부분은 도저히 떼어낼 수 없었다. 그사이 맨 아래 차돌박이 한 장은 타기 시작해 급히 반대쪽으로 뒤집으면서 화력을 줄였다. 줄인 만큼 녹는 속도는 더뎌졌다. 그저 난 고기를 구우려 했을 뿐인데, 외과 의사마냥 왼손엔 집게 오른손엔 가위를 들고 차돌박이를 '집도'해야 했다.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기름 부분은 단호하게 잘라내었다. <나혼자산다>에서 삼겹살을 먹을 때도 체중 관리를 위해 비계를 떼어내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나아먈로 살 빼야 되니까...'라고 읊조렸다. 이 무슨 쓸쓸한 자기합리화인가. 


서걱서걱. 고기를 자를 때 이런 소리가 나다니. 여전히 집게로 떼어내기 힘들 정도로 완강한 가운데 살코기를 어떻게든 구워 본답시고 덩어리째 고기를 잘라 냈다. 집도에 정신이 팔린 사이 뒤집혀지지 않은 고기 몇 점은 또 거뭇거뭇한 탄 흔적을 내보였다. 결과는 처참했고, 인덕션 주변은 더 처참했다. 언 부분이 녹으며 새어 나온 수분이 고기 기름에 섞이며 사방팔방으로 튀었기 때문. 흡사 "감히 이 몸을 그 따위 똥손으로 구운 것이냐!"라고 차돌박이가 패악을 쏟아내는 것 같았다.

 

처참한 사투의 끝. 조각조각난 차돌박이는 아래에 묻어버렸다. 밥 한끼 먹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야들야들하고 긴 자태를 뽐내는 차돌박이로 하얀 쌀밥을 싸서 먹어야지, 차돌박이를 꺼낼 때 상상한 모습이었다. 그러기엔 차돌박이는 조각나 버렸다. 심지어 조각이라고도 하기 힘들 정도로 잘게 잘려 나간 고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내가 요리했던 건 '차돌박이'가 아니라 '차돌부스러기박이'였다.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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