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ernweh Aug 12. 2022

잊을만하면 꼬부랑글씨

단상 (60) 싸왓디캅, 타이 꼬부랑글씨

 최민석 작가의 신간 <기차와 생맥주>를 읽던 중 꾸준히 외국어를 배우는 이유에 대해 털어놓은 내용이 인상 깊었다. 본업으로 써야 하는 소설과 달리 공부한 만큼의 성취감을 제대로 얻을 수 있는 게 외국어 공부라고 했다. 소설은 영혼을 갈아 넣어 겨우 완성한 한 챕터도 나중에 마음에 안 들어 통째로 지우기도 했다는 아픈 경험도 공유했다. 그 챕터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으며 맛 본 성취감이 홀라당 사라진 것과 다름없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마는 이런 경우라면 무너진 것이다. 반면 외국어는 소설과 달리 공부한 만큼의 성취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단다. 대학생 때의 내 생각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해서 이 대목이 퍽 인상 깊었다.


 대학 시절 제2외국어 수업을 참 많이 들었다. 어느 날 동기가 왜 그렇게 제2외국어 교양 수업을 많이 듣냐고 물었다. 그때 내 대답은 '종강 후에 외국어 수업만큼 남는 게 많은 수업이 없다'였다. 아리송하게 남아 있는 학문적 지식 말고 실용적으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게 외국어라고 여겼기에 매 학기에 꼭 한 개의 제2외국어 교양 수업을 들었다. 장장 15일에 걸친 첫 일본 여행에서 기초 회화로 제 나름 소통하며 다닐 수 있던 것도, 모스크바 지하철 노선도에 적힌 키릴 문자를 해독해 내며 여기저기 다닐 수 있던 것도 어떻게든 써봄직한 형태로 남은 수업의 결과물 덕분이었다. 방금 배운 따끈따끈한 외국어를 써먹어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상황인 해외여행을 통해 나 역시 일종의 성취감을 느꼈던 것이다.

외국어에 관한 내용만 슬쩍 소개했지만, 재미가 가득한 여행 에세이다! 강추!


 어느 외국어든 그 자체로 호기심을 자아냈지만 태국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는 조금 더 구체적인 것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로마자 알파벳이 아닌 현지 고유의 문자들. 일명 '꼬부랑글씨' 말이다. 방콕 거리에 즐비한 간판 속 꼬부랑글씨는 여행 내내 날 자극했다.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 속 글자들. 그 불가침의 영역에 발을 들이기 위해 결국 인터넷 강의를 듣게 되었다. 자음은 생각보다 금방 뗐는데 사방팔방으로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모음을 맞닥뜨리고는 포기할 뻔하기도 했다. 글자는 떼겠다는 오기가 생겨 어찌어찌 글자까지는 뗀 것이 타이 문자였다. (3줄로 요약한 '타이 문자 정복기'의 자세한 이야기는 저의 졸저 <말을 모으는 여행기> 태국 여행 편에 잘 소개되어 있다. 몇몇 동네 책방의 온라인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으... 깨알 홍보)


 방콕 여행 마지막 날, 호텔에서 나올 때 침대 머리맡 메모지에 괜히 컵쿤캅(ขอบคุณครับ, 감사합니다)을 쓰고 나왔다. 그때 그 소소한 즐거움이란! 영어 알파벳을 쓰는 다른 언어는 꼬부랑글씨를 파헤쳐 가는 즐거움을 느낄 수 없어서인지 점점 호기심이 줄었다. 외국어에 대한 두루뭉술한 호기심이 꼬부랑글씨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 초점이 맞춰졌다. 키릴 문자도 새로운 글자를 배우는 재미를 선사하긴 했지만 알파벳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꼬부랑글씨로 취급하기엔 조금 모자란 글자였다. 초점이 문자 자체로 쏠린 후엔 현지의 고유 문자가 없는 외국어는 배워볼 의욕이 사라진 정도였다. 불어를 할 줄 알기 때문에 불어처럼 라틴어에서 파생된 스페인어를 배우기 쉽다면서 배워보라고 권유받기도 했지만, 배워봤자 어차피 똑같은 알파벳(다른 글자가 한두 개쯤이야 있긴 있다만)이라 애초에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 스페인어를 배우는 최민석 작가는 앞서 소개한 책에서 내가 번역/강의 등으로 업을 삼고 있는 불어가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했다. '난 스페인어가 별로던데!'라며 이 글을 빌려 소심한 복수를 하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길.


 즐겁다고 소리쳤으니 이후에도 쭉 태국어 공부를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그럴 수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폰트와 성조였다. 글자를 열심히 떼면 뭐하나, 예쁜 폰트로 재단장한 타이 문자는 같은 문자였음에도 초심자인 내겐 읽기 힘든 글자였다. 보기 좋은 떡은 먹기도 좋다지만 보기 좋은 폰트는 읽기는 어렵더라. (흥) 치앙마이와 아유타야를 가기 전, 뜻은 모르더라도 글자는 읽을 수 있을 거라며 신나 했는데... 이놈의 폰트 때문에 문자를 열심히 공부해 간 결실을 맛보지 못했다. 그나마 정석의 폰트로 쓰인 거리 표지판이나 방콕 BTS 노선도 정도나 겨우 알아볼 뿐이었다.


읽는 재미가 반감됐으니 말하는 재미라도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성조는 인터넷 강의를 들을 때 일찌감치 거리를 둔 내용이었다. 성조를 표기하는 '유형성조'라는 걸 제외하면 태국어 단어엔 성조 표기가 딸려 있지 않다. 자음과 모음의 특성을 결합해 성조를 구현하는 방식인데 성조가 있는 언어 자체가 처음이었던 내겐 심하게 어려운 내용이었다. (성조 없는 우리말에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สวัสดีครับ(안녕하세요) ← 이 폰트로만 본 문장을 다른 폰트로 인쇄되면 곤란 그 자체... 였다.


 그러다 지난달, 근무하는 책방에서 '태국문방구' 팝업 스토어를 열게 되었고 영영 놓을 줄만 알았던 태국어와의 연결고리가 다시 이어졌다. 팝업 매장 운영을 제대로 불살라보겠다는 의지 때문은 아니었고(어차피 태국 사람을 상대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저 개인적인 호기심이 다시 번뜩였을 뿐이다.  오랫동안 덮어 둔 태국어 교재를 펼쳤다. 당차게 공부했던 문자도 이미 가물가물한 상태여서 처음부터 다시 복습해야 했다. 학습에 관한 인간의 기억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기억이 옅어질 뿐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는다는 걸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다. 처음 타이 문자를 배웠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수월하게 예전에 공부했던 내용을 수습해 낸 것이다.(두둥!) 예전에는 방금 외워놓고도 이 자음, 모음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수차례 앞 페이지로 돌아가며 확인해야 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딱 한 번 복기했을 뿐인데 문자와 소리가 저절로 매칭이 됐다. 단어를 보고 내가 유추한 발음이 착착 맞아떨어졌다. 이 기세라면 '성조'의 고비도 이번만큼은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성조 파트도 어찌어찌 공부하긴 했다. 짧은 시간 공부한다고 단박에 마스터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이 외국어라서 여전히 성조는 미지의 영역이긴 하다.


팝업 스토어에서 근무하면서 써먹어 본 꼬부랑글씨 :)


 * 위의 문장: 오늘부터 저는 다이어트를 할 거예요. / 아래 문장: 비록 배가 부르더라도 더 먹어야 한다.


  아가리 다이어터(말로만 다이어트하는 나 같은 치를 일컫는 말)인 내 상황과 딱 떨어지는 예문이라 빵 터진 채 익혔던 문장... 어제저녁 다이어트한답시고 샐러드를 먹고서는 성에 안 찬 나머지 (샐러드 먹어서) 배가 부르더라도 더 먹어야 한다고 고기를 구워버린 내 모습을 저자가 예언이라도 한 모양이다.  


 아무튼, 묵혀 놓을 줄만 알았던 타이 문자를 들춰내고 나니 다른 꼬부랑글씨도 끄적여보고 싶은 마음이 실로 오랜만에 생동하는 요즘이다. 결국 또 도전해보겠다면 덥석 문 언어가 있었으니... '싸왓디캅', 했던 인사를 다음 편에서는 새롭게 배운 꼬부랑글씨의 인사로 계속 이어볼까 한다. (다음 편에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체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