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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Jun 29. 2022

김치찜이 된 나의 삼겹살에게

단상 (54)


삼겹살이랑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지만, 영화 <엑시트> 이야기부터 꺼내볼까 한다. 어머니의 칠순 잔치를 앞두고 거울 앞에서 한껏 단장 중이던 조정석은 오른쪽으로 가르마를 낸 단정한 머리를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어머니가 쓱 다가와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들 머리에 손을 짚어 넣더니 가르마 방향을 반대로 바꿔 버린다. 네 머리는 이쪽 가르마가 더 잘 어울린다면서. 졸지에 굉장히 펑키한 스타일이 되어 버린 조정석은 당황한 나머지 잠시 멍해 있다가 이내 발까지 동동 구르며 이건 자기 머리라고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린다.



부모의 눈에는 다 큰 자식도 그저 어린아이처럼 보인다는 게 영화 속 장면으로 한 번 입증이 되었고, 우리 집에서는 인덕션 앞에서 또 한 번 입증이 되었다. 그저께 갑자기 고기가, 좀 더 구체적으로 삼겹살이 먹고 싶어졌다. 고깃집을 안 간지도 어언 백만 년이었고(물론 과장이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 때문인지 불판에서 치익-치익- 익는 삼겹살이 당겼다.(누구는 비 오는 날엔 파전이라지만, 난 고기파니까) 집으로 들어가던 길에 정육점에 들러 삼겹살을 샀다. 이미 저녁을 먹어서 바로 집에서 구워 먹기엔 배가 너무 불러서 냉장고에 하루 묵혔다가 다음 날 먹을 작정이었다. 그렇다고 아침 댓바람부터 고기를 먹기는 너무 부담스러우니 일을 마치고 저녁에 오매불망 기다리던 삼겹살을 구워 먹을 요량이었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복은 온데간데없고 내 앞에 남은 건 김치찜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방에 가방을 던져 놓기가 무섭게 후다닥 냉장고 앞으로 직행했다. 벌컥 문을 열었는데 어제 사놓은 삼겹살이 안 보인다. 이 집에서 돼지고기를 사다가 구워 먹을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갸우뚱하며 주방을 살펴보았다. 인덕션엔 정체 모를 커다란 냄비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그 안에는 저녁상에 오르기 위해 차디찬 냉장고 속에서 하루를 버텨 준 내 소중한 삼겹살이 질긴 배춧잎에 목 졸린 채 칼칼한 국물 속에 빠져 매운맛에 시달리고 있었다. 물론 김치찜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내 구미를 당겼던 건 찜이 아니었다. 야들야들하게 잘 구워진 삼겹살 구이였다. 하늘도 무심... 아니 어머니도 무심하시지,라고 투정 부리고 싶다만, 아들이 좋아하는 매콤한 김치찜을 만들어 주신 당신의 정성을 생각하니 투정 부리지는 못하겠다. (그것도 그렇고, 결국 김치찜을 좋다고 먹긴 했으니까...) 


이날 먹지 못한 삼겹살을 먹어야 한다는 구실이 생겼으니 조만간 고깃집에 출두해야겠다. (그만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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