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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Mar 15. 2022

'사랑'니

단상(35)

사랑니를 한 번이라도 빼 본 사람은 몽글몽글한 사랑의 감정을 품을 때 사랑니가 난다는 낭설 따위는 믿지 않는다. f(x)의 '첫 사랑니'도 아이돌이 불렀으니 왠지 사랑을 상큼하게 노래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런 가사도 담겨 있다.


이거 어쩌나 곱게 자란 아일 기대했겠지
삐딱하게 서서 널 괴롭히겠지 내가 좀 쉽지 않지


내 첫 사랑니가 이랬다. 왼쪽 위 어금니 뒤에 삐딱하게 서서 자꾸만 괴롭히는 통에 치통이 골을 울려 치과를 찾았더랬다. 다행히 최악이란 표현까지 동반하는 위치와 형태는 아니었지만  소리 정도는 날 정도의 고통을 수반한 발치였다. 마취부터가 고역이었다. 주사 바늘이 잇몸을 찌르는 그 생경한 고통이란. 이럴 거면 마취를 위한 마취를 해야 한다고 속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이 생각은 십여 분 후에 바로 바뀌는데, 마취가 잘 안 돼서 다시 한번 마취액을 주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취를 위한 마취를, 또 그 마취를 위한 마취를 하려면 이렇게 몇 번이고 잇몸을 찔러대야 했을 테니까..


(당연히) 마취 후 발치하는 동안 촉각의 고통은 없었다. 그러나 유독 치과에서만 울려 퍼지는 온갖 기계 소리(치익치익, 키잉키잉 등)에 생겨난 청각의 고통 때문에 촉각의 고통이 마취를 뚫고 나오는 것만 같았다. 발치를 마치고 치과를 빠져나오며 청각의 고통해서 해방되기가 무섭게 마취가 풀리며 상상 속 촉각의 고통이 실제가 되었다. 다음날, 고통만큼의 붓기와 출혈이 동반되었다. 왼쪽 볼이 빵빵하게 부은 채, 자는 동안 새어 나온 피 섞인 침이 베개를 흥건히 적신 채 새 아침을 맞이하는 상쾌함이란.


트라우마로 남은 그 상쾌함이 십 년 만에 내 감각을 일깨웠다. 이번엔 오른쪽 위에 난 사랑니였다. 다행히 이 녀석은 위의 가사처럼 삐딱하게 서서 날 기다리지 않았다. 곧게 자랐고 이미 잇몸도 뚫고 나와 혀끝을 가져다 대면 이에 바로 닿을 정도였다. 비스듬히 나왔던 왼쪽 녀석과 달리 통증을 유발하진 않았지만, 지난 건강검진에서 이 녀석은 이미 썩었다고 뽑으라는 비보를 접했다. 이런저런 이유로(무서워서가 아니다, 진짜로...) 미루고 미루다 어제 치과에 들렀다. 어차피 발치야 다른 날 예약을 잡고 할 거라며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가 귓가에 날아든 네 글자에 마음이 금세 무거워졌다. 당.일.발.치.


마음의 준비도, 잇몸의 준비(?)도 안 됐는데 따가운 주삿바늘이 이윽고 잇몸을 파고들었다. '그래, 이 느낌이었어. 몸서리치게 싫었던 느낌...' 이번에도 마취가 잘 안 돼서 또 주삿바늘에 찔려야 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마취는 잘 됐고 바로 발치에 돌입했다. 치익치익-, 끼익끼익-, 따위의 기계 소리에 소름이 돋으려는 찰나, 그 10초도 안 되는 찰나에 의사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끝났습니다. 의자 세워 드릴게요." 


'응? 이렇게 아무 느낌도 안 든다고?' 너무 허무해서 이를 안 뽑고 뽑았다고 속이는 건 아닌지, 플라시보 효과에 관한 임상실험이라도 진행 중인 건 아닌지 의심까지 했다. 게다가 잇몸을 찢지 않았으니 꿰매지도 않았다. 발치 후의 경과도 사뭇 달랐다. 지혈을 위해 2시간 거즈를 물고 있었을 뿐, 거즈를 빼고 나선 뽑기 전의 상태와 다를 게 없었다. 편의점에서 사 온 소고기 야채 죽과 단호박 죽을 그대로 선반 속에 고이 모시고 갈빗살을 꺼내 구워 먹었다. 비스듬히 나는 거랑 곧게 나는 거랑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이야. 잠시나마 옛 생각에 소름 끼쳐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문득 이 사단은 사랑니가 난 모양 때문에 불거진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의 감정이 끓어 넘치던 십 년 전, 말마따나 '사랑'니였던 그 이는 뺄 때도 들끓었던 만큼 훨씬 더 아팠다. 연애세포의 부활마저 꿈꾸기 힘든 상태인 요즘,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란 게 만들어 낸 '사랑'니는 그 감정의 존재감처럼 있었는지도 모른 채 내 몸에서 제거되었다. 휑하게 빈자리에서 사랑니 대신 사랑이 피어 나오진 않을까. 글 서두에서 벌써 사랑니에 얽힌 낭설 따위는 개나 주라고 떵떵댔는데 역시 인간은 이렇게 쉽게 말을 바꾼다. 그런데 사랑에 대한 일말의 희망 위로 f(x)의 앰버가 찬물을 확 끼얹는다. 


힘들게 날 뽑아낸다고 한대도 평생 그 자릴 비워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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