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볶.이 - 독백으로 볶은 이야기 (10)
[무대는 다시 갤리의 모습으로 꾸며져 있다. 조명은 무대 왼편에 놓인 점프 시트만 비추고 있다. 그곳에 점잔 빼며 앉아 있는 주인공이 나긋나긋한 말투로 독백을 시작한다]
솬: 상대가 뱉은 단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뭔 말을 하려는 건지 갸우뚱하게 만드는 단어가 있습니다. 때로는 그저 툭 뱉은 단어 하나인데 상대방을 방긋 웃게 만드는 단어가 있기도 하죠. 전자와 후자의 공통점이라면 그다지 어려운 단어가 아니었다는 것이겠네요. 아, 공통점이 또 있어요. 둘 다 일본어 단어였습니다. 네, 일본으로 비행 갔을 때 벌어진 두 해프닝을 이 장에서 한 번에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잠시만요, 일본 승객 한 분이 절 찾으셔서 응대하고 올게요.
[무대 왼쪽 끝까지 가서 자세를 낮추고 승객의 말을 듣는다.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거나 ‘하이’ 하고 대답한다. 응대를 마친 후, 조종실을 호출해 뭔가를 요청한다]
방금 손님께서 컨디션이 안 좋으셔서 내릴 때 휠체어를 탈 수 있냐고 물어보셨어요. 지상과 연락이 닿을 수 있는 조종실에 연락해서 휠체어를 준비해 달라는 요청을 지상으로 전달해 달라고 했답니다. 한 이십 분 후면 오사카에 도착하겠네요. 그럼 전 슬슬 착륙 준비를 해야 해서 잠시 일 좀 하고 올게요.
[조명 OFF. 비행기가 착륙하는 소리. 바퀴가 활주로에 미끄러지는 소리와 ‘우우웅’하고 울리는 비행기 엔진 소리가 이어서 나다가 점점 줄어든다. 그 소리 사이사이 기내 방송이 작게 들린다. 방송이 멎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엔진 소리도 꺼진다. 조명은 반 정도만 ON. 점프 시트가 있던 자리에 활짝 열린 비행기 출입문이 놓여 있다. 웅성거리는 소리, 발걸음 소리, 봉투 따위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백색소음처럼 번진다. "안녕히 가십시오.",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같은 인사가 간간이 들린다. 이윽고 조명이 완전히 켜지고 소리는 완전히 멎는다]
솬: (출입문을 빠져나오며 문 앞에 서 있던 지상 직원에게 말을 건다) "아노, 시쯔레이시마스가..." (대사를 일본어로 해서 당황했냐는 짓궂은 표정으로 관객을 바라보며) 걱정 마세요. 여러분께 들려드리는 독백은 우리말로 할 거니까요.
어차피 일본어를 원어민처럼 유창하게 하지도 못해요. 어느 정도의 소통만 가능하답니다. 이 ‘어느 정도’라는 애매한 일본어 실력 때문에 맨 처음 말씀드린 상황 중의 하나가 펼쳐지고 맙니다. 지상 직원이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당최 이해하지 못했거든요. 일단 요청했던 휠체어가 보이지 않았다는 게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휠체어 승객은 보통 맨 마지막에 내리기 때문에 다른 승객이 다 내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죠. 그 승객은 일행과 함께 아직 기내에서 기다리고 계셔요. 그래서 다른 승객이 다 내리기 전에 지상 직원에게 휠체어가 어디있냐고 물어보려 한 거죠. 이날 팀원 중에 일본어를 그나마 할 줄 아는 게 저뿐이라 제가 나설 수밖에 없었어요. 고작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실력으로 나섰다가 곧바로 큰코다친 건데, 직원에게 건넨 질문 중에 가장 핵심 단어인 휠체어를 제멋대로 말해 버리는 실수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로 휠체어는 영어 단어 그대로 쓰니까 일본어도 그렇게 말하면 될 거라고 착각한 게 화근이었어요.
제 나름대로 일본식 발음을 떠올리며 ‘휘루 체-아’라고, "저기 실례합니다만, ‘휘루 체-아’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직원이 갸우뚱하는 걸 보고 ‘휘루 체-아’가 지금 없냐고 문장을 좀 더 쉽게 다듬어 재차 물었습니다. 있지도 않은 단어를 만든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녀는 ‘스미마셍’이라며 다시 한번 말해달라는 표정으로 절 바라봤습니다. 문득 휠체어의 발음이 ‘휘루 체-아’가 아닐 거라는 쓸데없는 직감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맥도날드가 ‘마꾸도나루도’, 패밀리마트가 ‘화미마-‘로 통용되는 곳이 일본이니까요. 일본어의 영어 발음을 비하하려는 건 아니니까 곡해하지는 마시고요. 아무튼, 그 짧은 찰나에 저는 ‘휠체어’ 발음을 더 괴상하게 비틀고야 맙니다.
"후이루...치아?" "휘루- 체...오?", 이런 식으로요. 만국 공통어인 보디랭귀지라도 섞었으면 몸짓으로 알아차렸을 수 있었을 텐데... 입만 산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있지도 않은 일본어 단어를 입으로만 뻐끔거렸으니 상대가 당황할 만했죠. 그때 마침 다른 지상 직원이 저희를 향해 걸어왔습니다.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어요. 그녀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휠체어를 밀고 왔거든요! 휠체어를 가리키며 ‘저거요, 저거!’라고 외쳤죠. 그제야 저는 그녀의 입을 통해 잊고 있던 일본어 단어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답니다. ‘구루마이스’. 직역하자면 ‘차 의자’ 정도인데, 바퀴가 달려 굴릴 수 있는 의자니까 휠체어, 굉장히 직관적인 단어네요. 영어를 일본어 발음으로 차용해서 말할 거라는 망령에 사로잡혀 어떻게든 휠체어를 일본식으로 발음하려던 것 자체가 잘못된 접근이었습니다. 영어 발음 그대로 ‘wheelchair’라고 물을 걸 그랬어요. 공항 직원이니 휠체어 같은 간단한 단어는 영어로 해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테니까요.
여기 이러고 있기에 너무 창피하니까 아까 그 승객 부축 좀 해 드리러 가야겠네요. (휙 돌아서다 말고 다시 관객석을 바라보며) 아, 나중에 찾아본 건데요, 휠체어를 일본식 발음으로 말하기도 하더라고요. ‘호이루 체-아’라고요. 어쨌거나 제가 막 던져 본 발음인 ‘휘루 체-아’, ‘후이루 치아’, ‘휘루- 체오’는 틀린 추측이었네요.
[주인공은 문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 동시에 조명 서서히 OFF. 조명이 완전히 꺼지고 5초 후 다시 서서히 ON. 출입문이 있던 자리에 다시 점프 시트가 놓여 있다. 객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점프 시트가 하나가 더 있다. 아이의 우는 소리가 뒤편에서 관객석으로 넘어오듯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