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볶.이 - 독백으로 볶은 이야기 (4)
[3장에 이어서 곧바로 조명이 환하게 ON. 왼편으로 나가던 주인공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치켜들고 켜진 조명을 바라본다. 잠시 고민하다가 쪼르르 무대 중앙으로 돌아온다]
솬: 당직 근무 얘기가 나온 김에 웃긴 해프닝 하나를 더 얘기하고 갈게요. 아, 조명 스태프가 실수한 건 모른 척해주시고요.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데 장황하기만 한 이야기의 대명사가 군대 이야기라는 걸 저도 잘 알기 때문에 또 군대 얘기를 하고 싶진 않은데요. ‘군 생활은 내가 제일 힘들었다’ 같은 그렇고 그런 이야기는 아니니까 잠시만 귀 기울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일했던 에피소드로 독백 에세이를 쓴다더니 왜 군대 썰을 두 개나 푸냐고요? 음, 장교 복무가 의무 복무의 일환인 건 맞는데, 어쨌든 월급 받고 간부로 (단어를 힘주어 말하며) ‘일’했으니까 그러려니 해주세요.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이 에피소드도 점호 때 생긴 일입니다. 12월 24일이지요. 크리스마스이브! 오라는 산타는 안 오고 당직 근무 차례가 와서 이 좋은 날 전 당직 근무를 서야 했어요. 저야 간부라서 영외 숙소에 살았으니 그나마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병사들은 생활관에 갇혀 나가지도 못한 채 갑갑한 생활을 해야 했죠. 크리스마스이브에도, 크리스마스에도. 지금이야 병사도 휴대폰을 쓴다지만 그땐 그러지 못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크리스마스 기분도 좀 내면 좋으련만... 답답한 군 생활은 그들의 마음도 메마르게 했답니다. 뭘 하면 저들의 답답함을 달래 줄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깨알 같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다음날이 크리스마스이기도 하고 저도 좀 피곤했던 터라 점호는 약식으로 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각 생활관을 돌아다니며 점호해야 했는데, 이날은 행정반에 있는 마이크로 ‘중앙 통제식 음성 점호’를 했습니다. 전달 사항을 다 하달하고 취침 준비를 한 뒤 10시에 불을 끄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관물대를 여닫는 소리, 화장실이 급하기라도 했는지 빠르게 바닥에 끌리는 슬리퍼 소리 등이 들려왔습니다. 아직 점호 안 끝났는데 누가 움직이느냐고 쓸데없이 엄포를 놓고서는 내일이 크리스마스인 만큼 점호를 색다르게 끝내겠다고 했습니다. 다시 조용해진 틈을 타 마이크를 잡고 입을 뗐죠.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중저음으로)
잘 자요.
맨 앞줄 앉으신 여성분들 설렌다는 제스처를 보여주셨는데요. 네, 알아요, 저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는 것쯤은. 가수 성시경 씨가 진행하던 라디오를 통해 유명해진 클로징 멘트라서 설렌 거죠? 정말로 잘 잘 것만 같게 만드는 마성의 목소리로 건넨 멘트죠. 물론 성시경 씨가 남성 팬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제 주변에도 성시경의 노래를 좋아하는 남자는 많아요. 근데 이 ‘잘 자요’하는 달달한 멘트에 방금 여성분처럼 반응하는 친구는 없습니다. 왜 그땐 이걸 생각하지 못한 건지... 하, 지금도 창피하네요. 제가 성시경 흉내를 내며 크리스마스이브를 달달~하게 마무리 짓는 ‘잘 자요’ 멘트를 날리면 ‘오~~’라거나 ‘아~~’라거나 내일 찾아올 크리스마스가 벌써 설렌다는 반응을 보일 거라고 착각한 거죠. 군대에서 맞는 크리스마스가 설렐 리가 있을 리가요. (옅게 한숨을 내쉬고) 아마 누군가 한두 명은 제가 들리지 않도록 작은 소리로 야유를 보냈을 거예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이 문장도 자주 소환되는 문장이죠. ‘잘 자요’가 먹혀들지 않는 감수성이 메마른 시공간에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으면 딱 거기서 멈췄어야 하는데, 오기가 생겼는지 다음 날 아침 점호 때 또 망측한 일을 벌이고야 맙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노래 한 곡을 튼다.)
아아아~ 돈 원 어 랏 포 크리쓰맛~. (I don’t want a lot for Christmas)
‘빠- 빰, 빠빠빰, 빠빠빠밤 빰빠라바밤 빰빰빰 빰빠라밤~’, 군대 다녀오신 분이라면 지금 군대 기상나팔 음악을 들어도 치가 떨리실 겁니다. 크리스마스의 영롱한 아침에 이걸 틀었다간 영롱함이 순식간에 사라질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핸드폰을 스피커에 연결해서 ‘크리스마스’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불후의 명곡,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를 기상 송(song)으로 틀었답니다. 단 하루라도 ‘사제’ 음악을 들으며 일어나면 기분 전환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시기적인 타이밍도 적절하니 크리스마스의 정취도 느낄 거라고 착각했습니다. 네, 이번에도 어김없이 착각이었어요. 저였어도 억지로 깨야 하는 마당에 기상나팔 대신 팝송이 나왔다고 덩실거리며 일어나진 않았을 겁니다. 무슨 생각으로 저 노래를 튼 건지... (다시 한번 옅게 한숨을 쉰다) 아침 점호를 위해 아이들이 집합해 있는 막사 앞으로 나갔습니다. 잠이 덜 깬 멍한 표정이었지만 제게 보내는 눈초리만큼은 유독 따가웠습니다. 크리스마스에도 군대에 갇혀 있는 자신들을 놀리는 거냐는 원망의 눈초리였을 거예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여 캐럴로 기상 송을 틀어 줬는데 반응이 이게 뭐냐고 괜스레 저의 민망함을 그들에게 전가했습니다. 친한 병장 몇몇이 얄궂은 표정을 지어 보이던 게 기억나네요.
제게 크리스마스의 악몽이 있다면 이 사건이 아닐까요? 감수성을 찾기 힘든 곳에서 감수성의 씨앗을 심어라도 보겠다고 용을 썼으니 악몽을 자초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저였습니다. 문득 군부대에서 기상 송으로 캐럴을 트는 광경은 누가 봐도 마초인 남자 둘이서 아기자기한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를 먹고 네일 숍으로 가서 나란히 앉아 손톱 관리를 받는 장면처럼 밑도 끝도 없이 어색하게 느껴지네요.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며 퇴장한다.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