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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Aug 19. 2022

잊을만하면 꼬부랑글씨

단상(61) 쭘립쑤어, 크메르 문자


 제 나름 정복(?)한 타이 문자의 다음 타깃은 캄보디아어의 크메르 문자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 꼭 그 나라의 언어를 배워보는 걸 여행의 워밍업으로 삼는 나였기에 앙코르 와트를 보러 씨엠립으로 가기 전에 캄보디아어를 배워보려 했었다. 그런데 다른 외국어와 달리 취미 삼아 캄보디아어를 한 번 끄적여 볼 만한 적당한 교재가 마땅치 않았다. 


 태국을 다녀오며 동남아 여행의 물꼬가 트기 전까지는 뻔질나게 유럽만 다녀왔다. 프랑스를 필두로 유럽의 매력에 푹 빠졌기 때문. '이번에는 유럽 말고 다른 데를 가보자'라며 다짐을 해 봐도 금세 잊어버리고 또 유럽행 항공권을 끊고 말았다. 그때 들른 나라의 언어는 국내에도 독학용 교재가 많이 출간된 나라였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동구권이라 일컫던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 등의 언어도 방금 언급한 교재를 낸 출판사에서 시리즈처럼 책을 냈기에 동유럽으로 가기 전 참고해 볼 수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유독 캄보디아어는 예외였다. 시중에 두 종류 정도 책이 있긴 있었지만, 여행 워밍업용으로 참고할 만한 책은 아니었다. 유럽 언어와 달리 태국어처럼 '꼬부랑글씨'부터 한 글자 한 글자 배워야 하는 만큼 글자 설명이 중요한 언어인데, 마음에 썩 들 만한 설명이 담긴 책이 없었다. 그나마 크메르 문자를 맛보자는 식으로 펜맨십 교재처럼 얇게 나온 책을 사서 글자를 따라 그려볼 수는 있었지만, /어/ 계열과 /오/ 계열 문자 두 계통으로 나뉘며 어떤 계열이냐에 따라 모음 발음이 달라지는 디폴트 값 자체가 복잡한 크메르 문자였기에 제대로 익힐 수 없었다. 방콕에 다시 갔을 때 서점에 들러 영문으로 된 캄보디아어 책을 한 권 사 온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호기심이 충족되지 않아 덜컥 사 왔을 뿐, 이 책도 크메르 버전의 꼬부랑글씨를 익히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글로도 이해되지 않는 발음 설명을 영어로 봐야 했으니까...)


 씨엠립 여행을 다녀온 지도 4년이 지난 2020년의 어느 날, <크메르 문자 기행>이란 책을 읽게 되었다. (타이 문자 이야기에 등장했던 <태국 문방구>를 출간한 '소장각' 출판사의 첫 책이기도 하다) 그 책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고, 이걸 읽고 나서야 왜 캄보디아어 교재가 많이 없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크메르 루주에게 지식의 보고(寶庫) 도서관은 '사회악'이나 다름없었다.
군인들은 국립도서관에 있던 책들을 모조리 밖으로 꺼내 불태웠고, 비워진 공간을 크메르 루주 군인들의 숙소로 사용했다.

 

 도서관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비단 도서관에 있는 책뿐이었겠는가. 당시의 캄보디아에선 놓여 있는 장소와 상관없이 모든 책은 땔감 정도로 치부됐을 것이다. 책 사봤자 냄비 받침으로 전락할 거라는 농담이 그나마 나은 지경인 시절이었다. 손에 굳은살이 없다는 이유로 지식인 프레임을 씌워 무참히 죽이던 때였으니 책을 가진다는 건 있을 수도 있어서도 없는 일이었다. 저자는 해외 책 덕후이기도 했는데, 기쁜 마음으로 찾아간 프놈펜의 한 서점은 유럽어권 도서를 파는 서점이었다고 한다. 겨우 찾아낸 '찐' 캄보디아 서점은 주변 학교 학생을 위한 교재 정도만을 팔고 있었고, 그마저도 퀄리티가 현저히 떨어져 사지 않고 나왔다는 내용도 있었다.


실시간 소통이 특징인 모바일 시대에 캄보디아인들은
오히려 크메르 문자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자신의 언어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고유 문자가 있음에도,
입력 방식이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려 사용성 측면에서 차
선책으로 밀려난 것이다.


 분서갱유의 아픈 역사를 거친 데다가 그 복잡성으로 인해 자국민에게도 차선책이 되어 버렸다는 크메르 문자. 크메르어를 모국어로 둔 사람들도 내가 원하던 캄보디아어 교재 같은 게 필요하지 않은 실정인데, 이역만리 타국에 사는 내가 캄보디아어 교재를 쉽게 구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크메르의 지식을, 유산을, 보고를 복구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는 내용이 책 후반부에 나와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크메르 문자 기행> / 노성일/ 소장각 출판


 크메르 문자를 제대로 끄적여보지도 못했는데 씨엠립 여행은 어느덧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시기적으로는 위의 책을 읽은 게 씨엠립 여행 이후이지만, 흐름상 먼저 소개했다.) 타이 문자도 인터넷 강의까지 들어가며 겨우겨우 구색을 맞췄으니 고작 한 달이란 시간으론 크메르 문자를 대충이라도 익히기는 무리였다. 그렇게 크메르어 까막눈으로 씨엠림 여행을 해야 했으니 문자 덕후로서 여행하는 재미가 반감된 건 당연한 결과였다. 


아아... 읽을 수 없는 크메르 문자여... 문자 덕후로서 '까막눈' 여행은 기운이 빠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코르 와트는 잊지 못할 풍경을 선사해 주었다.


 시간은 흘러 흘러 2022년의 7월. 오후 타임에 근무하는 책방에서 <태국 문방구> 팝업 스토어를 진행할 때 해당 출판사의 책을 함께 큐레이션해 두었다. 책의 주제를 포괄하는 지역은 바로 동남아시아였다. 출판사 대표와 함께 매장을 지킬 때면 자연스레 책 이야기를 시작으로 동남아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좌충우돌을 겪으며 이번에 겨우 글자를 뗀 주제에) 태국의 꼬부랑글씨를 스스로 쓸 수 있게 된 경험을 이야기하다가 <크메르 문자 기행>까지 봤는데도 캄보디아의 꼬부랑글씨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았다고, 그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캄보디아는 아직 씨엠립 밖에 못 가 본 내게 대표는 프놈펜도 꼭 가보라고 권했는데, 그 권유에 이끌려 갑자기 크메르 문자를 향한 호기심이 솟구쳤다.  안 그래도「벌거벗은 세계사」 캄보디아 편을 보고 킬링필드의 아픈 역사가 잔재한 프놈펜을 언젠가 꼭 가볼 거라고 다짐했던 차였다. 어쩌면 그 사이에 새롭게 출간한 캄보디아어 교재가 있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인터넷 강의에서 사용할 요량으로 만들어진 교재가 한 권 보였다. 이번엔 강의까지 볼 여유가 없어서 책만 우선 구입했다. 



 이전 글에서 한 번 기억 속에 잠재된 지식을 다시 꺼내서 익힐 때 예전보다 수월하게 익힐 수 있었다는 경험을 이야기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끄적여 봤다고는 하나 일단은 크메르 문자의 생김새가 어떤지, 모음은 왜 두 가지씩 소리가 나는지 등의 기본적인 특징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 보니 의외로 진도를 쉽게 뺄 수 있었다. 엄연히 다른 언어이지만 크메르어에서 타이 문자로 계통이 이어졌기 때문에 태국어를 통해 익힌 패턴이 크메르어를 익히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초성+중성+종성'으로 글자가 만들어지는 구성도 우리말과 비슷해서 별다른 설명 없이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다리 자음'이라는, 받침과는 별개의 개념이 살짝 발목을 붙잡았다. 'ㅊ무어'(이름), 'ㅋ뇸'(나) 같이 자음이 연달아 나오는 경우를 일컬었다. 태국어의 거대한 벽이었던 성조가 캄보디아에 없는 건 천만다행이었다. 덕분에 '다리 자음'에서 살짝 발목을 잡혔지만 금세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만, 독립 모음이란 녀석이 나오더니 벌떡도 아니고 번쩍도 아닌 '번떡'이라는 이름도 희한하고 기능도 희한한 특수 기호가 범람하는 바람에 결국 뇌는 과부하에 걸리고 말았다. 인사말이라도 써 보고 싶은 마음에 이런 기호는 과감히 건너 뛰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게 아니니까. (마치 한글을 이제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 'ㄶ', 'ㄺ' 받침부터 배우는 것이랄까...) 그렇게 겨우 적어 볼 수 있었던 게 위 사진 속 문장이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까로나입니다.")


 잊을만 하면 한 번씩 꼬부랑 글씨를 배우는데 얼추 글씨를 다 떼면 계속 그 언어를 배우려는 텐션이 뚝, 떨어져 버린다. '언어' 덕후라기보다는 '문자' 덕후에 가까워서 그런가... 글자를 익히며 받은 탄력을 이어가지 않고 벌써 다른 꼬부랑글씨는 어떤 게 있는지 눈을 돌리고 있다. 점심 먹으면서 저녁 뭐 먹을지 고민하는 모습이 외국어를 공부하는 데도 적용되나 보다.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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