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볶.이 - 독백으로 볶은 이야기 (8)
솬: (음향이 다시 켜졌는지 확인해보며) 아, 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소리 들리시나요? 휴우, 마이크가 다시 켜졌네요. 실없는 농담 한다고 예고도 없이 조명도, 음향도 다 꺼버리는 냉철한 스태프들이군요. 이런 단호박 같으니라고... 조명 감독님, 불도 좀 켜 주세요. [조명 ON]
이벤트 비행 이야기가 나온 김에 비슷한 에피소드를 짤막하게 얘기해 볼까 합니다. 사전에 기획한 이벤트는 아니었지만, 방송만이라도 급조해서 들려드리는 경우가 간혹 있었거든요. 보통 전세기나 단체 승객이 탔을 때였어요. 인솔자가 요청한 적도 있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저희가 멘트를 날리기도 했죠. 그중 반응이 제일 뜨거웠던, 그래서 기억에 제일 남는 비행은 제주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OO고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탔던 비행이었습니다.
비행기의 후방은 다 학생들 차지였고 인솔자인 선생님들은 비상구 열에 앉았어요. 그 앞으로는 일반 승객이 탔습니다. 학교 측에서 한 대를 통으로 대절한 게 아니었다 보니 학생들이 탑승하는 순간부터 신경이 이만저만 쓰인 게 아니었답니다. 아니나 다를까, 뒤쪽부터 좌석이 하나둘 채워짐과 동시에 고등학생 특유의 시끌벅적함이 기내를 꽉 채웠습니다. 소음 관련 컴플레인이 하나쯤은 올라오겠다는 씁쓸한 예견을 팀원들과 주고받기도 했죠. 다행히 아이들이 다 탑승하고 나서 선생님 한 분이 대표로 엄포를 놓은 덕에 시끌벅적함은 일순 고요로 바뀌었습니다. 다른 승객도 있으니 조용히 하라고, 가만히 앉아서 한숨 자라고 매섭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주변에서 짐 정리를 돕던 저를 가리키더니 소란 피우면 남자 승무원한테 혼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답니다. 못 들은 척하고 제 할 일을 했지만 당황스러웠죠. 마치 떼쓰는 아이한테 엄마가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아저씨를 들먹이며 계속 떼쓰면 저 아저씨가 ‘이놈!’ 한다고 주의를 주는 걸 듣는 아저씨의 기분이었달까요?
잠시 가슴 아픈 기억을 떠올려 봅시다. 수학여행을 떠나는 아이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기는 쉽지 않죠. 애먼 승무원을 들먹인다고 해도요. 물론 제가 공룡상이라 몇몇 학생에겐 포악한 티라노사우르스처럼 보였을 수도 있어요. 근데 직업의 특성상, 미소를 장착하고 있어야 했으니 인상만으로 그들이 겁먹거나 하진 않았을 거예요. 제가 마동석처럼 체격이 크지도 않고요. 그들이 일순 잠잠해진 건 당시 몇 해 전에 벌어졌던 참사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조심스러운 추측입니다만... 제가 입사하고 얼마 후에 세월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터졌어요. 그 반향으로 교통수단의 안전에 관한 이슈가 엄청나게 부각됐죠. 늘 안전을 강조하던 항공사에서도 더더욱 안전을 강조하던 시기였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참사 직후 얼마 동안 수학여행 자체가 취소되었을 거예요. 한 계절이 지나고도 비행기나 배로 가야 하는 지역이 아닌 가까운 곳으로 수학여행을 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금방 조용해진 이유가 승무원이 서비스 제공자가 아닌 안전 담당자라는 인식이 그 어느 때보다 부각됐던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감히 짐작한 거죠.
이제 막 여행을 떠나는 시점에서 구태여 불미스러운 사고를 떠올릴 필요는 없겠지만, 아이들은 일말의 두려움을 품고 있었을 수도 있어요. 세월호 희생자의 대부분이 고등학생이라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선생님이 승무원을 가리키자 안전이란 화두가 떠올랐고, 마음속에 꼭꼭 눌러 둔 두려움이 감정선 위로 드러나며 들끓었던 흥분을 가라앉힌 거죠. 뭐, 그 선생님이 학생들 사이에서 무섭기로 유명한 선생님이었을 수도 있고, 원래 말을 잘 듣는 아이들이었을 수도 있어요. 말하고 나니 약간의 비약이 담긴 것도 같네요. 사사로운 욕심으로 이런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한번 해보고 싶었던 것뿐이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날 어떤 깜짝 방송을 해 줬는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봅시다.
걱정과는 달리 이륙 후에는 기내가 정말 잠잠했습니다. 거의 다 잠이 들었고 자다 깬 한두 명의 학생이 어쩌다가 마실 거를 요청할 뿐이었죠. 잠시 객실을 한 바퀴 순찰하고 오니 갤리에 여고생 셋이 여승무원과 조용히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중 한 친구가 수줍은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수줍은 필체로 ‘친절하게 맞이해 줘서 고맙다’는 쪽지를 건넸다네요. 쪽지에는 승무원이 꿈이라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별 건 없지만 구경이라도 시켜 주고 싶은 마음에 여승무원이 그 친구와 옆에 나란히 앉았던 친구 둘까지 갤리를 구경해보라고 불렀던 거죠. 뭐 이런 화기애애한 비행이 있나~ 싶은 순간, 말괄량이 같은 톤으로 이야기하던 한 아이가 제 가슴팍을 가리키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 펜 저 주시면 안 돼요?"
"이 펜이요? 아... 어쩌죠. 이거 여자친구가 사 준거라서... "
훅 들어온 고등학생의 맹랑함을 저의 뻔뻔함으로 훅 되받아쳤습니다. 왜 뻔뻔하냐고 했냐면요, 당시에 여자친구는 없었거든요. 하하. 그때 제 셔츠 왼쪽 주머니에 꽂혀 있던 펜은 카카오 프렌즈의 ‘콘’이라는 캐릭터의 얼굴이 달린 펜이었습니다. 송곳니 하나가 삐져나온 주둥이가 왼쪽으로 툭 튀어나온 악어 캐릭터죠. 악어와 공룡. 얼추 비슷하죠? 아까 말했듯 제가 공룡상이라 인상이 날카로워 보일 수 있는데, 다른 걸로 인상을 어떻게든 순화시키고자 귀여운 공룡 캐릭터가 달린 펜을 셔츠에 달고 다녔던 거죠. 제 분신과도 다름없는 펜을 학생이 탐내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있지도 않은 여자친구를 소환, 아니 ‘창조’해 버렸네요. 맹랑한 걸로 따지자면 제가 더 맹랑한 건가요? 잔뜩 실망하고 돌아서는 아이를 카카오 프렌즈 숍에 널렸다고, 기껏 해봐야 삼천 원일 거라는 말로 달래보려던 기억도 나네요.
그러는 사이 다른 승무원에게도 학생이 건네준 쪽지에 관한 소식이 전달됐습니다. 저희가 한 거라고는 평소처럼 탑승을 도운 것뿐인데, 고마움을 표한 학생의 용기에 저희도 화답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하기 방송에 ‘OO고등학교’를 언급하며 모두가 안전하고 즐거운 수학여행을 하길 바란다는 인사를 넣기로 했습니다. 마침 이날도 제가 방송 듀티여서 어떤 말을 넣을지는 오롯이 제 몫이 되었답니다.
방송문에 적힌 도착 안내 방송을 마치고, 아울러라는 부사를 던지고는 급조한 방송문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OO고등학교 학생 여러분’이라는 방송이 나오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일제히 ‘오오~’와 ‘와아~’가 뒤섞은 환호를 보내왔습니다. 이렇게까지 바로 반응할 줄이야... 환호가 잦아들길 잠시 기다려야 할 정도였어요. 잠잠해진 틈을 타 아무쪼록 수학여행을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건넸어요. 딱 여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 아이들이 고2였거든요. 수험생이 되기 전 마지막 수학여행이니 지칠 때까지 신나게 놀고 오란 말을 덧붙였습니다. 여행의 추억을 양분 삼아 다녀와서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하라는 지극히 꼰대 같은 말마저 덧붙였어요. 환호는 야유가 되었습니다. ‘우우~’와 ‘에이~’가 들끓는 야유요. 한마디라도 더 해주고 싶은 욕심은 결국 과욕이었던 거죠. 제가 학생이었어도 여행가는 마당에 다녀와서 공부 열심히 하라는 소리를 들으면 거센 야유를 보냈을 것 같네요. 근데 어쩌자고 저런 멘트를 덧붙인 건지...
이미 성인이 되고도 남았을 그때 그 OO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보내며 저는 물러가 보겠습니다.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