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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Mar 19. 2022

빨대와 불삼겹

단상(37) -  단상 34 <'사랑'니> 뒷이야기


사랑니를 빼고 나서 피해야 하는 행동 중 하나. 빨대로 음료 마시기. 처음도 아니고 두 번째로 뺀 사랑니라서 저런 주의사항쯤이야 쉽게 기억하고 있을 수 있었다.


..., 라고 방심했다. 카페에서 사 온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비스듬히 예쁜 자태로 꽂힌 빨대를 보자마자 홀린 듯 커피를 한 모금 빨았다. 간호사가 열심히 설명해 준 주의사항은 '흡-'하고 숨을 들이쉬는 순간 고이 접어 나빌레라, 잊혀버렸다. 그나마 발치 당일이 아니고 이틀이 지난날이었던 게 다행이었다. 아주 손쉽게 뽑아낸 사랑니라 뽑힌 그 자리도 예상보다 훨씬 빨리 아물었는지 구내 압력 상승으로 인한 출혈은 동반되지 않았다. (의학 용어는 개뿔 하나도 모르면서 괜히 의학 용어 느낌을 살려서 써 보고 싶었다...)


주섬주섬 빨대를 빼 버렸다. 어차피 바로 마실 거라 뚜껑도 열어 두었다. 그렇다고 원샷을 할 건 아니라서 한 모금 마시고는 빼 둔 뚜껑을 살포시 커피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잠시 책을 읽다가 한 모금 더 커피를 마시려고 컵을 들었다. 입으로 들어가야 할 커피는 입 대신 동동 띄워진 얼음과 함께 우수수 내 목젖과 가슴팍을 타고 거칠게 흘러내렸다. 흐르고 흘러 이내 바닥에 후두둑 흔적을 남겼다. 아, 뚜껑 열고 마신다고 뚜껑을 살짝 덮어만 놨지... 이 사단이 날 줄 알았으면 어차피 처음 한 번 빨대로 들이켰을 때 피가 안 났으니 그냥 빨대로 마셨을 걸 그랬나. 방심을 한 번 피했다고 또 방심했다가 당한 봉변이었다. 


저녁 즈음 어머니가 '불삼겹'을 해 놓았다고 카톡을 보내셨다.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날 위해 종종 매운 반찬을 해 두시는데, 매운 소스로 자글자글 익혀낸 길쭉한 소시지였다. 삼겹살은 아니고 소시지인데 그냥 가족끼리만 '불삼겹'이라고 부른다. 빨대 피하려다 뚜껑 열려 된통 젖은 해프닝을 교훈 삼아 사랑니 핑계로 행동에 제약을 두지 않기로 했다. 사랑니 주변이 잇몸이 채 아물지 않았아도 매운 소스가 그 구석 깊은 곳까지 침투할 리 없다면서 저녁상은 '불삼겹'과 함께 차렸다.


그리곤 파국이었다. 덜 아문 잇몸 혹은 사랑니가 빠진 구멍에 매운 소스가 들어가서 눈물 콧물도 모자라 식은땀까지 질질 흘려야 했던 식탁 앞의 파국은 아니었다. 맵다고 난리 블루스를 추진 않았으니 저녁상 앞에서 파국을 논하려면 파(로 끓인)국 정도라야 논할 맛이 날 터. 파국은 다음날 아침 매운 소스가 닿은 혀가 아닌, 훑고 내려 간 위장에서 시작됐다. 발치와는 별개로 매운 음식 자체를 오랜만에 먹어서인지 방심한 위장 점막이 들끓기 시작했고 어서 잔여물을 내보내라고 아침부터 아우성을 친 것이다. 아침 댓바람부터 그렇게 퓌떵(putain)을 외치며 피통을 싸야만 했다. 


퓌떵(putain)-피똥 콤비네이션이 뭔 말인가... 싶으신 분들은 프랑스어 욕을 소재로 깨알 재미를 버무린 에세이 <욕고불만 - 욕마저 고상하다는 불어를 만나다>를 동네서점에서 구입하여 읽어 보시길 바랍... (기승전-책 홍보) 


방심할 타이밍이 한 차례씩 어긋나며 생겨난 지난 <'사랑'니>의 단상의 뒷이야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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