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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Nov 05. 2021

말을 모으는 여행기, 가을

크로아티어아 Plavo, ali hladno


말을 모으는 여행기, 가을 


크로아티아어 Plavo, ali hladno [플라보, 알리 흘라드노]

                                                                                          expr. 파랗지만, 추운


색감만 놓고 보자면 '파랗니까' 추운 기운이 감도는 게 맞다.

그런데 플리트비체를 감싼 애매한 계절감과 당혹스런 추위는

내게 '파랗지만' 추운 색감을 선사했다.



여름과 가을 사이, 그 어디에 있을 때였다.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공원에 간 건. 수직으로 긴 국토의 크로아티아는 아래쪽 두브로브니크에서 시작해 스플리트, 자다르 등의 도시를 차례로 거슬러 오르며 여행했다. 오르고 올라 마지막에 닿은 도시는 수도 자그레브. 시내에 도착한 늦은 오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이었는데도 꽤 더워서 '아직 가을보단 여름에 더 가까운 건가...'하고, 조금 당황했다. 


인간이란 자고로 실수를 반복하는 존재다. 지난달, 하루아침에 기온이 뚝 떨어진 날을 기억하시는지. 세상사에 무관심한 무지렁이인 난, 그날도 세상사 중 하나인 일기예보에 무관심했다. 그래서 (무려) 반팔을 입고 나갔다. 반팔을 입은 내 옆으론 (무려) 패딩으로 갑작스러운 한파를 대비한 몇몇이 스치기도 했다. 바람이 휑한 두 팔을 스칠 때마다 괜스레 몸이 움츠러들던 날이었다. 오들오들 떨며 앞으론 일기예보를 잘 보겠다는 부질없는 다짐을 하는 내 모습 위로 플리트비체 입구에서 똑같이 오들오들 떨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자그레브 근교에 있는 플리트비체는 지대 자체가 도시보다 높고, 산과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당연히 시내보다 기온이 낮을 수밖에. 한여름에도 산이나 숲으로 들어가면 어느 정도 서늘한 기운을 맛볼 수 있으니, 초가을에 들어간 산속은 오죽했을까. 시내에서 느낀 여름과 가을의 접점은 온데간데없었다. 플리트비체는 이미 가을과 겨울에 접점에 있었다. 하루 전, 태평하게 오고 가는 교통편만 알아봤을 뿐, 일기예보 따위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시내랑 비슷하겠거니,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일교차가 좀 있으니 바람막이 한 장 걸치고 가면 되겠거니... 안일한 생각으로 무장했던 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손끝에 닿은 찬 공기에 무장 해제되었다. 황홀하기 그지없는 풍광을 코앞에 두고 입구 매표소에 붙어 있는 카페로 후다닥 들어가 따뜻한 카푸치노부터 마셔야 했다. 참으로 바람직한 여행자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 



3도. 공원 입구를 지나치며 확인한 기온. 근소한 차이로 물은 얼리지 못하지만 반팔티에 얇은 바람막이 한 장이 전부인 날 오그라들게 하기엔 충분한 온도였다. 적어도 세 시간 이상을 이 넓디넓고 '추운' 곳에서 버텨야 하는 현실에 마치 홀딱 벗겨져 망망대해에 떠밀려 있는 기분이었다. 뜬금없이 자연공원 한복판에서 옷가게가 나타날 리 만무하니, 방법은 하나뿐. 몸을 최대한 움직여 데우는 수밖에 없었다.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풍경은 확연히 여름과 가을의 접점이었다. 호수의 영롱한 파랑과 아직 노랗게 빨갛게 물들지 않은 초록이 풍경 전체를 감쌌다. 책 사이에 무심하게 툭 꽂아둔 책갈피처럼, 적당히 물든 가을의 색감은 한 번씩 툭- 파랑과 초록 사이로 끼어들었다. 온몸으로 가을임을 알리려는 그 자태에 자꾸 눈이 갔다. 추위를 잊으려고 질주하듯 공원을 내달리는 내 눈에는 그저 찰나의 자태였지만, '빠르게 지나간다'는 데에서 동질감을 느꼈는지 이상하리만치 가을 느낌을 담아낸 사진을 많이 찍었다. 


여름, 그리고 가을의 접점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던 플리트비체 공원의 풍경


블로그에 플리트비체 여행기를 쓸 때 제목을 'Plava, plava, plava i plitviče'라고 달았다. 어디서 '파란' 이란 형용사를 크로아티어로 주워들었는데, '플'라바, '플'리트비체가 각운이 맞다며 신나서 갖다 붙인 제목이었다. ('파랗고, 파랗고, 파란 그리고 플리트비체'란 뜻인데 말이 되는 문장인지는 모른다...) 플리트비체를 돌아보는 내내 날 압도한 색이 파란색이긴 했다만, 며칠전 때아니게 찾아온 한기에 플리트비체가 불쑥 떠오른 걸 보면 '파랗고 파란' 플리트비체보다는 '파랗지만 추운' 플리트비체로 여행 한 켠에 각인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Plavo ali hladno, 파랗지만 추운, 플리트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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