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독볶이 03화

성덕, 그 자만의 대가

독.볶.이 - 독백으로 볶은 이야기 (2)

by Fernweh

독.볶.이

(2) 성덕, 그 자만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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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CD가 켜켜이 진열된 진열대가 무대 위에 미로처럼 놓여있다. ‘가요’, ‘POP’, ‘클래식’, ‘JAZZ’ 등이 적힌 패널이 군데군데 삐죽 솟아 있다. 전체 조명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무대 왼쪽 끝 기둥에 기댄 주인공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솬: 어서 오십시오. 이곳은 제가 대학생 때 일했던 코엑스 몰의 E*** 레코드입니다. 요즘은 음악을 디지털 음원으로 들으실 테니 아주 어린 분들은 이 CD라는 물건이 낯설 수도 있겠네요. 아, 아이돌 그룹 CD를 모은다고요? 최애 멤버의 포토 카드가 나올 때까지 CD를 산다는 분도 있네요. 리스닝 용도가 아닌 굿즈의 개념으로는 낯설지 않겠군요.


아날로그 감성으로 포장하려니 그런 감성은 LP에 더 잘 어울릴 테고, 듣는 용도로 제작이 됐으니 굿즈라고 못 박기도 참 애매하네요. 입지가 애매해진 이런 CD를 저는 참 좋아했답니다. 제가 중학생 때 MP3가 생겼는데, 그 후로는 번거롭게 CDP와 CD를 주렁주렁 들고 다니는 친구가 확 줄어들었던 기억도 나네요. 그래도 그때는 CD가 제 소기의 목적에 맞게, 즉 음악을 듣는 용도로 쓰이던 시절이었답니다.


저도 CD를 사기 시작한 건 아이돌 그룹 때문이었어요. 카리스마 최성희, 미의 여신 김유진, 사랑스런 유수영, 친구들과 S.E.S.! 요정들이 만들어내는 앨범을 하나씩 사 모으던 게 CD 수집이란 취미로 꾸준히 이어진 거죠. 그때는 해외 직구가 지금처럼 손쉽지도 않았고, 일본 음반이 국내 라이선스로 들어오기도 전이었는데, 고등학생 주제에 맹랑하게 수입 CD까지 사들이며 S.E.S.의 일본 앨범까지 모을 정도였습니다. 뭔가를 하나씩 수집해서 나만의 아카이빙을 구축하는 재미가 쏠쏠했어요. 한창때는 밖에서 밥 먹으라고 쥐여 준 용돈을 모아서 CD를 왕창 사기도 했답니다. 밥은 굶고 CD를 사다니요. 식탐이 줄어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이네요. 조금 전에 음악 학원에 다니려고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밝혔죠. 진짜 이유야 그렇다 치고, 어쨌든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으니 가요뿐만 아니라 다른 음악 장르에도 귀를 쫑긋 세우게 됐습니다. 해외 POP은 물론이거니와 클래식과 재즈까지 섭렵하려 했죠. 물론 고등학생의 주머니 사정이야 가벼울 건 뻔하고, 아르바이트로 번 돈은 학원비로 빠져나갔으니 CD를 원하는 만큼 양껏 사긴 힘들었어요. 그래도 CD를 살 때는 바로 이곳, 이 음반 가게를 애용했습니다. 코엑스에 놀러 가기라도 한 날에는 CD를 안 사더라도 여기 들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CD를 뒤적거리곤 했죠.


고등학교 때 했던 아르바이트가 ‘선택’ 사항이었다면 대학생이 된 후로는 ‘필수’ 사항이 됐습니다. 많은 동기가 학교 주변에서 아르바이트했는데 저는 일터에서 아는 사람을 마주치는 게 여간 반가운 게 아니라서 꼭 집 근처에서만 아르바이트를 구했답니다. 맞아요, 반갑다는 건 반어법이에요. 하하하.


(무대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며) 학교에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진 곳의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던 중 제 단골 음반 가게인 이곳에서 낸 공고를 발견했습니다. 유레카! 바로 지원했죠. 면접 때 제가 여기서 얼마나 많은 CD를 샀는지 어필했고 제 전략이 잘 먹혀 들어 당장 출근하게 됐습니다. ‘성덕’이라는 말은 근래에 만들어진 단어로 알고 있어서 그때 당시에는 단골 음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하게 되며 ‘성덕이 됐다’ 같은 말은 하진 않았을 거예요. 표현은 없었지만 어쨌든 성덕이 된 기쁜 마음으로 첫 출근을 했습니다.


매장에 들어서서 매니저에게 오늘부터 일하게 됐다고 인사를 건넸죠. 절 반갑게 맞이해준 매니저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간략하게 얘기해주고 함께 다른 직원들에게 찾아가 인사를 시켰어요. 그리고는 매장 내에 어느 장르가 어떻게 분류되어 있는지, 매대는 어떤 순서로 정렬되어 있는지 등을 본격적으로 설명해주려고 했습니다. 설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자신감이 가득 찬 어조로 전 이렇게 말했어요.


"저 여기 VIP예요!"

성덕이 되어 일한다는 기쁨에 충만한 나머지 노골적으로 저의 멤버십 등급을 까발렸습니다. 사실 일반 회원부터 실버, 골드, 이런 식으로 차례차례 등급이 올라야만 VIP가 되는 구조는 아니었어요. 워낙 옛날이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누적 금액이 10만 원만 넘어도 단번에 VIP가 되는 멤버십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CD 10장만 사도 10만 원은 훌쩍 넘으니 진작에 VIP가 되어 멤버신 할인을 포함한 여러 혜택을 누려왔습니다. 그걸 뽐내고 싶었는지 일하러 온 첫날, 볼썽사나운지도 모르고 VIP라는 말을 당당히 입에 올려버린 거죠. 매니저는 입과 눈을 ‘오’ 모양으로 만들며 놀람과 동시에 안 그래도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바빴는데 잘 됐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죠. 어떤 장르의 음반이 어느 코너에 있는지 다 알 테니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며 잘 부탁한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크게 어려운 일은 없었습니다. 입점 손님 응대라고 해 봐야 사려는 CD가 어디 있는지 묻는 정도가 다였죠. 간혹 도난 방지 태그를 붙이는 작업이나 포장 작업 같은 것도 했는데 단순노동이라 지루함만 견뎌내면 힘든 일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이 훌쩍 지났고, 이렇다 할 사건이 터지지 않았죠. 대신 제 자신감만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고 있었습니다. 돈이 오고 가는 중요한 자리이니 신입에게 시키지 않는다던 포스 업무를 입사 한 달 만에 인계받았기 때문이에요. 제가 VIP라서 혹은 능력이 출중해서 한 달 만에 중요 업무를 하게 된 건 아니었습니다. 오래 일했던 아르바이트생 한 명이 갑자기 그만두면서 그의 자리를 급한 대로 제가 채운 것이었죠. 우쭐댈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 우쭐거리는 자신감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건 자신감이 아니라 자만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중년 손님이 포스로 다가와 어떤 가수의 어떤 앨범을 찾고 있다고 물었습니다. 저는 처음 들어보는 해외 가수였어요. 후다닥 재고를 확인해 봤더니 1장 남아 있더라고요. 당당한 걸음으로 손님을 모시고 팝 음반 코너로 향했습니다.


[무대 중앙에 있는 매대로 빠르게 걸어간다. 매대 맨 위에 오른손을 툭 올리고 상품을 홍보하는 홈쇼핑 호스트의 톤으로 대사를 이어간다]



코너는 A부터 Z까지 아티스트 이름순으로 정렬돼 있었어요. 진열대 한 칸에는 10장 정도의 CD가 담겨 있었습니다. 칸 뒤쪽에 숨겨지듯 놓인 CD도 찾을 수 있게끔 아티스트 이름이 CD 케이스 위로 보이도록 제작한 인덱스도 사이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수의 이름이 달린 인덱스가 보이지 않았어요. 검지와 중지로 건반을 번갈아 누르듯 CD 더미를 뒤졌습니다. CD의 플라스틱 케이스가 탁탁 규칙적인 소리를 냈습니다. 분명 재고가 있었는데 실물이 보이지 않으니 그 탁탁 소리가 괜히 찝찝하게 들렸어요. 잠시 양해를 구하고 다시 포스로 가서 다시 한 번 확인했죠. 재고도 있고 장르 역시 재즈도 클래식도 아닌 정확히 ‘POP’이라고 적혀 있었죠. ‘이상하네’, 갸우뚱하며 손님에게 갔습니다. 같은 동작으로 같은 소리를 내며 CD를 찾으면서 이름순이라 이 칸에 있어야 하는데 도통 보이질 않는다고 말씀드렸죠.


아저씨는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대신 체념한 표정은 아니었죠. 기필코 그 음반을 사야 한다는 듯 제 옆에 나란히 서서 주변 칸의 CD를 하나씩 뒤지더라고요. 저도 가수 이름의 스펠링을 떠올려 보며 아까부터 한참 뒤적였던 칸을 또 뒤져 보았습니다. 아무리 뒤져도 그 음반만은 나오지 않아서 재고가 잘못된 것 같다고 말하려는 찰나, ‘찾았다’는 감탄이 옆에서 튀어나왔습니다. 조금 전 드리웠던 실망감이 싹 사라진 해맑은 표정으로 아저씨는 의기양양하게 찾아 헤매던 CD를 들고 있었죠. 그리곤 쓱 저에게 한마디 했어요.


"팔기 싫어서 숨겨 놓은 거예요? 허허."

허허, 인자한 웃음이었지만 저를 콕콕 찌르는 듯한 웃음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누군가 인덱스 배열을 잘못해서 있어야 할 칸이 아닌 옆 칸 맨 뒤에 CD가 숨어 있던 것이었어요. 아저씨 말마따나 팔고 싶지 않아서 숨겨 놓은 모양새였네요. 찾는 칸에 물건이 없으면 적어도 바로 옆 칸을 뒤져보는 시도라도 해야 했는데, 그깟 스펠링이 뭐라고, 인덱스가 뭐라고 고집스럽게 한 칸만 뒤진 나머지 뒤지게 쪽팔린 날이었습니다.


성덕이면 뭐하고 VIP가 무슨 대순가요. 잘못 놓인 재고 하나 찾지 못하는데. 이 매장을 잘 안답시고, 제 나름 여러 장르의 CD를 섭렵했답시고 자만에 빠져 허우적거려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주 단순한 논리죠. 알파벳 순으로 정렬한 가수 이름의 인덱스가 안 보인다. 그런데 재고는 있다. 그럼 다른 곳에 놓여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다른 직원에게 슬쩍 물어봐도 됐을 문제였죠. 그 직원이 CD를 옆 칸에 잘못 놓은 장본인이었다면 손님이 CD를 찾아내기 전에 저희 선에서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을 겁니다. 손님이 컴플레인한 것도 아니고 찾는 물건이 옆 칸에 있었을 뿐인 사소하기 짝이 없는 해프닝이었지만, 그날 저는 일을 마칠 때까지 얼굴이 후끈거렸답니다. VIP라고 뻐긴 걸 손님이 알 턱이 없는데도 자만을 떠는 제 낯짝이 만천하에 드러난 듯한 기분이었죠. 집으로 가던 중, 문득 매니저가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뭐가 어디에 있는지 ‘다’ 알 테니 설명하지 않겠다는 말이요. ‘다’ 안다는 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은 그저 자만일 뿐이죠. ‘대충’ 아는 걸 ‘다’ 안다는 착각이기도 하고요. 그때 VIP라며 우쭐대지 않고 졸졸 따라다니며 한 차례 설명을 들었으면 간혹 잘못 놓인 상품이 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설명도 들었을 수 있었겠죠.


음반의 시대가 저물고 음반 가게치고 규모가 컸던 이곳도 폐업하게 됐죠. 성덕과 VIP라는 함정이 자아낸 케케묵은 저의 자만도 함께 사라졌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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