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ernweh May 25. 2022

지하철이 멈췄으니 치킨을 먹자

단상(48)


어제저녁, 3호선. 매봉역에서 스파크가 튀면서 운행이 베베 꼬여 버렸다. 지하철이 멈췄다는 제목이 무슨 말인지, 어제 퇴근길에 3호선 지하철에 오른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은 그 악몽이 흠칫 떠오를 것이다. 퇴근 시간이니 승강장에 사람이 많을 거란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어제는 많을 거란 예상마저 뛰어넘는 인파가 승강장을 꽉 메우고 있었다. 정말 '메우다'라는 동사를 써야만 할 정도였다. 원인은 모르지만 어떤 비정상 상황이 발생했다는 짐작만 한 채 마냥 기다릴 순 없으니 꾸역꾸역 밀기도, 밀려 들어가기도 하며 어찌어찌 객차에 오르기는 했다. 


차량 안에서 꽉 낀 채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도, 지하철도. 어떤 사고가 있어 전 열차가 지금처럼 거북이 운행을 할 수밖에 없다는 방송만 간간이 흘렀다. 드디어 문이 닫히고, 겨우 한 정거장을 갔지만, 또 몇 분간 운행하라는 지시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이미 차량이 꽉 찬 탓에 다음 역에서 기다리던 사람은 아예 타지도 못했다. 겨우 또 한 정거장을 지나고, 기어코 두, 세 정거장까지 지나왔는데... 거기서 '발차 대기를 할 예정이니 급하신 분들은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길 바란다'라고 방송이 흘러나왔다. 지금처럼 4~5분을 기다리다가 꾸역꾸역 다음 정거장으로 가고, 또 그만큼을 기다렸다고 그다음 정거장을 간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3호선의 전 운행이 정상화될 때까지 쌩으로 멈춰 있을 거라는지, 단박에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중의적인 방송이었다.


객차 내에 사람이 적었다면 책이나 읽으며 기다렸을 텐데, 책은커녕 주머니 속 핸드폰도 꺼내기 힘들었던 탓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리기로 했다. 무작정 출구로 나와 집으로 가는 방향 버스를 탔다. 지하철도 경로에 문제가 생겼을 때 다른 방향으로 휙 돌아갈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경로를 이탈했다고 땍땍거리는 내비게이션 안내 음성도 반갑게 들릴 지경이었다. 우르르 떼로 몰려나온 지하철 승객이 버스 정류장을 점거한 광경을 보고 있자니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버스도 일단 잡아 타긴 했는데 방금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겨우 몸을 싣긴 했다만, 돈통 바로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걸터 서서 문이 열릴 때마다 기사님께 앞문 열린다는 경고 아닌 경고를 들어야 했다. 


문득 버스가 지나는 길목에 이모가 운영하는 호프집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나마 지하철보다는 차내 공간에 여유가 생겨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낼 수 있었고 부랴부랴 연락을 했다. 아직 저녁을 안 드셨다며, 와서 저녁을 먹으라고, 뭘 먹겠냐고 이모는 미리 주문까지 받았다. 얼떨결에 치킨이 먹고 싶다고 말했고, 늘상 살 빼야 된다는 말을 습관처럼 아가리 다이어터의 저녁 메뉴는 치킨이 되었다. 



뭐, 이유를 굳이 붙여 보자면 '지하철이 멈췄으니 오늘은 치킨이닭!'이랄까. 저 유행어를 만든 게임은 해본 적도 없으면서 지하철이 멈췄다는 엉뚱한 이유를 갖다 붙이며 바삭바삭 튀겨진 닭을 야무지게 발골했다. 다행히 스파크만 튀었지, 큰 사고로 이어지진 않은 듯했다. 잔뜩 부풀어 오른 배를 앞세우며 다시 타러 간 지하철은 정상적으로 운행되고 있었다. 그 시각, 트위터에는 힘겹게 집에 온 이야기부터 저녁 약속, 심지어 보려던 공연에 늦었다는 트윗이 심심치 않게 올라왔다. 다이어트가 말짱 도루묵이 된 건 어쩔 수 없지만(아니, 다이어트를 하고 있긴 했냐고...), 고생에 고생을 하며 집으로 돌아간 대신 여유 있게 치킨으로 '맛저' 하고 왔으니 그것만으로 다행스럽고 만족스러운 저녁이었다. 그나저나 치킨 사진 보니까 또 치킨 먹고 싶... (이제 그만)

매거진의 이전글 알람이 울리자마자 잘 일어난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