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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Jun 24. 2022

여태

단상 (53) 안 떠나고 뭐 했니, 여태


뭘 좋아하냐고 묻는 질문에 '여행'을 좋아한다는 답을 줄곧 해 왔다. 그런데 팬데믹으로 여행길에 빗장이 단단히 걸린 이래로 답변에는 늘 변명이 뒤따랐다. 여행을 좋아하는데 그놈의 전염병 때문에 가지를 못한다는 변명이. 이 년이 넘도록 같은 변명을 되풀이하다 보니 거짓으로 말미암은 리플리 증후군 대신 변명 버전의 리플리 증후군에 걸려 버렸다. 자신이 하는 거짓말을 진실로 여기는 리플리 증후군처럼 좋아해도 여행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하나의 진실처럼 마음속에 번지고 있었다. 좋아한다는 말에 무게 중심이 쏠렸으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떠나지 못한다는 뒤쪽의 문장에 힘이 실렸다. 장롱에 가려진 채 습기를 머금다가 몰래 벽지 위로 피어 오른 곰팡이처럼 여태 떠나지 않고 머뭇거렸더니 여행 권태기라는 곰팡이가 마음에 퍼지고야 말았다. 


방역 단계가 강화됐을 때를 빼자면, 여행은 하기 힘들긴 했어도 아예 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해외로 나가기엔 녹록지 않았을뿐더러 내키지도 않았으니 해외여행은 제쳐두고 국내 여행만 따져본다고 해도 충분히 어디든 떠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여태 여행이라고 할 만한 일상에서의 일탈이 없었다. 해외보다 국내에 여행할 만한 곳이 없다고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한창 여행을 다닐 때도 해외 위주로 여행을 다녔지만, 그 이유는 국내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쉽게 갈 수 있을 거라는 맹랑한 믿음 때문이었다. 해외를 못 나가는 지금이 국내 여행을 할 마침맞은 타이밍이었는데, 전염병을 구실 삼아 발동이 걸리려는 역마살에 자꾸 제동을 걸어댔다. 


예전 같았으면 '부산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당장 주말에라도 짐 싸서 부산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간의 행실을 잘 떠올려 보면 주말에 부산으로 급 여행을 떠나는 건 초급자 레벨이었다. 괌에서 한국으로 오자마자 후쿠오카로 간 적도 있는 내게는 말이다. (새벽 5시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서 집으로 가다 말고 다시 출발층으로 가서 아침 10시 후쿠오카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후쿠오카를 '훑구 오까?'라면서. 그 정도로 여행에 혹하던 나였다. 말장난은 못 본 척하시길...) 시간만 맞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국내의 여러 도시는 찰나의 고민으로 스쳐 지나가기 바빴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괌에 다녀와서 후쿠오카를 가던 열의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일상이 코로나 이전과 크게 다를 게 없을 정도로 방역 지침이 완화된 지금까지 여태 어느 한 군데 제대로 떠나지 않을 걸 보면 여행 권태기에 접어든 게 확실하다. 몇몇 지인이 최근에 해외로, 특히 날 제일 설레게 만드는 대륙인 유럽으로 여행을 훅 떠나는 걸 보고 들었는데도 생각보다 부럽지 않기까지 한 걸 보면 여행 권태기를 넘어 선 여행 갱년기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함마저 엄습했다. 


나는 이십 대부터 삼십 년 가까이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도망치듯 살아왔다. (중략) 그런 여행에 지친 나는 항상 정착을 꿈꾸며 살아왔다.


이주영 작가의 <여행 선언문> 프롤로그에 나온 이 문장에 의외로 격하게 공감했다. 저자처럼 오랜 기간 해외를 떠돌아다니진 않았어도 '정착'에 마음이 끌리는 요즘이다. 여행을 떠나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것보다는 지박령이 된 것 마냥 집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리는 게 더 마음이 편하다고나 할까. 코로나 초창기만 해도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하여(나가지 말라니까 더 나가고 싶어 지는) 여행에의 갈망이 강했다. 방역 지침이 강화되기 전에 부산과 양양에 다녀오기도 했다. 근데 정작 여행이 한결 자유로워지는 때가 되니 굳이 여행을 가야 하나 싶다. 밑도 끝도 없는 청개구리 심보가 아닐 수 없다.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것이 여행이고 그것이
우리가 인생을 사는 방법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다.


이번엔 같은 책의 에필로그 속 한 문장을 발췌했다. 얼떨결에 멈춘 여행은 초반에 역마살을 자극했다. 멈춰있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이내 여행은 역마살을 자극하지 못하고 온 몸으로 감당했던 여행 중의 피로와 여독만을 상기시키게 했다. 동시에 밖을 나돌아 다니는 대신 집에 머물며 느낀 정착의 달콤함이 습관처럼 몸에 뱄다. 여독의 씁쓸한 맛에 혀를 내두르고 정착의 달콤한 맛에 침을 흘리느라 애써 여행을 외면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이런 내게 누군가 여행러냐 집돌이냐 물어봐도 고민 없이 '여행러'라고 대답할 거면서 정작 떠나라고 하면 망설이는 여행 권태기의 모순에 잠식된 느낌이다.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게 만드는 걸 보니 당장 떠나든 떠나지 않든 여행이란 녀석은 위 문장처럼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것이 맞나 보다. 


청개구리 심보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떠나라는 데도 여태 떠나지 않은 여태(여행 권태기)가 조만간 끝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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