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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Aug 07. 2022

체하다

단상 (59)


체하다 

: 먹은 음식이 잘 소화되지 아니하고 배 속에 답답하게 처져 있다. 

[유의어] - 얹히다


체한 증상은 퍽 낯설었다. '체하다'는 동사보다 감각적으로 조금 더 직관적인 비슷한 동사 '얹히다'란 말을 겨우 떠올리며 뱃속에 무언가가 얹혀 있음을 직감했다. 정작 체한 건 난데, 얼굴이 좀 창백해진 거 같다고, 엄지와 검지 사이를 꾹 누르자 아프다고 하는 나를 보며 체한 거라고 진단을 내린 건 평소에 밥 먹듯 체하는 사촌들이었다. 하루에 세 끼를 먹는 데 밥 먹듯 체한다니, 그런데 그 말이 엄청 과장을 섞은 게 아닐 만큼 외가 쪽 사촌들은 소화력이 현저히 약했고 그만큼 정말로 밥 먹듯 체를 했다. 당장 나의 직계 외가 가족인 어머니부터 체를 많이 하는 체질이었으니 굳이 사촌의 사례까지 짚고 넘어가지 않아도 됐다. 


아무튼, 그런 취약한 소화력을 가족력으로 지닌 외가의 혈통을 나만큼은 빗겨 나갔다. 위장기관은 친가의 혈통을 더 물려받기라도 한 듯, 외가 식구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으면 꼭 누군가는 체를 하곤 할 때도 단 한 번도 그 누군가가 나인 적이 없었다. 지극히 평범한 속도로 밥을 먹고, 대식가는 커녕 겨우 큰맘 먹고 먹을 때나 중식가 언저리를 겉돌 정도인 나의 식사량 역시 특별하지 않은 축에 속한다. 오히려 친구들과 있으면 남자 치고는 늘 밥을 늦게 먹는 편에 속했음에도 외가 친척은 밥 좀 천천히 먹으라는 잔소리를 자주 해왔다. 희한한 건, 그리 밥을 빨리 먹지 않는 내가 봐도 천천히 밥을 먹는 그네들이 도대체 체는 왜 그렇게 자주 하는가- 하는 부분이었다.


어제 손에 잡힌 일을 해치우고 밥을 먹겠다고 설치다가 3시 반이 돼서야 겨우 밥을 먹었다. 양도 꽤 넉넉한 메뉴를 먹었으니 '점저'를 먹은 걸로 치고 한 끼는 건너뛰거나 가벼운 메뉴로 허기만 달래도 됐을 텐데... 점심 먹은 지 4시간 만에 저녁 먹는답시고 고기를 한 팩이나 구워 먹었다. 식욕에 연관된 뇌세포에만 건망증이 깃든 건지 닭똥집에 맥주나 한잔 하나는 사촌들의 야식 유혹에 혹했고 결국 동네 호프집으로 향했다. 그 호프집은 사촌 집 바로 앞이라 내가 가는 동안(그래 봐야 5분 거리인데도) 먼저 가서 주문을 해 놓으라고 했다. 미적거리다 나가는 바람에 10분 좀 넘어서 도착했고, 내가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왼손엔 차디찬 생맥주 잔을 쥐고 오른손엔 젓가락을 쥔 채 마시고, 먹고, 또 마시고 먹었다.


정신없이 먹다 보니 금방 배가 불렀다. 불러도 너무 부른 느낌이어서 그제야 저녁 먹고 왔다는 걸 새삼스레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부른 것 이상으로 꽉 막힌 듯한 느낌이 들어 또 그제야 점심을 양껏 늦게 먹었다는 것도 새삼스레 떠올렸다. 뭐가 마려운 건 아니었는데 뭐라도 밖으로 빼내야 속이 좀 시원해질 것 같아 괜히 화장실도 한 번 다녀왔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화장실을 다녀오는 거로 해결되지 않을 묵직함이 느껴졌고 그 불편함을 털어놓았다. 체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들은 몇 가지 의심 증상을 체크하자마자 체했음을 확신했다. 다행히 시켜 놓은 메뉴를 거의 다 먹어갈 즈음이라 자리를 털고 나와 바로 옆 편의점에서 까스활명수를 사서 천천히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체했던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땐가 한 번 세게 체했던 기억은 난다. 그 이후엔 언제 어디에서도, 군 복무할 때도 항공기에서 근무할 때도, 그러니까 밥을 급하게 먹어야 했던 때에도 체한 적이 없었는데... 대식을 거침없이 선보이는 먹방 유튜버처럼 위대(胃大)하진 못해도 초3 이후로 근 20년 가까이 체해 본 적 없는 위대한 소화력을 지녔던 내가 체를 하다니... 난치병 진단이 내려지는 순간 같았다. 기억의 알고리즘은 얼마 전 유튜브에서 본 <거침없이 하이킥>의 한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했다.



먹성 좋기로는 명성이 자자했던(?) 정준하-나문희 모녀의 에피소드였는데, 극 중 식신에 버금가는 정준하보다도 더 잘 먹는 역할로 나온 나문희 여사가 어느 날 체한다는 이야기였다. 엄마가 체했다는 소식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라며 울상을 지을 정도로 그녀의 체는 있어서는 안 됐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문희 남편 역의 이순재는 호들갑 떠는 아들을 '나이 먹으면 소화력이 떨어지니 체도 하고 그러는 거지, 뭐!'라며 타박한다. 마치 저 시트콤 속 나문희가 된 기분이었다. 나문희는 노년에 접어들었으니 소화시키는 게 예전 같지 않다고 할 수야 있지, 노년기도 아닌 내가 체를 했다니, 더 시무룩해질 뿐이었다. 


덩달아 처음 먹어 보게 된 까스활명수가 왜 '국민 소화제'인지 그 효과를 톡톡히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다.(앞으로 소화제 먹을 일이 있다면 무조건 까스활명수다!) 얼마 전까지 입맛이 통 없다고 밥도 새 모이만큼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비빔국수에 침샘이 터졌다며 위장을 예열할 여유도 없이 마구마구 음식을 들이부은 대가였다. (입맛을 되살려준 비빔국수 이야기는 57번 단상 '나의 비빔국수'에 자세히 적어놓으니... 한 번 같이 읽어 보시길) 건강한 섭식 생활을 위해 소식을 하리라, 더 천천히 밥을 먹으리라, 한 입이라도 더 꼭꼭 씹어 먹으리라, 오래 가지 못할 다짐을 한 밤이었다.


체라는 걸 할 거라고 생각조차 못했던(이렇게 쓰니 체하는 게 극소수만 걸리는 희귀병 같다만...) 내가 기어코 체하고 만 기념비적인 날이라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 둔다. 2022년 8월 7일... 잊지 못할 8월 7일... 이거 뭐 달력에 적어 둘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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