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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Mar 24. 2022

날 홀린 년...

단상(38) ...근

(괜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제목은 꼭 부제까지 이어서 읽어 주시길 미리 당부드리며...)


유아-어린이-청년-중년-노년, 다섯 단계로 구분되는 것이 생애주기라면, '살'의 주기는 훨씬 더 간략하게 나눌 수 있다. 딱 두 단계로만. 다이어트에 돌입하는 단계와 다이어트 앞에는 '부질없'이란 세 글자가 붙는다는 걸 깨닫는 단계(부질없다이어트). 부질없다며 방심한 사이 차곡차곡 차오른 살을 보면 이래서는 안 된다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다이어트에 돌입하니 부질없는 건 다이어트가 아니고 이런 무용한 순환인 듯하지만. 한혜진은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는 게 몸밖에 없기 때문에 몸매 관리가 제일 쉽다고 했지만... 말처럼 쉬웠으면 나도 모델했겠다고 떵떵거릴 텐데 일단 키가 작...


아무튼, 첫 번째 살의 주기로 돌아온 만큼 유산소 운동으로 지방을 불태워야겠다며 러닝머신에 올랐다. 걷는 거조차 싫어하는 평소 모습을 떠올리면 내 딴에는 엄청난 의지를 발휘한 것이다. 그 의지는 삼십 여분을 버텨냈지만 준비되지 않은 체력은 미처 의지를 따라가지 못했다. 운동 후의 내 몸은 여름철 아스팔트 위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흐물흐물 거리는 상태였다. 이왕 살을 빼기로 작정했으니 저녁은 샐러드를 먹겠다고 속으로 호언장담했는데... 이 상태에서 풀떼기만 먹었다가는 쓰러질 것 같았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라도 하려면 뭐라도 먹어야 했다. 


체력이 고갈된 상태에선 '밥 차리기'마저 고역이다. 다행히 냉장고에 육전이 남아 있어 후다닥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웠다. 밑반찬을 꺼내는데 오잉, 정갈하게 담긴 연근조림이 눈에 들어왔다. 체력이 동나서 흐물거리는 내 모습과 대비되는, 아삭함이 벌써 느껴지는 단단한 구릿빛 몸체에 반해버렸다. 통 뚜껑을 열 때 코끝을 간질이는 짭조름한 내음은 땀으로 흘린 나트륨을 보충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을 심어준다. 양심상 밥은 반 공기만 담고(탄수화물 섭취 최소화!) 연근 조림에 김과 김치까지 곁들여 부랴부랴 입 속으로 넣었다. 美!味!


연근에 홀려 밥을 들이밀고 있는데 귓가에 뭐가 자꾸 삑삑 거린다. 육전이 다 데워졌다는 전자레인지 알림이 간헐적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뿔싸. 이미 두 숟가락 남기고 밥을 다 먹었는데... 다 데운 육전을 냉장고에 다시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육전만 먹자니 벌써부터 니글거린다. 어쩔 수 없이 밥솥으로 가 밥 반 공기를 더 퍼담는다. 탄수화물을 줄이긴 개뿔. 아까 러닝머신에서 흘린 땀과 (얼마나 태웠겠냐마는) 태운 지방은 말짱 도루묵이다.


결국 어제도 살의 주기는 두 번째 '부질없다이어트' 단계로 점철되고 말았다. 이게 다 날 홀린 년(연)...근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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