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독볶이 08화

여행은 그렇게 머무는 사이 생겨나는 틈에 있다

독.볶.이 - 독백으로 볶은 이야기 (7)

by Fernweh

독.볶.이

(7) 여행은 그렇게 머무는 사이 생겨나는 틈에 있다



[막이 오르기 전, 나탈리 콜(Natalie Cole)의 ‘L-O-V-E’ 노래가 흐른다. 1절이 끝날 즈음 음악은 FADE OUT. 곧이어 나지막한 음성이 깔린다]


« 여행은 도시와 시간을 이어주는 일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아름답고 철학적인 여행은 그렇게 머무는 사이 생겨나는 틈에 있다. » - 폴 발레리(Paul Valéry)


* 원문: un voyage est une opération qui fait correspondre des villes à des heures. Mais le plus beau voyage et le plus philosophique est pour moi dans les intervalles de ces pauses.


[무대 왼편에 서 있는 주인공 스포트라이트. 무대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주인공의 동선을 따라간다]

솬: 저랑 게임 하나 하시죠. 가위바위보를 할 거예요. 기본적은 룰은 설명할 필요도 없겠네요. 다만 여러분이 다수고 저는 혼자라서 룰 하나를 추가할 건데요. 오른손을 다 번쩍 들어주시고, 가위바위보로 저한테 지는 분은 그대로 손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제가 보자기를 냈는데 주먹을 내신 분은 손을 내리면 되겠죠. 제가 매의 눈이 아니라서 일일이 다 보지는 못하지만 양심껏 내려주시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 다섯 분이 남을 때까지 가위바위보를 할 거예요. 이 다섯 분께 방콕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소소한 선물을 드릴 겁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가위, 바위, 보!]


[핀 조명 OFF, 3초 뒤 전체 조명 ON. 비행기 맨 앞 좌석 앞 공간, 갤리에서 객실로 이어지는 통로에 한 여승무원이 서 있다. 왼손에 쥔 핸드폰에서 반주가 나오고 그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오른손에 쥔 PA가 마이크 대용이다. 배경음악으로 깔린 L-O-V-E의 2절을 이어 부른다]


솬: 운이 좋으시군요. 이번 비행은 바로 이벤트가 마련된 편수랍니다. 승객분께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드리기 위한 자리고, 보시다시피 그리고 들으시다시피 저희 팀은 노래를 불러드리는 ‘성악’ 이벤트 팀입니다. 이따가 저도 노래를 부르냐고요? 아뇨. 저는 이벤트를 진행하는 MC랍니다. 실망하셨다면 죄송하지만 제 노래 듣는 것보다 이분들 노래 듣는 게 훨씬 좋을 거예요. 노래 실력이 검증된 승무원들이니까요.

아까 가위바위보도 가창을 맡은 세 명의 승무원이 돌아가며 노래하는 사이사이를 짤막하게나마 채워주는 상품 증정 이벤트였어요. 그래서 방콕행 비행기를 탈 때 선물을 드린다고 말씀드린 거고요. 그러고 보니 포마드 스타일링한 것도 방콕행이고, 이번 에피소드도 방콕행 비행기에서 벌어진 일이네요. 방콕에 갈 때마다 이런저런 일이 많았나 봅니다. 갑자기 아찔한 생각이 들었는데요. ‘포마드 비행’과 이벤트 비행이 같은 편수였으면 동료들마저 말을 잃게 만든 요상한 머리 모양을 한 채 이벤트 진행을 해야 했겠죠. 휴우, 두 비행이 다른 편수인 건 천만다행입니다.

MC로서 이벤트 진행도 중요했지만 이벤트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멘트를 짓는 것 역시 중요했습니다. 이벤트가 있다는 걸 알고 예약한 상황이 아니고, 온/오프라인 공지를 통해 성악 이벤트가 있다고 고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깜짝 이벤트였어요. 어떤 이는 태국으로 가는 동안 한숨 푹 자려고 했을 수 있고, 출장이 목적인 분은 미처 다하지 못한 업무를 기내에서 하려고 했을 수도 있겠죠. 식사를 못 하고 탄 분은 일단 밥부터 먹고 싶었을 거고요. 즉, 이벤트를 하는 게 불편을 끼칠 수 있는 상황이라서 승무원이 노래를 부를 거란 걸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알려야 했습니다.

양해를 구하는 멘트를 섞어 정성껏 다듬은 이벤트 시작 방송을 하고는 안도할 수 있었습니다. 불만을 드러낸 승객이 없었거든요. 한 편의 비행이 한 장의 추억으로 남길 바란다는 멘트가 통한 건지 반응은 오히려 뜨거웠습니다. 잔잔한 멜로디에 맞춰 몸을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며 노래를 듣는 승객도 보였고, 조금 슬픈 느낌의 발라드곡이 나올 땐 눈을 꼭 감고 감성에 사로잡힌 승객도 있었습니다. 기내 안전 관련 퀴즈를 낸다고 하니 앞 좌석 주머니에서 기내 안전 브리핑 카드를 꺼내 정독했던 분도 기억나네요. 인형이 걸린 퀴즈가 나오자 꼬마 아이가 정답을 맞힐 수 있도록 승객과 저희 모두 한 팀이 되어 답을 유도해주기도 했어요. 따뜻한 비행이었네요.

모든 항공사와 승무원에게 ‘컴플레인’은 민감한 사안입니다. 이벤트와 관련된 컴플레인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였죠. 자려고 했는데 시끄럽게 웬 노래냐, 이런 걸 하면 한다고 미리 알려야 하는 거 아니냐 등 누군가 불만을 제기한다면 한두 개쯤은 족히 나올 수 있는 비행이었어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이벤트는 물 흐르듯 잘 흘러갔습니다. 그래도 전 이벤트가 시작된다고 방송할 때까지도 조마조마했답니다. 겉으로는 분위기가 좋았으나 나중에 홈페이지에 ‘노래한다길래 잔뜩 기대했는데 시끄럽기만 하고 별로였다’라며 트집 잡는 사람이 생길 수 있었으니까요. 이벤트를 잘하고도 찝찝하게 비행을 마무리하고 싶지 않아서 사무장과 협의 후 이벤트 종료 안내 방송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잠재적인 불만까지 잠재울 수 있는 멘트를 곰곰이 떠올리다가 적절한 문장이 떠올랐어요. 그렇습니다. 맨 처음 들었던 문장이요.

여행의 ‘틈’이 가장 아름답고 철학적이라고 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폴 발레리의 아포리즘 중 한 문장입니다. 지금 상황을 예로 들어 볼까요? 20시의 서울과 18시의 방콕. 지리적으로 공간은 떨어져 있고, 두 시간의 시차도 있습니다. 이러한 시공간의 차이를 이어주는 여행이 승객 입장에선 기내에 머무는 다섯 시간의 틈인 거죠. 그의 말처럼 철학적이라고 하기는 무리지만, 아름답게 머무를 수는 있는 틈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벤트 시간을 따져 보자면 다섯 시간 중 고작 이삼십 분밖에 안 되는 짧은 순간이지만, 머무는 틈에 추억 한 자락을 남기기에는 충분한 시간입니다. 특별한 추억 같은 비행 경험이 방콕에서의 일정까지 특별하게 만들어 주길 바란다는 멘트를 폴 발레리의 문장 뒤에 살포시 얹었습니다.

다른 이야기와 달리 너무 훈훈하게 마무리돼서 당황스럽다고요? 물 흐르듯 흘러갔다고 말했지만 사실 노래 부르는 파트만 그렇게 흘러갔어요. 당시 기내에는 태국인만 백 명 넘게 탑승하고 있었거든요. 인천공항으로 가는 내내 부랴부랴 영작(英作)을 해야 했습니다. ‘가위바위보’ 게임이나 이벤트 안내 등은 간단하게나마 작문했는데, 문제는 폴 발레리의 문장이었습니다. 태국 승객의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며 번역기를 돌리려고도 했어요. 근데 번역기로 번역하기엔 좀 마뜩잖아서 잊고 살던 온갖 영어 지식을 끌어내 문장을 지어냈답니다. 저 문장을 영어로 어떻게 번역했냐고요? 지금은 당연히 기억 안 나죠.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다) 그런데 ‘틈’이라는 단어를 ‘gap’이란 단어로 옮겼던 건 기억납니다. 불어 원문의 틈을 뜻하는 ‘앙떼흐발’(intervalle)은 비슷한 영단어가 있어요. 인터벌(interval)이요. 비슷하죠? 앙테흐발, 인터벌. 소리만으로는 완전히 별개의 단어 같지만 철자를 보면 유사성이 보입니다. 그런데도 왜 고집스럽게 인터벌을 안 쓰고 갭을 쓴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갭의 스펠링은 쥐, 에이, 피. 모음을 달리 읽는다면 갑이 되네요. 갑질에 취약한 서비스직에 근무하고 있어서 갑질의 ‘갑’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리다 갭이라고 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전혀 설명이 안 되니 갑갑하긴 매한가지...

[갑자기 전체 조명 OFF]


썰렁한 말장난이나 하고 있으니 조명 감독이 불을 다 꺼버렸... [갑자기 전체 음향 OFF]


* 이번 글의 포문을 열어 준 폴 발레리의 문장은 프랑스어 온라인 강좌를 맡게 된 곳에서 강사 소개 영상을 찍을 때 또 써먹었다. 내가 봐도 뭐 하나 얻어걸리면 참 잘도 우려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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