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볶.이 - 독백으로 볶은 이야기 (9)
[무대 중앙, 주인공이 뒤돌아선 채 서 있다. 그의 앞으로 승객들이 줄줄이 서서 내리길 기다리고 있다. 아직 통로 쪽으로 나오지 않은 창가 좌석 승객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성격이 급한 가운데 좌석의 승객은 몸을 기어코 S자로 꺾으며 선반 속 짐을 꺼내려 한다. 앞쪽 승객이 내리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걸 잘 안다는 듯 가만히 앉아 있는 이도 있다. 통로에 나와 있는 사람도 모습이 제각각인데, 주인공 바로 앞에 있는 한 승객은 화장실 문에 기대어 서 있고, 좌석 팔걸이에 대충 걸터앉아 핸드폰으로 뭔가를 부리나케 검색하는 승객도 보인다. 분주하게 제 할 일을 하는 승객과 달리 주인공은 뻣뻣하게 선 채 관객에게 뒷모습만 보여준다. 관객의 심심함을 달래려는 건지, 자신의 심심함을 달래려는 건지, 갑자기 고개를 뒤로 휙 돌리며 장난기 어린 말투로 대사를 한다]
솬: 늘 궁금했답니다. 도대체 제주도에 가는 사람은 왜 줄어들지 않는가? 김포-제주 노선은 웬만하면 거의 만석이거든요.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항공 노선 중에 김포-제주 구간이 포함되어 있으니 말 다했죠, 뭐. 편수가 많다는 건 그만큼 수요가 많다는 뜻이고, 오늘도 역시나 만석이었답니다. 기내를 꽉 채운 승객이 앞쪽에서부터 차례로 나가야 하니 뒤쪽 승객은 잠시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광경이 그 광경입니다.
전방 갤리에서 일하면 손님이 내릴 때 손님 한 분 한 분께 인사를 건네야 했을 텐데, 마침 오늘 제 자리는 후방 갤리여서 이러고 멀뚱멀뚱 있을 수 있는 거죠, 호호. 너무 좋아하는 거 티 냈나요? 앗, 잠시만요. 뒤쪽 손님도 슬슬 빠져나가기 시작했네요. 맨 뒤 손님을 졸졸 따라 나가보겠습니다.
나가면서 놓고 간 짐은 없는지, 기내 안전에 저해되는 사항이 있는지 확인하는 업무를 해야 하거든요. 짐을 두고 내리는 경우야 비일비재해요. 관객분 중에서도 한 번쯤 비행기에 뭘 놓고 내린 분도 꽤 있을 거고요. 그런데 안전에 저해되는 사항이라니, 뭔가 섬뜩하죠? 쉬운 예를 들어 드릴게요. 좌석 밑에 있는 구명조끼를 들고 나가는 경우도 이러한 케이스랍니다. 실제로 여름철이면 간혹 이런 일이 벌어져요. 제주도에 온 김에 실컷 물놀이하겠답시고 비행기에 있는 구명조끼를 가져가더라고요. 만약 승무원이 이걸 발견하지 못했는데 다음 비행 때 물 위로 비상 착륙해야 한다면? 내 자리에 구명조끼가 없다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하시죠? 이런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여분의 구명조끼를 탑재해 놓긴 합니다만, 한 명의 무지(無智)로 말미암은 일이 누군가의 목숨을 해할 수 있는 무지하게 위험한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네요. 말이 길어진 사이에 많이들 내리셨군요. 저도 계속 따라 나가볼게요. 어? 시바 새끼!
[제일 늦게 내리고 있던 승객이 방금 대사를 듣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주인공을 노려본다. 당황한 주인공도 거세게 손사래 치는 것으로 승객에게 욕한 게 아니라는 뜻을 전달한다. 부랴부랴 자초지종을 하는데, ‘시바 새끼’, ‘귀여워’ 같은 말이 관객에게도 어렴풋이 들린다. 이내 승객은 한 번 웃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 갈 길을 간다]
방금 보셨나요? (멀어져 가는 마지막 하기 승객을 조심스레 가리킨다. 정확히는 그녀가 맨 가방을 가리키는데, 백팩 한 가운데에 둥글고 볼록하게 튀어나온 투명 창이 보인다) 요즘 반려동물 키우는 분들이 저런 이동장을 많이 쓰더라고요. 우주복의 헬멧을 본떠 만든 창이 가방 한 가운데에 볼록 솟아 있는 이동장이요. 반려견이나 반려묘 동반 승객 중에 저 가방 쓰는 사람이 꽤 있더라고요. 기내에선 반려동물은 규정상 케이지에 넣어 앞 좌석 밑에 두어야 합니다. 아무래도 사방이 다 막힌 케이지보다는 집사가 보이는 저런 가방에 있으면 아이들이 덜 불안해하겠네요. 그래서 이 제품이 은근히 인기가 많은 것 같네요. 이동 시에는 방금 저 손님처럼 등에 메고 다닐 수 있으니 꽤 실용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덩달아 저처럼 귀여운 동물을 보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에게는 아주 바람직한 디자인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투명한 창 덕분에 안이 훤히 보이잖아요. 제가 아까 얼떨결에 말실수 아닌 말실수를 하게 된 이유기도 합니다.
‘시바 새끼’라고 했다고 진짜로 승객한테 욕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길 바랍니다. 시바 새끼의 정체를 벌써 파악하신 분도 계시네요. 네, 말씀하신 견종이 맞습니다. 시바견이요. 그리고 우리말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짐승을 ‘새끼’라고 일컫죠. ‘열여덟 아이’를 속되게 일컫는 표현을 쓴 게 아니라는 게 이렇게 증명이 되네요. 하하.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가방 속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깥을 기웃대던 녀석은 새끼 시바견이었습니다. 귀여운 생김새와 몸짓에 저도 모르게 그만 ‘시바 새끼’를 외친 거죠.
이건 TMI인데요, 제 최애 견종이 시바견이랍니다. 안 그래도 좋아하는 종인데, 심지어 그 귀여움이 수십 배에 달하는 새끼였으니 ‘시바 새끼’가 절로 튀어나와 버렸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다짜고짜 시바새끼라고 외쳤으니 자기 강아지가 새끼 시바인 걸 인지하고 있는 견주분마저 당황할 수 밖에 없었겠죠. "오, 시바견 아가랑 같이 오셨군요. 엄청 귀여워요.", 이런 식으로 차분히 풀어서 말을 걸어야 했는데 말이죠. 그분이 진짜 욕으로 오해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귀여운 (천천히 힘주어 말한다) 시. 바. 새. 끼. 때문에 큰일날 뻔한 해프닝이었습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발음을 좀 세게 했지만 이번에도 욕한 건 아니니까요. 전 그럼 못다 한 제 업무를 하러 가보겠습니다.
[도망치듯 무대 뒤편으로 나간다.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