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볶.이 - 독백으로 볶은 이야기 (6)
[김윤아의 ‘담’이 무대 위로 흐른다. "우리 사이엔, 낮은 담이 있어..."
무대는 5막에서 본 호텔 방과 흡사한 호텔 방으로 꾸며져 있다. 다만 침대 머리가 무대 뒤쪽으로 향하며 길게 놓여 있던 침대는 가로로 놓여 있고, 그 옆에는 얇은 파티션 하나가 세워져 있다. 파티션 너머에 작은 거실처럼 꾸며진 공간이 있고, 두 공간 사이에 작은 화장대가 놓여 있다. 유니폼을 입은 주인공이 그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을 보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다]
솬: (한숨을 크게 내쉬고) 이 머리를 어쩐담.... 제가 봐도 머리가 영 어색해서 여러분 앞에 서기가 꺼려지네요. 그렇다고 마냥 거울만 보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니 (의자에서 일어나며) 용기를 좀 내보겠습니다. (무대 중앙으로 나서며 관객을 향해 걸어간다)
여러분이 보기엔 어떠신가요? 포마드 왁스로 앞머리를 한껏 뒤로 넘겨봤는데요. 깔끔하고 단정한 헤어스타일로 비행에 나서야 하는데... 앞이고 옆이고 뒤고 소가 혀로 핥듯이 쫙쫙 눌러 붙였으니 깔끔하고 단정하다고는 할 수 있을까요? 근데 왜 화려한 무대 의상을 입고 동네 거리를 활보하는 기분이 들까요? 10분 뒤에 로비로 내려가야 해서 머리를 감고 다시 세팅할 수도 없어요. 이 상태로 갈 수밖에 없죠, 뭐.
영화 <늑대의 유혹>을 보신 여성분들 중에 우산을 쓱 들어 올릴 때 슬로우 모션으로 등장하는 강동원을 보고 ‘꺄아’, 탄성을 뱉으신 분이 이 자리에도 많이 계실 겁니다. 아니면 <뷰티 인사이드>에서 이진욱이 등장하는 장면도 여심을 설레게 하는 등장 신(scene)으로 유명하죠. 전 둘 다 영화는 못 보고 편집된 영상만 봤는데, 여자들이 설렐 법도 하더라고요. 뭐, 공감은 했어도 그 배우들에게 홀린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남자 배우 중에 유일하게 절 홀린 배우가 있습니다. 남자가 남자 배우한테, 특히 그 외모에 이토록 끌릴 줄이야... 그 배우는 제게 강동원이자 이진욱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배우는 아니고, 왕가위 감독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왕가위의 페르소나’ 중 한 명인데요. <중경삼림>, <화양연화>, <2046>. 같은 감독 영화는 아니지만 느와르 영화를 논할 때 빼놓아선 안 되는 <무간도>까지. 누군지 짐작하셨나요?
네! 맞아요. 양조위예요. 어린 분들은 마블 시리즈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서 빌런 역을 맡은 배우로 알고 계시겠네요. 사람을 홀리는 눈망울의 소유자로 워낙 유명한 배우입니다. 방금 언급한 영화에서 빌런 역을 맡았음에도 깊게 팬 우수 어린 눈망울 때문에 장르를 갑자기 로맨스로 만들었다는 웃지 못할 감상평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네요. 제가 그 마성의 눈망울에 폭 빠지게 된 건 영화 <중경삼림>과 <화양연화> 때문이었습니다.
두 영화의 공통점이라면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다는 점이 있겠네요. 배우의 마성에 홀렸지만 영화 자체도 너무 좋아서 잊을만하면 한 번씩 보곤 하는 영화입니다. 특히 여행 갈 때 꼭 태블릿에 두 영화를 담아갑니다. <중경삼림>에 나온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실제로 탔던 홍콩 여행 때도, <화양영화> 엔딩에 나오는 앙코르 와트를 드디어 가 봤던 씨엠립 여행 때도 하루의 마무리로 해당 영화를 봤습니다. 별거 아닌 경험 같아도 여행의 추억만큼 진한 여운을 남긴 인상 깊은 경험이었어요. 영화 속에 등장한 도시가 아닌 곳에서도 두 영화는 제게 짙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프랑스 남부의 아를(Arles) 여행 때 더위를 피해 숙소에 들어앉아 <중경삼림>을 보던 기억은 여전히 눈에 선합니다. <화양연화> 역시 영화의 배경이 아닌 도시에서 한 번쯤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방콕 비행 스케줄이 나왔을 때부터 일찌감치 <화양연화>를 보기로 작정했답니다. 영화를 보는 작정에서 그쳤어야 하는데, 무슨 작정으로 머리를 이 모양 이 꼴로 따라 한 건지... 팬심도 그 수준이 적당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날이었습니다.
팬심이 벅차오를 때면 동경의 수준에 이르기도 하죠. 그 배우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동하고 맙니다. 배우 지망생이라면 동경하는 배우의 연기를 닮으려 하고, 그저 배우의 이목구비를 빼다 박고 싶은 사람이라면, 조금 극단적인 경우일 수도 있는데, 그 얼굴이 되기 위한 성형수술을 받기도 하죠. 저는 배우지망생도 아니거니와 성형수술은 더더욱 할 생각이 없어요. 애초에 그의 전매특허인 우수 어린 눈망울은 성형으로도 얻기 힘든 눈망울입니다. 당장 따라 할 수 있는 거라곤 헤어스타일뿐이었죠.
<화양연화>에서 양조위는 시종일관 포마드로 정갈하게 쫙 넘긴 머리를 한 채 등장합니다. 그걸 바라보던 눈에 동경이 섞여 버려 귀국편 근무 때 ‘양조위 포마드 스타일링’을 하기로 결심하고 맙니다. 시내에 들렀다 호텔로 들어오던 제 손엔 결국 포마드 왁스 한 통이 들려 있었어요. 생전 포마드 제품을 써 본 적도 없으면서 무작정 양조위를 따라 하겠답시고 설친 결과물이 (오른손 검지로 머리를 가리키며) 바로 이 머립니다. 사실 한 번 쓱 발라서 머리를 넘겼을 때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하긴 했거든요. 그때 머리 감고 원래 하던 대로 스타일링하면 좋았을 것을...
(손목시계를 보고 살짝 놀라며) 앗, 이야기를 들려 드리다 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다른 크루들 마주치기가 이렇게 쑥스러운 적은 또 처음이네요. 아마 제 머리를 본 승무원들이 ‘음... 머리가... 음...’, ‘모... 못 보던 스타일이네요...’라며 말 끝을 자꾸 흐릴 것 같네요.*
뭐, 어쩌겠어요. 쑥스럽다고 비행을 안 갈 수는 없으니 로비로 가 보겠습니다. (문 앞에 미리 놓아 둔 캐리어를 끌고 무대 밖으로 나가며) 오늘따라 발걸음이 참 무겁네요.
* 당시 승무원들의 실제 반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