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독볶이 15화

육회가 그렇게 영국에서 유명한가요?

독.볶.이 - 독백으로 볶은 이야기 (13)

by Fernweh

독. 볶. 이

(13) 육회가 그렇게 영국에서 유명한가요?

[무대 중앙에 놓인 대형 모니터에 PPT 화면이 띄워져 있다. 화면에는 여러 국가명이 한글로 적혀 있고 그 옆에는 프랑스어로 적혀 있다. 주인공은 모니터 왼편에 터치스크린 펜을 들고 있다]


솬: 승무원을 그만두고 나서 지금은 이렇게 프랑스어 강의를 하고 있는데요. 너무 비행 이야기만 했으니 잠깐 다른 이야기도 좀 해드릴까 합니다. 서비스직을 하다가 강의하는 일로 직업을 바꾼 게 좀 엉뚱해 보이나요? 에이,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오늘은 화면에 띄워진 것처럼 프랑스어로 나라 이름을 배워보는 수업입니다. 코로나의 여파로 오프라인 강의가 비대면으로 전환이 됐던 터라 ZOOM을 활용한 비대면 강의였는데, 무대를 비대면으로 구현하기 어렵고, 강의한다는 상황을 제대로 보여 드리고자 오프라인 강의처럼 상황을 부여해 봤어요. 굳이 비대면 수업이었다는 얘기는 왜 하냐고요? 이번 에피소드는 비대면 수업이라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인반 비대면 수업 때는 거의 모든 수강생이 카메라를 켜지 않더라고요. 저만 홀로 화면에 얼굴은 비춘 채 수업하려니 처음엔 좀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근데 제가 수강생이었어도 카메라는 안 켰을 것 같더라고요. 듣기, 말하기로만 수업이 잘 이루어져도 큰 문제도 없고 해서 차차 혼자만 등장하는 수업도 익숙해졌답니다. 물론 발음이 틀린 수강생에겐 입 모양을 보기 위해 잠시 화면을 켜 달라고 요청하기도 해요. 이날도 어김없이 저랑 딱 두 분만 화면에 등장하셨고, 다른 분들은 오디오로만 수업을 듣고 있었습니다. 잠시 여러분도 같이 오늘 배울 어휘를 프랑스어로 배워볼까요?

‘봉주르’, ‘메르씨’ 같은 인사말을 알려 드려야 하는데 뜬금없이 나라 이름이라니, 아쉬우셔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네? 인사 말고 불어 욕을 알려 달라고요? (뻔뻔한 말투로) 불어 욕을 알아보고 싶으신 분은 ‘페른베’라는 작가의 <욕마저 고상하다는 불어를 만나다>, 줄여서 <욕고불만>이라고도 부르는 에세이를 사서 읽어 보세요. 전국의 동네 책방 여러 곳에 입고되어 있고, 온라인으로도 주문 가능한 곳도 많아요. 강력 추천하는 책입니다. 하하.


프랑스어의 명사는 성별이 있어서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됩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프랑스어 정관사를 한 번 떠올려 볼게요. 남성, 여성, 복수형이 차례대로 ‘르(le)’, ‘라(la)’, ‘레(les)’였어요. 나라 이름도 명사이니 (화면을 펜으로 가리키며) 보시는 바와 같이 여성 명사인 프랑스나 한국엔 ‘라’가 붙어서 ‘라 프헝쓰’(la France), ‘라 꼬헤’(la Corée)가 됩니다. 일본이나 포르투갈처럼 남성 국가명은 ‘르 쟈뽕’(le Japon), ‘르 뽀흐뛰걀’(le Portugal)입니다. 성별도 나뉘지만 가끔 수(數)를 신경 써야 할 때가 있어요. 복수형으로 불리는 나라가 있기 때문이죠. 여기 맨 밑에 미국이 그렇답니다. 미국은 프랑스어로 ‘레 제따 쥐니’(les États-Unis)입니다.*


*실제 강의를 한다는 느낌을 살리기 위해 외래어 표기법이 아닌 발음의 소리와 흡사하게 표기함


복수형은 영어처럼 끝에 s를 붙이는데, (각 단어 끝의 s에 밑줄을 치켜) 여기도 단어 끝마다 s가 달려 있네요. 미국은 영어에서도 복수형으로 말합니다. 간단히 아메리카라고도 하지만 공식 명칭은 ‘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아메리카’(the United States of America)죠. 여러 아메리카 연방이 연합된 국가라는 뜻입니다. 여러 연방이니 ‘스테이트’ 뒤에 s를 달아 복수로 만들었어요. 프랑스어도 같은 개념입니다. ‘에따’(État)는 연방, ‘위니(Unis)’는 연합됐다는 뜻이라 각각 ‘스테이츠’와 ‘유나이티드’에 상응해요. 복수형으로 불리는 국가가 또 뭐가 있을까요?


음성: (따로 출연하는 인물 없이 음성만 들린다) 육회요.

솬: 네? 소리가 잘 안 들려서 그런데, 한 번만 더 말씀해주시겠어요?

음성: 육회요, 육회. 영어로는 육회도 복수형이에요.

솬: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얼굴로) 육회요? 좀 뜬금없긴 한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 육회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따흐따흐’(tartare)라는 메뉴가 있긴 해요. (화면에 tartare를 적는다) 생고기를 뜻 그대로 옮기면 ‘비앙드 크휘’(viande cure)인데, (이어서 viande crue를 적는다) 오늘 배우는 어휘는 나라이름인데요...

음성: (말을 끊으며) 아니요. 육회가 아니라 유, 케이. 영국 U.K! ‘유나이티드 킹덤즈’(United Kingdoms). 킹덤’즈’라고 복수형이거든요.

[크고 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솬: 으악! 육회가 아니라 유, 케이! 쥐구멍 어디 없나요, 세상에. 이게 참 질문을 소리로만 듣다 보니 잘못 듣는 경우가 종종 있네요. 배우고 있던 어휘랑 전혀 상관없는 육회를 물어보셔서 당황했는데, 질문에 대답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순간 미국이 육회가 그만큼 유명한가, 하는 생각도 했다니까요.

[잔잔한 웃음소리가 퍼진다]

음성: 깔깔, 저도 당황했잖아요. 나라 이름 배우는데 육회가 웬 말이에요.



솬: (숨을 한번 고르고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관객을 향해) 이게 바로 ‘미국이 육회가 그렇게 유명한가요?’ 사건의 전말이었습니다. 영국을 UK라고 부르는 게 너무 생소해서 UK를 육회로 들어버렸습니다. 영국은 버젓이 존재하는 영국이란 한글 명칭으로 부르는 데다가 영어로도 제겐 잉글랜드가 더 익숙한 나머지 생뚱맞게 음식 이름을 알려드렸네요. ‘유, 케이’라고 발음하는 수강생의 입 모양을 볼 수 있는 대면 수업이었으면 어색한 명칭이었어도 ‘UK’를 떠올렸을 것 같아요.

지금은 수강생이 카메라도 안 켜고 소리로만 질문했고, 심지어 육성이 아닌 노트북의 오디오 시스템을 통한 소리라서 엉뚱하게 육회로 잘못 듣고야 말았던 거죠. 비대면 강의의 묘미라면 묘미겠네요. 육회라고 듣는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던 게 아직까지도 기억에 선하네요. 앞서 미국을 영어로 말하려다 ‘유나티이드 스테이크’, 하고 말실수를 한 상황이었다면 스테이크의 여파로 육회가 생각난 거라며 비겁한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건 뭐 변명의 여지가 없네요. 그래도 수업이 지루해지던 찰나, 한바탕 웃으면서 분위기가 환기되어 좋았습니다. 좀 어수선해졌으니 십 분 쉬고 다시 수업을 시작할게요. 아, 배가 고파지셨다면 육회를 먹으러 먼저 자리를 뜨셔도 괜찮습니다. 저도 오늘 저녁엔 육회나 한 접시 하려고요. 하하.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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