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독볶이 12화

휠체어와 코딱지 (2)

독.볶.이 - 독백으로 볶은 이야기 (10)

by Fernweh

독.볶.이

(10-2) 휠체어와 코딱지



*휠체어와 코딱지 (1)에 이어짐


솬: 상대를 당황하게 만든 단어에 얽힌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엔 상대를 웃음 짓게 한 단어에 관해 이야기해볼게요. 이 비행기는 지금 후쿠오카로 가고 있는데, 아이고, 아이가 울음이 터졌네요. 중간중간 옹알이처럼 짧은 단어를 하는 걸 보니 갓난아이는 아닌 것 같아요. 우는 아이를 그치게 하는 저만의 비법이 있답니다. (등 뒤에서 미리 준비한 소품을 꺼내며) 특별할 거 없는 종이컵이죠. 근데 뚜껑이 덮여 있답니다. 귀마개 두 개를 안에 넣고 뚜껑을 닫은 건데, 이걸 흔들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딸랑이처럼 활용할 수 있어요. 우는 아이를 달래려고 써먹어 본 방법 중엔 제일 효과적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울음을 그치지 않는 모양이니 이걸 써먹으러 가볼게요. 갓난아이는 아니라서 좀 애매한 구석은 있지만,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승객 좌석의 뒷부분이 보이는 무대 뒤편으로 향한다. 딸랑이를 흔들자 아이가 울음을 금세 멈춘다.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물건에 호기심이 생겼는지 아기는 달라는 듯 손을 쭉 내민다]

솬: 갓난아이가 아니라면 보통은 아까처럼 종이컵을 달라고 하더라고요. 손에 잡자마자 조물조물 만지다가 뚜껑을 벗기고 귀마개를 꺼내서 가지고 놀다 떨어뜨리곤 한답니다.

[다시 칭얼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잠깐 관심을 돌릴 수는 있어도 호기심이 사라지면 다시 우는 경우도 다반사랍니다. 그래서 이걸 써먹기엔 조금 애매하다고 말씀드린 거죠. 밤 비행기라 주변 승객 대부분이 주무시고 계시고 아이어머니도 지쳤을 테니 잠시 갤리로 모셔와야겠어요.

[다시 무대 뒤편으로 가서 아이를 안은 어머니를 모시고 갤리로 돌아온다. 어머니를 오른편 점프 시트 안쪽에 앉힌다. 어머니는 앉자마자 지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바깥쪽 점프 시트에 아이를 살포시 앉힌다. 주인공이 물을 한 잔 따라드리자 승객이 ‘아리가또고자이마스’라고 답한다]


그나마 탁 트인 공간에 오니 울음이 그친 걸 보니 아무래도 아이가 좁은 곳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짜증 났나 보네요. 아이 눈에 신기해 보이는 것들이 많은지 눈동자를 바쁘게 굴리고 있는데, 그 모습이 퍽 귀엽네요. 칭얼대지 않으니 일단은 안심입니다. (왼편 바깥쪽 점프 시트에 앉으며) 아이도 어머니도 객실의 승객들도 편히 쉴 수 있으니까요.


[한창 이곳저곳을 구경하던 아이가 고사리 같은 검지를 추켜세우더니 코를 후빈다]

엄마: 아, 다메, 다메. 키따나이요. (아, 안 돼, 안 돼. 지지야 지지)


[말릴 틈도 없이 코로 들어갔다 나온 검지에는 말마따나 코딱지만 한 코딱지가 묻어 있다. 옆에서 주인공이 일본인 특유의 리액션을 흉내 내며 ‘에~?’ 하면서 아이를 바라본다. 끝을 올리며 길게 끄는 주인공의 목소리에 반응했는지 아이는 코딱지 묻은 손가락을 주인공 쪽으로 뻗는다. 반사적으로 아이를 향해 펼친 주인공의 왼손바닥에 아이가 코딱지를 묻힌다]


솬: 고레, 프레젠토? (이거, 선물이야?)


[놀란 어머니가 아이의 손을 낚아채려다 주인공의 말에 피식, 웃는다. 아이도 코딱지를 묻힌 행동이 재미있었던 건지 방긋 웃고 있다. 둘은 이 상태로 멈추고 핀 조명이 주인공만을 비춘다. 다른 조명은 DIM]



‘휘루 체-아’가 상대를 당황하게 한 단어였다면, 조금 전의 ‘프레젠토’는 상대를 웃음 짓게 만든 단어랍니다. 선물을 뜻하는 영단어 ‘PRESENT’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단어죠. 차용어 그대로 이렇게 발음된답니다. 어떤 단어는 휠체어 대신 ‘구루마이스’라는 일본식 표현을 쓰고, 어떤 단어는 영어를 그대로 쓰고..., 이거 참 까다롭네요. 우리말도 마찬가지겠지만요. 아무튼, 아이와 어머니의 표정이 보이시나요. 아이 엄마가 잔뜩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데요.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문화가 사회 전반에 넓게 퍼져 있는 일본에서 온 승객이라 큰 민폐라도 끼친 것처럼 놀란 표정이네요. 그래도 그걸 민폐로 받아들이지 않고 선물이냐고 재치 있게 반응한 덕에 잔뜩 지쳐있던 엄마 얼굴에도 잠시나마 미소가 퍼지는 걸 볼 수 있었어요. ‘프레젠토’를 알아듣진 못했겠지만, 아이는 아이대로 이 상황을 재미난 놀이처럼 느낀 것 같고요. 설마 아기가 악의를 담아서 코딱지를 제 손에 묻혔다고 생각하는 분은 없겠죠? 아기 입가에 미소가 퍼진 걸 보니 적어도 비행기가 착륙할 때까지는 다시 울지 않을 것만 같네요.


(무대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며) 지금까지 일본행 비행기에서 일본어 때문에 벌어진 이야기를 들려 드렸는데요. 이참에 여러분도 본의 아닌 말실수로 상대방을 당황하게 한 단어나 별 뜻 없이 건넸는데 상대의 호감을 산 단어를 떠올려 보시는 건 어떠실까요?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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