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마저 고상하다는 불어를 만나다(1)
비음. 우리말로 콧소리. 보통 애교부릴 때 섞이는 이 소리가 프랑스어의 특징적인 발음 중 하나다. 비음 발음을 꼭 귀엽게 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말 중간중간 콧소리가 들어가는 부분이 프랑스어가 고상하게 들리는 데 분명 어느 정도 일조할 것이다. 그런데 고상하게 들려야 할 네 개의 비음이 서로 뒤엉키며 프랑스어 걸음마를 뗀 내게 비음이 아닌 비염으로 다가왔다. 코에 피어나는 염증처럼 솟구친 짜증에 ‘쀠텅’인지 ‘쀠탕’인지를 외칠 때면 피똥을 싸는 기분이었다. 이게 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에 생긴 일이다.
친구 따라 강남가라더니 강남은 안 가고 웬 교양 수업으로 초급 프랑스어를 신청했다. 날 프랑스어 수업으로 이끈 동기는 베트남의 한 프랑스 초등학교를 나왔다. 영어를 제외한 제2외국어 수업을 한 개 이상 이수해야 한다는 졸업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 그녀는 별다른 고민 없이 프랑스어 수업을 택했다. 불어 구사자에게 ‘초급’ 프랑스어만큼 학점을 쉽게 딸 수 있는 과목은 없었을 테니까. 그녀의 제안을 덥석 문 당시에 나는 나중에 프랑스어를 배우겠다고 파리로 갈 거란 생각은 추호도 못 한 채, 학점이나 채우자는 기분으로 수업을 들었을 뿐이었다.
대학 출판부에서 발간한 투박하기 그지없는 교재를 가지고 오십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빽빽이 모여 수업을 들었다. 교양 수업에 걸맞게 교수님이 진도를 격하게 빼지도 않았고 언어 교재임에도 그 흔한 발음 연습용 오디오 파일 따위는 제공되지 않았다. 수업 때 교수님이 알려주는 발음을 듣는 게 전부였지만 교양, 그러니까 전공에 준하는 부담을 원치 않는 우리 중 그 누구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초급이었고, 정원도 오십 명이었기에 품을 많이 팔아야 하는 듣기/말하기 시험은 항목에서 일찌감치 제외되었으니 발음에 공을 들일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비음 발음의 첫 단추는 잘못 끼워진 지도 모른 채 내 입에,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가’와 ‘나’처럼 발음이 확연히 차이 나는 기본 자·모음은 처음에 좀 잘못 익혔어도 금방 바로 잡을 수 있다. 그런데 프랑스어 비음은 각각의 발음상의 차이가 현저하지 않다. 네 가지 비음 발음 /ɛ̃/, /œ̃/, /ɔ̃/, /ɑ̃/ 을 표기하면 /앵/, /욍/, /옹/, /앙/이다. 이 소리들을 실제로 발음해보면 갸우뚱할 것이다. 누가 들어도 발음 차이가 확실하기 때문. 이건 어디까지나 모국어가 한국어인 한국인의 시각에서 한글 표기의 구분을 위해 한글 모음을 차용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실제 프랑스어 발음으로 들어보면 ‘옹’을 제외하고는 아주 뚜렷하게 차이 나지 않음을 걸 알 수 있다. 차이도 차이고, 위 한글 표기와 사뭇 다르게 들릴 것이다.
* 혹시나 발음이 들어보고 싶은 분들을 위해: 네이버 프랑스어 사전에서 ‘in’(앵), ‘un’(욍), ‘on’(옹), ‘an’(앙)을 입력 후 듣기를 누르면 발음을 들어볼 수 있다.
교양 수업 ‘필기’시험용 공부에선 발음의 정확한 분별은 쓸데없는 짓이었다. 뜻과 철자만 외우면 됐을 뿐이다. 그러니 교재에 달린 한글 표기에 의존해 실제론 ‘방’에 가까운 와인이란 단어 ‘vin’은 한글 소리에 맞게 ‘뱅’으로, 아무리 들어도 ‘욍’으로 들리지 않는 숫자 일 ‘un’은 ‘욍’으로 외우고야 말았다. 딱 여기서 그쳤다면, 와인이 뱅이든 방이든 숫자 일이 욍이든 엉이든 문제될 일은 전혀 없었으리라.
* 아주 오래된 교재가 아니라면, 시중 프랑스어 교재는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기보다 실제 프랑스어 발음에 가깝게 표기를 하니, 프랑스어를 배우려는 분들은 이 점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
친구 덕에 맞이한 우연한 접점은 이윽고 시발점이 된다. 프랑스어 수업이란 접점이 생애 첫 해외여행을 프랑스 파리로 향하게끔 한 시발점이 되었다. 예술이나 패션, 요리에 관심이 있다거나(실제로 해당 수업엔 미대생이 상당히 많았다) 프랑스 문화에 관심이 있어서 프랑스어를 들은 게 아니었는데도, 일단 프랑스어 알파벳을 뗐다는 맹랑한 자신감이 대학생의 버킷리스트 해외여행 속으로 스며들며 첫 해외여행의 행선지를 정하게 만들었다. 만약 그때 독일어나 태국어를 들었다면 생애 첫 해외 여행지는 베를린 또는 방콕이 됐을 테고, ‘봉주르’가 아닌 ‘구텐탁’, ‘싸와디캅’이 지금 더 입에 익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처음 해외로 떠났다가 좋은 추억을 한 아름 안고 무사히 귀국하는 과정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취감을 느꼈다. 그 성취감의 영역에 어이없게도 프랑스어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실 프랑스에서 한 말이라고는 기본 회화가 전부였다. 게다가 말을 뱉기만 했을 뿐, 돌아오는 대답을 제대로 알아들은 적이 거의 없었는데도, 여행 전반에 걸친 성취감 때문에 프랑스어로 소통했다고 착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다음 학기 수강 신청 화면에는 중급 프랑스어가 띄워져 있었다.
중급이란 말이 가진 중압감은 교양으로 분류된 수업에서도 묵직했다. 아무리 취미 정도로 하는 수업이지만 잘 배양된 초급의 실력이 없이는 따라가기 힘들었다. 어휘나 문법이야 용케 잘 따라갔지만 회화는 쥐약이었다. 인제 와서 새삼스럽게 ‘뱅’과 ‘방’을 구분하지 못함을, ‘욍’과 ‘엉’을 구분하지 못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중급 수업에서 숫자 일이란 단어를 헷갈린다는 건 좀 창피한 일 아닌가. ‘욍’으로 외운 숫자 일에서 자꾸만 ‘엉’ 소리가 나오니 알다가도 모를 프랑스어였다. (심지어 숫자 일인 ‘un’은 부정관사로도 쓰이기 때문에 쓰임새가 훨씬 폭넓다) 프랑스로의 여행은 분명 프랑스어를 계속 공부하도록 한 시발점이었지만, 탄탄한 기본기가 없는 내겐 혼란스러운 비음의 구렁텅이에 빠져 피똥 싸듯 시발(putain)을 외쳐야만 했던 시발점이기도 했다.
방송에서 취미 삼아 시작한 일이 직업이 됐다며 뿌듯한 미소를 짓는 출연자를 볼 때면 간혹 그 미소 이면에 한 번쯤은 거쳤을, 잘못 꿴 첫 단추로 말미암은 시행착오의 흔적이 옅게나마 번지는 게 느껴지곤 한다. 기본에 충실하지 못해 중간에 허덕였던 내 경험 탓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니 첫 단추를 잘 끼우세요, 라고 하기엔 어차피 세상일은 계획한 대로만 착착 진행되지 않는다. 스타트가 좋았다고 중간에 넘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다행히 비음 단추를 제대로 끼워 맞추고 나니 불어 공부에 탄력이 붙었는지 큰 스트레스 없이 꾸준히 공부할 수 있었다.
좋다고 매운 걸 먹고 나선 ‘퓌떵’하고 욕이 나올지언정 한 번쯤은 피똥을 싸야 한다. 잘못된 걸 그대로 끌어안고 있지 말고 욕이 나오더라도 자기 안에서부터 내보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나마 그 소리에 고상한 비음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떠올리면 좀 위안이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