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독볶이 13화

고해성사 - 서류는 써 드릴 수 없습니다

독.볶.이 - 독백으로 볶은 이야기 (11)

by Fernweh

독.볶.이 - 고해성사

(11) 서류는 써 드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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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 ON. 하얀 테이블 양쪽에 승무원이 두 명씩 마주 보고 앉아 있다. 테이블 위에 그들이 오늘 탑승할 항공기의 도해도가 펼쳐진 매뉴얼이 올려져 있다. 여러 모양과 크기의 노트나 프린트물 따위가 나란히 놓여 있다]


사무장: 후쿠오카 다녀오는 짧은 비행이지만 안전 관련 사항은 늘 숙지해주시고, 아, 업무지시 새로 올라온 거 다 확인하셨죠? 승객 서류 써 주지 말라는 지시였습니다. 뭘 써야 하는지 모른다거나 쓰려는 단어가 영어로 뭔지 물어본다거나 하는 분을 도와드리는 건 괜찮지만, 승무원이 대신 펜을 잡고 직접 써 주지 말라는 내용이었어요. 당연한 이야기이긴 한데, 다른 비행에서 뭔가 문제가 있었는지 업무지시까지 내려왔네요. 오늘 브리핑은 이것으로 마칠게요.


[주인공을 제외한 승무원이 일사불란하게 짐을 챙겨 무대를 빠져나간다. 전체 조명 DIM, 핀 조명이 주인공을 비춘다]


솬: 승무원은 비행기에 오르기 전, 이렇게 브리핑을 하면서 오늘 비행을 위해 상기해야 하는 점이나 새로 갱신된 공지사항 같은 것을 공유한답니다. 주로 기내 안전과 서비스에 관해 리마인드하는데, 오늘은 새로 올라온 업무지시가 하나 있었어요. 자리에 계신 분 중에서도 해외여행 다녀오며 입국 서류 작성에 애를 먹었던 분이 계신가요? 지금 들려드릴 이야기도 서류 때문에 불거진 일이었습니다. 근무를 마치고 나서 제 얼굴마저 붉어진 일이었고요. 조금은 부끄러운, 마치 제 치부를 드러내는 듯한 이야기라 무교인 주제에 감히 부제를 고해성사라고 달았습니다. 일단 저도 짐 챙겨서 가 봐야겠어요.


[주섬주섬 짐을 캐리어에 담고 무대를 빠져나가려다 캐리어 앞주머니에서 얇은 책 한 권을 꺼내 관객에게 보여준다]


솬: 얼마 전에 산 <시인 할머니의 욕심 없는 삶>이란 책인데요. 이따 비행 중에 들려드릴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책이라 지금 미리 보여드리고 갈게요.


[다시 책을 집어넣고 후다닥 무대를 빠져나간다, 조명 OFF]


[좁은 통로가 무대 한 가운데를 가로지른다. 양옆으로 비행기 좌석이 세 개씩 놓여 있다. 60대 후반의 여성 승객들이 앉아 있다. 다 같은 일행인지 주전부리를 나눠 먹으며 담소를 나누거나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돌려 보곤 한다. ‘시골 아주머니’라고 하면 쉽게 떠오르는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우선 헤어스타일은 같은 미용실에 다니는 듯 제대로 볶아낸 뽀글뽀글 펌 스타일이다. 뒷모습만 보자면 한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흡사한 스타일이다. 단조로운 헤어스타일과 달리 옷차림은 각자의 취향과 개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화려한 꽃 패턴이 잔뜩 들어간 카디건이나 조끼를 걸쳤는데, 살짝 촌스러워 보이지만 어딘가 친근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운데 통로로 주인공이 등장한다]


솬: 실례하겠습니다. 세관신고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승객1: 이게 뭐여라?

솬: 입국하실 때 세관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입니다.

승객2: 우리는 뭐 신고할 것이 없는디?

솬: 신고할 물품이 없으셔도 (서류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여기, ‘없음’ 란에 표시하시고 제출하셔야 합니다.

승객3: 한국 사람이 한국 땅을 들어가는데 뭔 종이 쪼가리를 써야 한댜?

솬: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쵸, 다른 나라 가는 것도 아닌데... 번거로우시더라도 작성 부탁드리겠습니다. 세관 통과할 때 이 서류 안 내면 나가실 수가 없어요. 지금 안 쓰셔도 어차피 그 앞에서 서류 써야 해서 미리 써 두시면 이따가 더 빨리 수속 마치실 수 있으세요.

승객4: 아이고, 우린 이런 거 몰러. 총각이 써줘.

승객5: 그랴, 총각이 써 주면 되겠구만.

솬: 죄송합니다만 서류는 제가 대신 써 드릴 수가 없어요... 쓰는 게 어렵지는 않거든요? (서류의 작성 항목을 하나씩 보여주며) 성함, 생년월일, 여권번호, 주소 쓰시고, 신고할 물품 없는 경우에 이 네모 칸은 다 ‘없음’에 체크하면 됩니다. (주인공 기준 왼쪽 좌석 주머니에서 기내지를 꺼내 서류 작성 예시가 적힌 페이지를 펼친다. 주머니에서 펜 두 자루를 꺼내 왼쪽과 오른쪽에 하나씩 나눠드리며) 펜도 하나씩 준비해 드릴게요. 여기 서류 작성 예시 보면서 작성해 보시고 잘 모르시는 부분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승객6: 거참, 그렇게 간단한 거면 그냥 써줘도 되는 거 아잉교?

솬: 승무원이 직접 써 드릴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죄송합니다. 궁금하신 사항 생기면 말씀해 주세요.

[조명 OFF, 관객 쪽으로 두세 걸음 걸어 나오는 주인공에게 핀조명 ON]


솬: 아주 가끔 이렇게 서류를 대신 써 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답니다. 2년 전쯤었나, 돋보기안경이 없어서 글씨가 안 보이신다는 할아버님 서류를 써 드린 적이 있어요. 근데 방금 어머님들은 노안 등의 이유로 부득이하게 대신 써 드릴 상황이 아니라서 정중하게 부탁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어요. 오늘 새로 올라왔던 업무 지시 기억나시나요? 서류를 써주지 말라는 지시였죠. 들어보니 이 건이 생각보다 큰 문제가 될 뻔했다고 하네요. 중국 어느 도시에서 제주로 오는 전세기였는데요, 중국 비행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선 말씀드려야겠군요.


중국인을 모객하여 제주로 오는 전세기였습니다. 즉, 승객 모두가 중국인 단체 승객이었죠. 단체 승객은 여행사에서 일괄적으로 승객의 입국 서류를 관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약자 정보, 숙소 정보 등은 아예 서류에 적어 오고, 추가로 적어야 하는 내용만 기내에서 적던 모습을 자주 봤어요. 방금 보셨듯 한 분 한 분께 서류를 나눠 드릴 필요가 없는 거죠. 중국 전세기는 중국어 가능자 승무원이 가이드한테 서류 작성이 완료됐는지 확인하는 정도로 서류 작성 안내 절차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문제가 생긴 편에서는 여행사에서 서류를 준비하지 않았나 보더라고요. 비행 내내 가이드 셋이서 예약자 정보를 일일이 대조하며 이백 명에 가까운 승객의 서류를 작성해야 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촉박했던 건지, 서류의 양 너무 많아 벅찼는지 가이드가 승무원에게 도움을 구했고 이 과정에서 승무원이 직접 펜을 들고 마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하네요.


아무튼, 제주 입국 수속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승객 정보가 잘못 기재됐거나 하는 등의 문제였겠죠? 그때 ‘승무원이 적었다’는 말이 나와서 제주 출입국관리소에서 항공사로 공문을 보낸 거죠. 실제로 해당 공지에는 참조용으로 공문이 첨부되어 있었답니다. 최근에 제주에 입국한 태국인 단체 관광객 중의 일부가 연락이 두절되서 입국 심사가 강화됐다는 뉴스 기사를 보기도 했는데요. 그때나 지금이나 관광을 빌미로 이국땅에 발을 들이고 불법으로 체류하려는 사람은 늘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탑승객 개인의 서류 작성에 승무원이 개입해서는 안 되겠죠. 가이드의 주장대로 정말 승무원이 직접 서류를 쓴 건지, 아니면 일단 입국해야 하니 대충 둘러댄 건지,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서류를 제대로 준비 안 해 놓고 애먼 승무원 탓을 한 거라면 괘씸합니다만... 이게 자초지종을 당사자에게 직접 들었던 게 아니고 오래전의 기억이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말씀드리기가 어렵고 조심스럽네요. 이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엇,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후쿠오카 노선은 끽해야 1시간 남짓이라... 지금이라도 아까 어머님들 서류 쓰셨는지 여쭤보러 가야겠네요. (뒤돌아 통로 쪽으로 향한다)


승객1: 총각, 이거 신고선지 선고선지 뭔지 얼른 좀 써 줘 봐봐.

솬: 정말 죄송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서류를 저희가 써 드릴 순 없습니다. 입국이나 세관 신고는 항공사 소관이 아니고 민감한 부분이라 제가 어떻게 해 드릴 수가 없어요. 작성하시기 너무 어려우시면 제가 옆에서 하나씩 설명해 드릴게요.

승객2: 하이고, 답답시럽네. 그냥 써 줘도 된다니께...

승객3: 그랴, 우리 같은 촌사람들은 이런 건 쓸 줄 몰러. 어여 써 줘.

[조명 서서히 OFF. 핀조명이 주인공을 비추자 주인공이 다시 관객 쪽으로 걸어 나온다]


솬: 어머님들은 고집을 꺾지 않으셨어요. 서류를 끝까지 쓰지 않았답니다. 물론 이분들이 불법 입국을 시도하는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어요. 그러나 규정은 규정이고 원칙은 원칙입니다. 안 그래도 오늘 오전에 경고성 공문과 함께 서류를 써 주지 말라는 업무지시가 개시된 마당이니 이 이상으로 도와드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세관 통과 전에 서류 쓸 곳이 있어서 뒤늦게라도 신고서를 쓸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겠네요.


[암전. 조명이 다시 들어오자 통로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떨어져 있던 좌석은 하나로 붙어 있다. 좌석 위에는 가로로 긴 통유리가 설치되어 있다. 창문 위로 지하철 손잡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주인공은 텅 빈 좌석의 맨 오른쪽 끝에 앉아 초반에 꺼내 보였던 책을 읽고 있다]


솬: (갑자기 책을 펼친 그대로 무릎 위로 떨어뜨리며) 에이 설마. (잠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요? 한 아주머니께서 ‘이런 걸 쓸 줄 모른다’고 하셨는데, 그 속내가 제 손으로 쓰는 게 귀찮거나 싫다는 의미가 아니라 쓰지 못한다는 의미였을 수도 있겠네요.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을 쓰신 황보출 할머니처럼요. 칠십 넘도록 글을 모른 채 사시다가 ‘푸른어머니 학교’에서 뒤늦게 글을 배우신 분인데요. (책을 들어 올려 안을 펼쳐 보인다) 이렇게 할머니가 직접 짓고 손수 써내려간 시가 책에 실려 있습니다. 이제 막 한글을 깨우친 아이가 쓴 것처럼 삐뚤빼뚤 엉성해 보이지만 한글자 한글자에를 꾹꾹 눌러쓰는 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글을 배우지 못해 서러웠던 일생의 한을 떨쳐내신 거죠.


시인 할머니가 글을 배운 푸른 어머니 학교에 관한 기사가 생각나네요. 문예지 <에픽> 6호에 실린 김태호 기자의 「글을 모른다는 건, 글을 배운다는 건」이란 기사였어요. 제 세대의 사람들과 문맹이란 주제를 입에 올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한글의 우수성이라든지 교육열이라든지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한 덕분이겠지만, 이유야 어쨌든 제가 만난 사람 중에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을 만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자연스러운 수순으로요. 통계상,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1% 이하라고 합니다. 소수 중에서도 ‘극’소수네요. 그 수가 너무 적고 제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구실로 모두가 글을 쓸 줄 안다는 공교로운 전제를 깔았습니다. 그래서 ‘쓸 줄 모른다’는 승객의 말을 글을 모른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쓰기 싫어한다고 제멋대로 해석했습니다.


처음부터 한글을 쓸 줄 모른다고 밝혔으면 될 일 아니냐고 답답함을 느끼시는 분도 계시죠? 기사에는 푸른 어머니 학교에 다니는 학생과 관련 실무자의 인터뷰가 같이 실려 있답니다. 거의 모든 인터뷰이가 자신이 비문해자임을 밝히는 걸 꺼렸습니다. 따져 보자면, 글을 못 배운 요인은 다 외부적인 요인이겠죠.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못 다녔거나 여자가 무슨 글을 배우냐며 차별받았을 뿐인데, 글도 모르는 일자무식으로 손가락질받을까봐 이 사실을 꽁꽁 숨기고 살아 온 분이 많더라고요. 기사에 소개된 일화 중엔 학습자가 3~4년 전에 배포한 전단을 들고 학교에 왔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자식이 장성해서 결혼할 때까지 엄마가 비문해자란 걸 몰랐다는 사연도 있었어요.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글을 배우려는 용기를 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친자식에게도 숨겨야 할 만큼 부끄러운 치부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대목이었습니다. 하물며 자식에게도 숨기는데 생전 처음 본 승무원한테 글을 쓸 줄 모르니 서류를 대신 써 달라고 대놓고 말하지 못하셨겠죠. ‘비문해자를 향한 사회의 관심은 미미하다’라고 지적한 기사 속 문장이 비수처럼 제 마음에도 꽂혔습니다.


규정과 지시를 잘 파악하고 그 절차대로 응대하는 것도 중요하죠. 이날 새로 하달된 지시는 잘 파악했지만 한 가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게 있었습니다. 어머님들이 전달하려는 진짜 속내요. 행간을 잘 읽으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가 봅니다. 문예지의 기사 속 표현을 따서 그분들을 비문해자라고 칭하긴 했지만, 어쩌면 진정한 비문해자는 저였을 지도 모르겠네요.


[다음 역에 곧 정차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이야기하는 사이 벌써 제가 내릴 역까지 왔네요. 고해성사하고 나면 속이 후련해야 하는데, 오히려 부끄러워지는 기분입니다. 저는 슬슬 내릴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다음 독백으로 또 찾아뵙겠습니다. [암전]


KakaoTalk_20220926_135103000.jpg 에픽(epiic) 6호 中 「글을 모른다는 건, 글을 배운다는 건」


* 이번 화에 소개된 <시인 할머니의 욕심 없는 삶>과 <에픽 6호>는 시기적으로 승무원 퇴사 후에 발간된 책이지만, 극의 연출 요소로 활용하기 위해 실제 출간일과 상관없이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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