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독볶이 06화

폼 마이차이 콘 타이 크랍, 폼 뺀 콘 까올리 크랍

독.볶.이 - 독백으로 볶은 이야기 (5)

by Fernweh

독.볶.이

(5) 폼 마이차이 콘 타이 크랍, 폰 뺀 콘 까올리 크랍



[치앙마이행 비행기 안. 1m가 폭의 회색 커튼이 무대 중앙에 쳐져 있다. 왼편에는 비슷한 색감의 2인용 접이식 의자가 있다. 벽에 딱 붙어 있는 등받이는 성인 상반신과 맞먹는 높이다. 놓여 있는 의자는 승무원용 좌석 ‘점프시트’인데, 허리춤에 매는 승객용 안전벨트 대신 X자로 몸을 조이는 하네스가 장착되어 있다. 잠시 후, 좌석벨트 사인이 꺼지는 소리가 ‘띵’하고 울린다. 순항고도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방송을 하려고 점프시트 안쪽에 앉아 있던 주인공이 앉은 채로 왼손만 뒤로 뻗어 기내 방송 시스템인 PA의 수화기를 잡는다]


솬: "손님 여러분, 좌석 벨트 표시등이 꺼졌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류 변화로 비행기가 흔들릴 수 있으니 자리에 앉아 계실 때는 항상 좌석 벨트를 매고 계시기 바랍니다...."


[방송을 마치고 PA를 살포시 원위치에 둔다. 하네스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짜고짜 제가 기내 방송을 해서 놀라셨군요. 저는 4년간 항공사에서 객실 승무원으로 근무했습니다. 전혀 승무원처럼 안 보이는데 승무원으로 일했다고 하니 놀라는 눈치인데요. 아르바이트나 군 복무 시절을 다룬 1막, 2막이 단막이라면 이제부터 펼쳐질 3막, 승무원 시절의 에피소드는 ‘장막’이 될 겁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놀라시면 안 돼요. 상대적으로 근무 기간이 더 길었고 다양한 에피소드가 만들어질 수 있는 직종이어서 해드릴 이야기가 아주 많답니다. 여러분의 놀란 마음을 누그러뜨리고자 첫 에피소드는 ‘웃픈’ 에피소드를 준비했습니다. 태국 북부의 관광 도시인 치앙마이로 떠나는 기내로 저를 따라 들어와 주세요.


지금 이 비행기는 이륙 후 순항고도에 도달했습니다. 이날 제가 맡은 일 중의 하나는 기내 방송 업무였어요. 저희끼리는 ‘듀티’라는 단어를 써서 ‘방송 듀티’라고도 하는 업무입니다. 방금 좌석 벨트 표시등이 꺼졌다고 방송하던 톤이랑 지금 여러분께 건네는 말투가 다르다고 불평하진 마세요. 지금은 방송하는 게 아니니까요. 아, 한가롭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는데, 잠시만요.


[승무원이 일하는 공간인 갤리가 약식으로 차려져 있는 무대 오른편으로 간다. 넓은 트레이(쟁반)를 꺼내 그 위에 한 잔씩 따른 물을 가지런히 올려놓는다. 트레이를 절반쯤 채웠을 때 한 여승무원이 커튼을 조심스레 열며 갤리로 들어온다.]


여승무원: 오늘따라 물을 많이 찾으시네요. 28열까지밖에 못 갔어요.

솬: 두 트레이는 더 나가야겠네요. 다녀오시는 동안 카트 세팅해 놓을게요. 천천히 다녀오세요.


[새로 준비한 트레이를 들고 여승무원이 나간다. 주인공은 기내식 카트를 ‘끄응’ 하며 꺼내 가로로 돌려놓는다. 하얀 불투명 플라스틱 드로워(서랍)을 카트 위에 두 개 올리고 물, 주스 등의 음료와 종이컵, 냅킨 따위를 일사불란하게 담는다]


솬: 죄송해요. 하필 바쁠 때라 이것저것 하면서 썰을 풀어 드려야겠네요. 듀티는 사무장이 그 비행에 배정된 승무원의 연차, 자격 등을 판단해서 배정하는데, 보통 방송 듀티를 받은 승무원이 이렇게 갤리 업무를 주로 맡게 된답니다. 음, 제가 뭘 꺼내려고 했는데 뭐였을까요... 떠들다 보니 까먹었네요. 이렇게 멀티태스킹이 안 되는데 멀티태스킹 능력이 꼭 필요한 직무가 저희 업무거든요. 그래서 의도치 않게 허당의 면모를 자주 뿜어댔죠. 흐음, 드로워에 안 놓은 게 뭐가 있나...


[드로워를 살피는 도중, 여승무원이 빈 트레이를 들고 갤리로 복귀하는데, 고개를 푹 숙이고 웃음을 잔뜩 참고 있다]


여승무원: 무훌, 한... 트레이... 면 될 거 같... 으흐흥...

솬: 엥? 뭐가 그렇게 재미있나요?

여승무원: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흐흐흥...

솬: 에이, 뭔 일 있었구만.

여승무원: (화제를 돌리려고 괜히 목을 가다듬으며) 흠흠, 아닙니다. 그냥 갑자기 웃음이 터졌어요.

솬: 뻥치지 마요. 승객이랑 제 욕 했죠?

여승무원: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눈이 이미 휘둥그레졌다) 네? 아니에요. 욕이라니요.

솬: 농담입니다, 농담. 근데 왜 눈이 잔뜩 놀란 거죠? 수상한데...

여승무원: (다시 생각하니 웃겨 죽겠다는 표정으로) 아니, 그게 아니고, 욕은 아닌데... 아니에요, 말 못해요.

솬: 잉? 욕은 안 했는데 승객이 제 얘기를 한 건 맞죠? 뭔 말이길래 숨겨요. 괜찮아요, 저희야 뭐 진상 만나면 더한 말도 듣는 사람들인데, 고작 욕도 아닌 말 정도로 상처받진 않아요.

여승무원: 진짜죠? 진짜 괜찮으실 거죠? 뭐라고 하시면 안 돼요.

[주인공의 동공에 불안이 살짝 깃들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끄덕인다]

여승무원: 저기 30열 아주머니께서 남자 승무원이 방송을 너무 잘하신다면서... 한국어 발음이 되게 깔끔하고 좋다고...

솬: 뭐야, 욕 아니고 칭찬이네요. 숨길 이유도 없고 웃긴 구석도 전혀 없는데요.

여승무원: 그게 그러니까... (머뭇거리다가 마음을 굳힌 듯 이내 입을 떼며) 태국인 승무원이 어떻게 한국말을 저렇게 잘하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또 웃음이 터진다) 흐흐흥....


[조명 OFF. 커튼 앞에 선 주인공을 스포트라이트. 어둠 속에 놓인 여승무원은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있다]

솬: 방금 이 여승무원처럼 웃은 분들이 의외로 많네요. 그때 그 승객이 잘못 본 게 아니었나 봐요. 제가 태국 사람처럼 생겼다는 말에 공감했으니 웃으신 거죠? 뭐, 보다시피 제 얼굴이 전형적인 한국 사람이라고 하긴 힘들다는 건 저도 잘 압니다. 일단 전형적인 한국인 상이 어떤 건지도 감도 잡히지 않고요. 배우 중에 누가 있으려나... 이목구비가 뚜렷한 정우성 씨나 이병헌 씨는 그 뚜렷함 때문에 오히려 이국적인 외모 같네요.

요즘 MZ 세대가 좋아하는 젊은 배우 중엔... 젊은 남자 배우를 잘 몰라서 금방 떠오르진 않네요. 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 중엔 그나마 소지섭 씨가 한국적인 외모인 것 같아요. 어디까지나 제 주관적인 소견입니다. 어차피 제 외모가 이런 배우와 견줄 정도도 아니고, 사람 닮았다는 소리보다 공룡 닮았다는 소리를 더 많이 듣고 사는 터라 누가 봐도 한국 (끊어 읽듯 힘주어)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는 말에는 퍽 공감합니다.

아,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미리 말하자면 승무원이 웃은 건 승객이 아무런 의심도 없이 저를 태국인이라고 생각했다는 점 때문입니다. 태국 사람처럼 생겼다는 말을 듣고 웃은 게 태국인을 비하하는 인종 차별적 행동이 아니었음은 분명히 집고 넘어 갈게요. 태국인이라고 생각한 승무원이 한국어 방송을 한국인처럼 하는 모습이 신기한 나머지 다른 승무원 붙잡고 국적을 물어보기까지 한 그 상황이 웃긴 겁니다. 물론 여승무원도 제 외모에 태국 느낌이 있다고 공감했으니 빵 터졌겠죠. 희한한 건, 중국 비행을 가면 중국인이냐고 묻는 승객이 있었고, 일본 비행을 가면 일본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다는 거예요. 이 정도면 (오른손을 들어 V를 그리며) ‘이(2)’국적인 외모가 아니라 그야말로 다국적인 외모네요. 아, 이제 기내 서비스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라 잠시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뜬금없이 방송 톤으로)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스포트라이트 OFF 전체 조명 ON. 멈춰 있던 여승무원도 다시 움직이며 카트 한쪽을 잡는다. 주인공은 카트 반대편을 둘이서 천천히 카트를 끌고 커튼 뒤 객실로 나간다. 암전]


[갤리로 꾸며졌던 무대가 호텔 방으로 바뀌어 있다. 한 사람이 쓰기엔 꽤 널찍하다. 방에 들어선 주인공이 카드 키를 꽂자 주황빛 조명이 켜져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방 안쪽, 역시 일인용으로는 넉넉한 더블 침대가 놓여 있다.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무늬가 없는 짙은 갈색의 원탁이 있다. 원탁보다 조금 밝은 색감의 갈색 의자 두 개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원탁에서 두 걸음 더 걸어가면 ㄱ자로 벽이 꺾여 있고 그 너머엔 화장실이 있다. 주인공은 화장실과 원탁 사이 구석진 곳에 캐리어를 두고 목에 걸고 있던 아이디 카드를 원탁 위에 던지듯 놓는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가 곧장 몸을 일으켜 세운다]


솬: 별다른 일이 없어도 비행을 마친 뒤엔 자주 이렇게 지친답니다. 기본적으로 몸을 쓰는 일이니 육체 노동이고 비행 내내 안전과 서비스에 신경 써야 해서 정신노동도 동시에 하는 거거든요. 감정 노동이라고도 하죠. 치앙마이 현지 시간으로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이라 어서 씻고 자야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호텔 방을 보여드리는 이유는 이곳에서 엄청난 걸 발견했기 때문이에요. 아까 서비스를 핑계로 독백을 후다닥 끝내고 나가버려서 김새는 기분이셨죠? 이게 다 이 호텔 방에서 마주친 ‘그것’을 보여 드리기 위한 빅 픽처였답니다.


침대에 바로 풀썩 누우면 그대로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에요. 그랬다가는 머리는 왁스와 스프레이에 찌든 채, 얼굴과 몸은 땀과 습기에 찌든 채 잠드는 꼴이라 귀찮아도 샤워는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일어난 거죠. 꾸역꾸역 화장실로 가려다가 침대 앞에서 눈을 의심케 하는 ‘그것’을 보고는 발걸음을 멈춰야 했습니다. 아니,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고 해야겠네요. 침대 위에 걸려 있는 이거, 보이시나요? 사각형이라 귀신이 아니란 것쯤은 눈치채셨겠네요. 공포물이 아니다 보니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그것’의 정체를 밝힐 수 없다는 건 좀 아쉽군요. ‘그것’의 정체는 바로! (손으로 북을 두드리는 시늉을 하며) 두구두구... 그림 액자였습니다.

[핀 조명이 액자를 비춘다]


태국 사람을 그린 인물화인데요, 복장을 보아하니 그림 속 인물이 요즘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도대체 이 그림이 방금 전 비행 이야기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아하실 텐데요. 발을 아직 안 씻어서 침대 위에 올라가기 좀 그렇지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베개를 옆으로 밀고 그 위에 올라선다. 주인공이 액자 옆으로 얼굴을 들이댄다]

왜 그림 얘기를 하는지 아시겠나요? 저도 태국인처럼 생겼다는 말을 처음 들은 지라 제 얼굴의 어디가 태국인을 닮았는지 갸우뚱했는데요. 이 그림을 보자마자 왠지 모르게 제 얼굴이 겹쳐 보여서 화들짝 놀랐답니다. 좀 더 그림 속 인물에 가까이 가 볼게요. 이렇게 보니 닮은 구석이 있긴 있죠? 반달 모양의 눈썹, 아래로 길게 뻗치는 코, 적당히 옆으로 찢어진 눈. 입은 일부러 그림 속 인물처럼 앙다문 채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슬쩍 올려 보았어요. (셀카를 한 장 찍는다) 동기 단톡방에서도 태국인으로 오해받은 썰을 풀었는데요. 메시지만 가지고는 반응이 시원찮아서 방금 액자 옆에서 찍은 사진도 올렸답니다. 곧바로 ‘ㅋㅋㅋ’가 단톡방을 도배하다시피 했어요.

사실 그림 속 인물이 태국인의 전형적인 얼굴을 나타내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건 승객이 절 태국 사람으로 착각한 날에 체크인한 호텔 방에서 저와 묘하게 닮은 그림 한 점을 마주했다는 사실이죠. 기가 막힌 우연입니다. 다음날 시내에 나갔을 때 태국 사람들이 절 현지인으로 착각해 길을 묻기라도 하는 건 아닐지, 엉뚱한 상상까지 했다니까요. 그런 일을 대비해 이번 5막의 제목인 태국어 표현도 알아봤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폼 마이 차이 콘 타이 크랍. 폼 뻰 콘 까올리 크랍.
(전 태국인이 아닙니다. 전 한국인입니다.)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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