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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Jul 22. 2022

소설, 그 자작한 맛

단상 (55)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소설 이야기가 나왔더라. 얼마 전, 카페에서 지인과 수다를 떨던 중 소설에 관해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어 내려갈수록 가슴 한 구석이 아려와서 쉽게 다음 장을 넘기지 못했다고 했다. 나도 그 소설을 읽을 때 그런 비슷한 감정 느꼈는데, 내 경우엔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을 때 훨씬 더 그런 감정에 빠졌었다. 저자가 두 소설 중 어느 하나를 더 잘 벼렸기에 후자에 더 몰입했던 건 아니다. 전자는 불어 번역본으로, 후자는 우리말로 읽었기 때문에 모국어가 한국어인 내게 고스란히 아릿한 감정이 전달된 건 후자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날의 대화는 또 하나의 여운을 내게 남겼다. 페이지를 쉬이 넘길 수 없게 할 만큼 아린 감정을 선사하는 소설이라... 물론 같은 저자인 한강의 두 소설이 예가 되었던 터라 이는 어디까지나 그 저자의 전매특허 같은 필력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작품 모두 소재가 4.19 광주 민주화 운동과 제주 4.3 사건이라는, 처참한 비극이었기에 슬픈 감정이 훅 날아든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여러 소설, 특히 내가 인상 깊게 읽었던 소설은 저렇게 훅 날아드는 감정을 아주 자작하게 끓여낸다는 생각이 스쳤다.


대상을 눈으로 본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드라마나 영화 같은 매체가 소재가 되는 사건을 전면으로 내세우며 그 시각적 임팩트를 세게 준다면, 소설 - 적어도 내가 끌리는 것 - 은 눈으로 텍스트를 훑는 데 그치지 않고 종이 위로 생동하는 감정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게 만드는 듯하다. <소년이 온다>와 같은 소재를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에 담긴 군부의 총칼에 시위 현장에 있던 무고한 시민들이 피를 토해내며 무자비하게 죽어 나가는 영상은 보는 순간 즉시 감정에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작별하지 않는다>에 담긴 4.3 사건 관련 영화는 부끄럽게도, 아직 본 작품이 없지만, 아마 영상으로 재현된 제주에서의 비극은 비슷한 맥락을 품었으리라고 짐작했다. 사실 영화는 사건 자체를, 잊혀가는 역사를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다시금 들어내려 했던 것이고, 한강의 두 소설은 사건도 사건이지만, 사건 이후 남은 사람이 주인공이고 그들이 털어 내는 이야기인지라 애초에 비극이 가진 잔인성이나 폭력성이 생생하게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소설을 읽으며 4.19나 4.3 사건이 아예 떠오르지 않는 건 아니기 때문에 비극을 글 속을 감춰버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추룩 총소리를 하영 들은 거는 그때 첨이고 마지막이라.
한참 지낭 잠잠해져그네 벌벌 떨멍 문구멍을 내당보난,
그추룩 하영 이시던 사름들이 모살왓에 자빠져 이서서.
군인들이 둘씩 짝을 지어그네 한 사름씩 바당에다 데껴 넣어신디,
꼭 옷들이 물우에 둥둥 떠다니는 것추룩 보여서. 

- 작별하지 않는다 224 p 中/ 한강/ 문학동네


소설 속 몇몇 증언이 제주 사투리 그대로 담기긴 했어도, 별다른 해설 없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사투리를 풀이하느라 내용을 곱씹은 건 아니었다. 소리와 영상, 좀 더 풀어쓰자면 총소리와 비명이 난무하는 살육의 현장이 동시다발적으로 시각을 후려치는 영화 혹은 드라마와 달리, 소설은 분명 글을 읽어가는 동안 총소리에 비명이 입혀지고, 그 위로 또 한 번 사람의 몸 어딘가를 총탄이 박살 내는 장면이 덧씌워지는 이미지의 연속된 흐름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물론 영화화되는 몇몇 소설은 원작부터가 영화 같은 생생하고 적나라한 묘사를 뽐내기도 하지만, 쓸데없이 까다로운 내 취향은 그런 적나라함에 부담을 느끼곤 한다. 


다른 장르보다도 유독 소설을 많이 읽는 요즘이다. 그래서인지 아주 짧게 스친 소설에 관한 담소를 잊지 못해 이렇게 단상이랍시고 소설의 자작한 맛이 어떤 느낌인지 글까지 써 보았다. <작별하지 않는다>도 한 번 더 읽게 된 건 덤이고. '책'스타그램으로 활용하는 개인 계정에 아카이빙해 둔 책 리뷰 전체를 오랜만에 쑥 훑어보기도 했다. 위에 언급한 한강 작가의 두 작품 말고, 자작하게 잘 끓여진 소설이 뭐가 있나 살펴보고 싶었다. (겸사겸사 추천하는 모양새도 되니까) 


요시다 슈이치 <파크 라이프>, 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줌파 라히리 <저지대>, 어니스트 헤밍웨이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여행자>,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마르그리트 뒤라스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윤고은 <밤의 여행자들>, 이승우 <한낮의 시선>, 이순원 <삿포로의 여인>,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그리고 박완서 소설 중의 최애는 <미망>이지만, <나목>이 자작한 맛은 좀 더 잘 배어 있고...


음... 쓰다 보니 너무 많아서... 이번 글은 여기까지. (너무 후다닥 마무리 짓는 느낌이라 좀 머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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