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독볶이 14화

자화자찬 - 행운의 편지와 도넛 열두 박스

독.볶.이 - 독백으로 볶은 이야기 (12)

by Fernweh

독. 볶. 이 - 자화자찬

(12) 행운의 편지와 도넛 열두 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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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가로 면은 하얀색, 좁은 세로 면은 진분홍색으로 칠해진 작은 박스가 무대 중앙에 쌓여 있다. 박스는 총 열두 개, 네 개씩 세 개의 열로 가지런히 놓여 있다. 정체 모를 목소리가 무대를 채운다]


"이 편지는 영국에서 시작되어 일 년에 한 바퀴를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고 지금은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 편지는 4일 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솬: (불쑥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오며) 행운의 편지, 여러분도 잘 아실 텐데요. 너무 잘 알려진 편지라 지금처럼 처음 한두 문장 인용할 때나 쓰이고 마는 편지입니다. 4일 안에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협박이 실려 있지만 그마저도 너무 가소롭네요. 보이스피싱이다, 스미싱이다, 파렴치한 범죄가 난무하는 시대에 돈도 아니고 고작 편지를 보내라고 하니까요. 그렇다고 버젓이 행운의 편지라는데 행운을 기대할 수도 없는 편지죠. 이건 뭐, 탄산이 다 빠진 탄산음료를 마시는 것 같은 기분이네요. 시작부터 김새는 행운의 편지를 들려 드린 건 다른 이유에서였습니다. 이 편지의 또 다른 특징, 뭐가 있는지 떠올려 보시겠어요? 바로 발신자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겁니다.


비행을 시작한 지 반년 정도 지났을 때였습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없이 흘러간 반년이었어요. 겨우 초짜를 벗어났나 싶다가도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딱드리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초짜 티를 팍팍 내던 시기였습니다. 다행히 반년이란 시간은 초심을 흐릿하게 만들기엔 짧은 시간이더라고요. 그 초심에는 도움이 필요한 승객을 성심성의껏 돕자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트레이닝 때 배우고 실습한 서비스 매뉴얼 중에 제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된 부분은 장애인, 노약자 등, 도움이 필요한 승객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약자를 도와줘야 한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평소에 이들을 도울 기회가 그리 자주 있지는 않더라고요. 기껏해야 대중교통에서 자리를 양보하거나 엘리베이터를 잡아주거나 하는 정도겠죠. 승무원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들을 돌보고 도와줘야 하는 입장이니까요. 서비스 매뉴얼에는 상식적인 선의 돌봄에서 한발 더 나아간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의 이동을 도울 때는 승무원의 한쪽 팔을 잡게 한 뒤 반보 앞에서 걸어가라던 내용이 제일 먼저 떠오르네요. 청각장애인을 위해 인사말이나 ‘물’, ‘주스’ 같은 간단한 단어를 수어로 배우기도 했고요. 지금은 다 까먹었지만요. 필담을 활용하라는 팁을 듣고 청각장애인 모두가 수어를 구사하는 건 아니라며 아차 싶었던 순간도 떠오릅니다. 사소한 내용이었지만 어쩐지 의욕이 한껏 생기는 기분이었답니다.


승무원의 최우선 업무인 안전 업무도 승무원으로서의 초심을 만들어 나가는 데 많은 자극이 된 건 분명합니다. 다른 장에서 말씀드렸듯, 입사 직후에 세월호 사건이 터졌으니까요. 다른 서비스직도 마찬가지겠지만 어떨 때는 다른 데에 비해 유독 친절함을 바라게 되는 업종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모든 승객에게 ‘친절한’ 승무원이 돼야 한다는 강박감도 초심에 섞여 들었어요. 여기에 사소하고 사적인 의욕이 살짝 가미된 거죠. 장애인, 노약자, 임산부 같은 도움이 꼭 필요한 승객에게 가장 따뜻하고 힘이 될 도움의 손길을 주자는 의욕이요. 그래서 발신인의 정체를 알 수 없는 행운의 편지를 받았을 때 내심 기뻤답니다. ‘아, 내가 그래도 지금까진 초심을 잘 지키며 일했구나.’라면서요.


밤샘 비행 후, 피로와 졸음을 양어깨 위에 올리고 퇴근하고 있었는데, 회사 번호로 전화가 왔습니다. 흠칫했습니다. 보통 유선 연락이 온다면 비행 스케줄을 급하게 바꾸어야 할 때인데, 걸려 온 번호는 스케줄을 관리하는 편조 팀의 번호가 아니었어요. 객실 승무 팀의 번호였습니다. 컴플레인이 올라왔음을 직감했죠. 다행히 불만 건은 아니었습니다. 근데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 온 질문은 너무 뜬금없었어요. 개인 택배를 왜 회사로 보내냐고 묻더라고요. 띠용? 이게 뭔 소리지? 최근에 딱히 온라인에서 주문한 게 없기도 없거니와 뭘 샀다고 하더라도 집 주소를 놔두고 항공사 사무실 주소로 보낼 이유가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제가 벙쪄 있는 틈에 담당자가 자초지종을 알려주었어요.


칭송 레터가 한 통 왔는데, 발신자가 도넛 열두 박스를 같이 보냈답니다. 주소는 항공사 사무실, 수신자는 저로 해서요. 직원들도 처음엔 당황했을 거예요. 회사로 택배를 잘못 보냈다기엔 도넛은 생뚱맞은 아이템이니까요. 보내 준 인증사진에는 파란 수선화 모양의 패턴이 앙증맞게 그려진 편지 봉투에 ‘김수환 승무원님께’라고 적힌 투박한 글씨가 적힌 편지가 보였습니다. 택배 오배송이 아니라 승객 누군가의 감사 표시란 걸 알 수 있었죠. 그날 이후 이틀 동안 출근하지 않는 스케줄이라 회사 측에서 대신 열람하기로 했습니다.


짧은 편지에는 ‘번거로웠을 텐데도 미소를 잃지 않고 한 명 한 명 정성껏 응대해줘서 감사하다’는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까지 감사를 표한 분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는 거예요. 칭송이나 불만을 홈페이지에 게시할 때는 탑승했던 편명과 날짜를 적기 때문에 어느 비행 때의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내주신 편지에는 어느 날의 어느 비행이었는지 적혀 있지 않았던 거죠. 편지 내용만 가지고 발신자를 추측해 봐야 했어요. 1~2주일 전에 탑승했던 특수학교 단체 승객의 인솔자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할 뿐이었습니다. 칭송이든 불만이든 후속 조치는 회사에서 하는 일이라 제가 스스로 발신자를 추적해 감사 인사를 드릴 수가 없었어요. 담당자 역시 예약 현황 조회 후 회사 측에서 감사 인사를 건넬 거라고 알려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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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남아 있었습니다. 후속 조치야 그렇다 쳐도 제가 정성껏 응대했다는 번거로운 일이 뭐였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 추측이 맞다면, 발달 장애 학생들이 다니는 특수학교에서 단체로 탔던 비행이었다는 건데... 그렇다고 다른 때와 달리 그 학생들을 위해서 특별하게 한 일은 없었습니다. 탑승하는 내내 한 분씩 자리를 안내해드리고, 벨트를 못 매는 학생은 대신 매준 게 다였어요. 발달 장애가 있는 승객이랍시고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출입문부터 에스코트해서 자리로 안내한 것도 아니고, 그저 자리를 못 찾거나 벨트를 못 매는 비장애인 승객을 도와주듯이 똑같이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간혹 선반을 가리키며 이건 뭐냐, 테이블을 여닫으며 이건 뭐냐며 질문하긴 했어요. 짐을 넣는 선반이다, 음료나 식사를 올려 둘 수 있는 테이블이다, 질문을 했으니 답변했을 뿐인 거죠.


학생들은 음료 서비스를 할 때 남들이 보기에 짓궂어 보일 수 있는 행동을 하긴 했습니다. 카트 위에 올려진 물건에 갑자기 손을 뻗는다거나 뜬금없이 제 이름이나 나이를 물어보거나 하는 식이었어요. 불쾌감을 주려고 일부러 그런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갑자기 생겨난 호기심이 행동으로 이어질 때 행동 제어가 안 됐을 뿐이죠.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대신 한 학생이 손을 확 뻗었던 종이컵을 하나 꺼내서 주거나 질문해 온 학생에게 이름과 나이를 웃으며 알려주었어요. 근처에 계시던 인솔자 선생님이 그러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기도 했는데, 그 때 제가 응대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 것 같습니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번거로웠을 텐데도 한 명 한 명 정성껏 응대해줬다는 표현만으로 조심스레 추측해 본 바입니다. 정작 편지를 보낸 승객은 따로 있는데 엉뚱한 비행을 떠올리는 거라면... 어디 계신지 모를 진짜 발신자에게 (주머니에서 빨간 사과를 하나 꺼내 건네는 척하며) 이 자리를 빌려 사과를...


아무튼, (사과를 무대 뒤로 집어 던지고) 비행한 지 이제 겨우 육 개월이었던 제게도, 항공사로서도 굉장히 고무적인 칭송이었죠. 무려 도넛까지 같이 보내주셨기에 제가 더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지난 이야기에 제 부끄러웠던 행동을 고해성사처럼 밝혔더니 창피함에 새빨개진 얼굴이 진정되지 않는 것 같아서 이번엔 자화자찬을 한바탕 해보았습니다. 거울이 없어서 얼굴이 다시 하얘졌는지 확인할 길이 없네요. 방금 집어 던진 빨간 사과처럼 창피했던 제 마음도 어느 뒤안길로 사라졌길 바라봅니다. 으스대기엔 그리 대단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응대였지만, ‘도움이 필요한 승객을 친절하게 도와주자’는 초심을 잘 간직하고 있었기에 정성껏 응대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저 자신을 쓰담쓰담 칭찬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답니다.


처음에 들려드린 행운의 편지와 이번 이야기의 공통점을 말씀드렸죠. 정체를 알 수 없는 발신자.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가 되니 차이점이 하나 보이는데요, 혹시 눈치채셨나요? 제가 받은 행운의 편지에는 진짜 행운이 깃들어 있었다는 점이요.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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