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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Mar 16. 2022

투표가 끝나고 난 뒤

단상(36)

세상은 극단을 통해 가치를 드러내고, 중도를 통해 지속된다.
 세상은 극단론자들을 통해 가치를 드러내고, 온건주의자들을 통해 지속된다.


대선이 벌써 일주일 전이다. 박빙에 '초'라는 접두사까지 붙일 정도로 팽팽한 싸움이었고, 팽팽했던 만큼 그 여파는 거셌다. 투표권을 행사한 이래로 투표의 후폭풍이야 늘 따라붙었지만 유독 이번 대선의 후폭풍이 체감하기에 가장 강했다. 박빙이었다는 사실 이외에, SNS에서 일렁이는 대립의 말들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다. 찬성이 반이었던 당선자 입장에서도 반대가 반만큼 나온 결과였으니 대립의 말이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 크게 일렁일 터. 어쩌면 그간의 정치를 보며 느낀 실망, 이윽고 실망이 곪고 터져버려 생긴 환멸이 트라우마처럼 떠올라 '이 나라는 망했다' 따위의 날카로운 예언이 투표 결과가 나오자마자 솟구쳤던 걸 수도 있고.


진영은 양갈랜데, 혐오와 대립의 촉을 세우는 건 한마음 한뜻, 한 갈래로 모이는 통에 잠시 인스타도 유튜브도 트위터도 보지 않기로 했다. 머릿속에서만 떠올린 건데 추천 동영상 따위에 생각했던 게 나타나는 우연을 간혹 접할 때마다 소름 끼쳐했던 알고리즘은 이번에도 혐오의 골을 더 깊게만 팠기에 그곳에 매몰되지 않으려면 시선과 마음을 환기해야 했다. 그래서 펼쳐 든 책에서 본 문장이 글 서두에 인용한 프랑스 철학자이자 시인인 폴 발레리가 쓴 문장이었다. (알고리즘이란 녀석이 디지털이 아닌 책이라는 물성의 영역에도 작용했나 보다. 저런 문장을 읽게 된 걸 보면. 역시 알고리즘은 무섭다...)


<스우파>와 <스걸파>를 통해 공정한 경쟁에 박수를 보내던 건 까맣게 잊었는지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유세 현장은 극으로 치닫는 듯이 보였다. 극단을 통해 드러낸 가치만이 한 명의 유권자라도 더 끌어당길 수 있다는 것처럼. 누군가는 춤 경연 프로그램 우승과 대통령 당선의 가치를 동일시할 수 있냐고 지적할 테지만, 가치의 저울질을 떠나 어렵게 방송 말미에 건져 올린 경쟁에 관한 교훈적인 스토리텔링이 삽시간에 사라진 듯해 씁쓸할 뿐이었다. <스걸파>에서 상대팀을 이기려고 황당한 안무를 선사한 고등학생 팀원들을 손가락질한 사람 중에 과연 몇 명이나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상대 후보를 향해 날리는 온갖 비방을 동일한 잣대로 바라봤을지가 궁금해진다.


나처럼 대선 후에 생겨난 환멸, 혐오, 대립의 발언에 신물이 난 한 지인은 투표는 마침표가 아니고 쉼표라고 하소연했다. (그새를 못 참고 인스타를 슬쩍 본 게 이렇게 들통이 난다) 방금 읽은 저 문장과 지인이 스토리에 남긴 글귀가 절묘하게 합치되었다. 선거 직전까지야 극단에 치달았다손 치더라도 거기 머물러 마침표를 찍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말이다. 일단 이기고 보자며 극단으로 치닫던 형국에 휩쓸리지 말고 적당한 곳에서 쉼표를 찍은 뒤 숨을 돌리고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극으로 치닫지 않을 다른 방향으로. 극단으로 포장되어 드러낸 가치가 수많은 발언을 날카롭게 만들어 마침표 아래에 드리우지 않도록, 날 서지 않은 둥근 마침표 아래로 쉼표의 꼬리가 생겨날 수 있도록 말이다. 


천사가 보기에 혐오의 움직임은 혐오를 일으키는 대상만큼이나 혐오스럽다.
 분노나 증오의 물결은 분노를 일으키는 그 어떤 원인보다 불쾌해 보인다.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자유를 잃고 상황에 순종하는 데
우리의 힘을 바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듯이 더 고결한 무엇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위 문장 역시 폴 발레리의 문장을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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