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볶.이 - 독백으로 볶은 이야기 (14)
[조명 ON. 모니터가 왼쪽으로 2미터 옮겨져 있다. 화면의 정면이 관객에게 보이게끔 놓였던 각도가 15도 정도 비스듬히 틀어져 있다. 모니터 왼쪽에 멀끔한 모습을 한 주인공이 서 있고 모니터에서 먼발치에 영상 촬영용 카메라가 삼각대 위에 설치되고 있다. 촬영 PD가 기기를 이것저것 조작하고, 강의 기획자는 그 옆에 놓인 책상에 앉아 교안을 살펴보고 있다]
솬: 아아, 안녕하세요, bonjour, 마이크 잘 나오죠? 네, 확인 감사합니다. 지금 뭐하냐고요? 온라인 강의 촬영을 준비하고 있답니다. 여기는 한 외국어 교육 사이트의 프랑스어 회화 강의를 찍는 스튜디오입니다. 오늘은 회화 강의 세 개를 찍어야 해요. (PD와 기획자가 촬영 준비를 마무리하는 동안 주인공은 강의할 내용을 중얼중얼 연습한다) 마꺄홍-(macaron), 마들렌-(madeleine). (끝이 상승조가 되지 않도록 신경 쓰며 다시 한번) 마꺄홍-, 마들렌-. 발음이 어려운 단어도 아닌데 뭘 계속 연습하냐고요? 이게 다 촬영하다 생긴 일종의 강박 때문이랍니다. 혹시 여러분은 일할 때 이것만은 꼭 해야 한다는 징크스나 강박이 있나요?
영상 강의는 본 촬영을 들어가기에 앞서 시범 강의를 찍어보는데요, 강의 구성이 괜찮은지, 분량은 적절한지 등을 미리 확인하기 위해서예요. 이번에 기획한 회화 강의는 내용 자체에 대한 수정 소요는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인지하지 못하던 어조에 관한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어휘 설명을 할 때 단어의 끝을 자꾸 올린다는 피드백이었죠. 그래서 조금 전에 일부로 말끝을 ‘아-’ 하고 일정한 톤으로 내는 연습을 해본 거랍니다. 제가 우리말을 할 때의 톤을 집중해서 들어보세요. 꽤 자주 뒤를 부드럽게 올리면서 말하는 게 느껴지시나요? 쭉 올리는 게 아니고 물결무늬를 그리듯이 ‘아~’, 이렇게요. 아무래도 전에 하던 일이 서비스직이라 말에 ‘조’ 같은 게 생긴 모양입니다. 상냥하고 친절하게 승객을 응대해야 했으니까요.
이번 강의는 원어 강의가 아니에요. 즉, 프랑스어로만 진행되는 강의가 아닙니다. 한국어로 설명하다가 프랑스어 단어나 문장을 읽어 주고 다시 또 한국어로 설명을 이어가는 식이라 우리말을 할 때 나오는 말투가 프랑스어를 할 때도 부지불식간에 옮겨 간 것이었죠. 시범 강의 모니터링 전까지는 저도 전혀 인지하지 못한 문제였습니다. 피드백을 받자마자 영상을 봤어요. ‘여러분한테도 익숙한 프랑스 디저트죠, 마카롱은~ 프랑스어로 마캬홍~, 다시 한번, 마캬홍~ 이라고 발음합니다.’ 정말로 불어 발음을 할 때 끝에다가 물결무늬를 달더라고요.
‘조’를 없애는 게 말처럼 쉽지 않더라고요. 무의식적으로 끝의 억양을 올리는 건 프랑스어 발음을 다듬는 것과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우리말 말투에 탑재된 기본값을 새로 설정해야 했던 거죠. 삼십 년을 이렇게 말하며 살았는데 갑자기 말투를 고치려니 신경이 이만저만 쓰이는 게 아니었답니다. 온라인 강의가 보기엔 쉬워 보여도 막상 해보니 신경 쓸 게 한두 개가 아니더라고요. 오프라인 강의는 실수하더라도 바로 다시 고쳐서 알려 줄 수 있어요. 어쩔 땐 수강생이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실수가 순간적으로 지나가기도 합니다. 이와 달리 온라인 강의는 완성된 촬영본을 업로드해서 서비스하기 때문에 실수가 하나라도 녹화되면 그 실수가 영구적으로 박제되는 거죠.
수강생은 강사를 따라 그대로 발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강사가 ‘마카롱~’하고 단어 끝을 올려 버리면 그 억양을 그대로 따라하는 거죠. 일개 강사의 언어 습관을 프랑스어의 일반적인 억양이라고 잘못 받아들일 수도 있는 문제였어요. 이 강의의 대상이 초급자임을 감안할 때 꼭 고쳐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한 번 잘못 입에 밴 발음을 나중에 고치는 게 생각보다 녹록지 않거든요. 처음 배울 때 잘못 굳어버린 발음을 다시 고칠 때 고생했던 장본인이 저라서 아주 잘 안답니다.
기획자는 내재된 언어 습관을 시범 강의 때 알게 되는 강사가 저뿐만은 아니라고 다독여주었습니다. 대신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거라 강박적으로 고쳐야 한다고도 했죠. 그렇게 첫 번째 강박 ‘끝 음 처리를 일정하게 해라’가 생겼습니다. 이건 뭐 청기백기 게임 때 청기 올려, 백기 내려 대신 청기든 백기든 올리지도 말고 내리지도 말라는 미션을 받는 기분이었죠.
대망의 본 강의 녹화 날은 결국 오고야 말았습니다.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정신없이 1강 녹화가 끝났습니다. 제 말투를 고쳐야 한다는 강박감에 긴장까지 더해지니 강의 진행이 엉망진창이었어요. 그날도 이어서 강의 세 개를 더 찍어야 했는데, 하필 다음 타임에 다른 촬영이 잡혀 있어 마음에 안 든답시고 1강만 하염없이 찍을 수는 없었답니다. 긴장이 좀 풀리고 찍은 2강, 3강이 그나마 봐 줄 만한 수준이었으니 1강은 오죽했을까요. 그나마 프랑스어 단어를 발음할 때 말끝을 올리지 않는 걸로 위안 삼아야 했습니다. 강박적으로 연습한 결과가 빛을 보긴 봤네요. 빛만 봐야 하는데, 왜 빛에는 늘 그림자가 따라붙는 건가요. (한숨을 쉰다)
일정한 톤을 유지하겠다는 강박감과 격한 긴장 탓에 무슨 로봇이 강의하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봐도 자동 음성이 텍스트를 읽는 것처럼 보였어요. 강의를 다 찍을 즈음 비보가 날아왔습니다. 보통 1강은 맛보기 강의로 무료 공개된다고 했어요. 삐걱대는 저 로봇을 만천하에 공개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1강은 나중에 다시 찍기로 하고 촬영일을 하루 더 잡았죠. 그게 바로 오늘이랍니다. PD님, 기획자님 지난 번에 찍은 1강 촬영본은 아무도 볼 수 없게 영구 삭제해주세요. 제발.
PD: 안 지울 건데요. 남겨 놓고 두고두고 놀려 먹을 거예요. 히히히.
기획자: 짓궂어요, PD님. 세팅 다 됐으니 후딱 촬영하시죠.
솬: 후다닥 NG 없이 원테이크로 찍고 갑시다!
[전체 조명 DIM, 핀 조명이 주인공을 비춘다] (다시 관객을 바라보며 대사를 이어간다) 이어서 들려드릴 또 하나의 강박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원. 테. 이. 크 강박입니다. NG를 안 낼 거라고 말한 게 허세는 아니었어요. 어떻게든 한 강의를 한 번에 찍고 끝내겠다는 진심어린 의지였답니다. 저야 촬영 마치고 가버리면 끝이지만 후편집이 필요한 경우 영상 담당자는 잔업을 해야 하죠. 물론 촬영 당일에 바로 업로드하는 건 아니라서 야근한다든지 밥을 굶어가며 편집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근데 PD 한 사람이 강사 한 명만을 맡는 게 아니라서 저 한 명이라도 편집할 거리를 줄여줘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촬영하다 NG 나면 다시 촬영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요? 자, 20분짜리 강의라고 칩시다. 잘 촬영하다가 19분째에 NG가 났어요. 어떻게 생각해도 처음부터 다시 찍는 건 비효율적이죠. 그래서 편집 점을 정해 놓고 NG 났던 19분부터 다시 찍은 다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앞부분과 매끄럽게 이어 붙입니다. NG가 났을 때 생기는 잔업이 바로 이런 것이죠. 문제는 PD는 영상 담당자라서 강의 내용을 꿰뚫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기획자가 동석하는 이유랍니다. 내용이 잘 이어지지 않으면 강의 내용을 아는 기획자에게 여기가 이렇게 이어지는 게 맞는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즉, NG가 나면 PD 말고도 기획자에게도 잔업이 생긴답니다. 예정보다 촬영이 일찍 끝나면 일도 줄고 그만큼 모두가 다 시간을 버는 셈이니 역시 원테이크가 최선이네요.
제가 아까 후다닥 찍고 끝내자고 호언장담한 이유는 거의 매 강의를 원테이크로 찍었기 때문입니다. NG를 안 내자는 강박 덕분이라면 덕분이겠죠. 가끔 부연 설명을 하려다가 강의가 산으로 가는 바람에 NG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 그 이후엔 강의 내용을 한 편의 시나리오처럼 써서 통으로 외워버렸답니다. 군더더기 없이 준비한 내용만 얘기하니 NG도 확 줄더라고요. 근데 참 희한한 건 한 번 삐끗하면 NG가 미친 듯이 난다는 거예요. 몇 번째 강의를 찍던 날이더라... 처음은 이 펜 때문이었어요. (터치스크린용 펜을 들어서 보여준다) 판서하다 팔꿈치가 눌렸거든요. 터치를 인식하는 스크린이라서 팔꿈치와 펜이 동시에 인식됐고 그 때문에 글씨가 뚝뚝 끊기며 적혔어요. 연쇄 살인마, 아니 연쇄 NG마가 찾아온 순간이었습니다.
이후로도 말이 꼬여서 한번, 순서를 착각하고 설명을 빼먹어서 또 한 번 NG를 냈습니다. 잘 진행된다 싶더니 교안에 버젓이 오타가 남아 있는 걸 촬영 중에 발견해서 촬영을 멈춰야 했어요. 기획자랑 제가 몇 번씩 확인했던 교안인데... 역시 오타는 찾을 땐 죽어다 깨어나도 안 보이는 건가 봐요. 연쇄 NG마가 저희를 골탕 먹이려고 작정한 날이었는지 제 실수가 아닌 다른 이유로도 NG가 몇 차례 더 났습니다. PD님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고, 정체 모를 외부 소음이 스튜디오 안까지 들리기도 했고, 벽에 잘 걸려 있던 시계도 갑자기 떨어지질 않나... 휴, 평소에 안 낸 NG가 모여 있다가 이날 터져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NG가 나면 날수록 멘탈이 점점 흔들렸습니다. 기획자가 목이 좀 뻐근해서 고개를 갸웃하는 걸 멈추라는 신호로 잘못 받아들이고 설명을 끊기도 했죠. 결국 저희는 한 템포 쉬어 가기로 했고, 사내 카페로 가 잠시 커피 타임을 가졌습니다. 쉬고 싶었던 게 아니라 쉬어야만 했어요. 꾸역꾸역 해봐야 NG가 계속 날 거고 그만큼 강의 퀄리티는 떨어졌겠죠. 이전 촬영까지 한두 개 빼고는 원테이크로 끝냈던 이력 때문에 이날 강의 네 개를 찍으려 했는데 네 개는 무슨, 두 개도 겨우 찍은 날이었습니다. 촬영 시간이 애매하게 남긴 했어요. 세 번째 강의를 찍으면 찍을 수 있는, 그러나 원테이크로 찍어야 하는 상황이었죠. 평소라면 하나 더 찍자 했을 텐데, 연쇄NG마에게 강타당한 여파로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뭐, 너무 상심하진 않았어요. 정리하고 나올 때 기획자가 건넨 말 덕분이었죠. 기획자님, 그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세요?
기획자: 저요? 제가요? 제가 무슨 말을 했죠? 음... 아, NG 많이 안 내는 편이라고 한 거요?
솬: 맞아요. 그땐 또 제 기운 차리라고 빈말하는 거 아니냐고 되물었잖아요.
기획자: 에이, 진짜 빈말 아니었어요. NG 안 내기로 꼽자면 세 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니까요. NG가 미친 듯이 났던 그날은 예외인 걸로...
솬: 집에 가는 길에 제가 품었던 강박에 대해 곱씹어 봤습니다. 무조건 원테이크로 찍기로 한 것도 아닌데 NG 한두 번 나는 거 때문에 그토록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차라리 NG가 어느 정도는 나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다면 덜 긴장한 채로 촬영할 수 있었을 것 같네요.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며 품는 어느 정도의 강박감은 분명 좋은 결과를 끌어냅니다. 끝을 자꾸 올리는 말투를 고칠 수 있던 것처럼요. 촬영 중에도 자꾸만 둥실 떠오르려는 말투를 붙잡고 끌어낸 것도 강박이 자아낸 유익한 효과였습니다. 반면, 쓸데없는 강박감으로는 긍정적인 효과를 끌어내기 어려웠습니다. NG를 안 내야 남들이 편하다. 취지야 좋죠. 근데 NG가 나면 큰일 난 것처럼 여기다 보니 정작 강의를 찍는 제가 제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답니다. NG 낸다고 기획자나 PD가 화내는 것도 아니고, 촬영이 일찍 끝나도 할 일이 아예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남들을 위한다는 위선적인 강박에 사로잡혀 저 혼자만 예민해진 꼴이었습니다. 불필요한 강박에 과하게 얽매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우친 거죠. 여러분도 어떤 강박에 휩싸인다면 이러한 중압감이 정말 느껴야 하는 감정인지, 과정이나 결과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그럼 전 1강 재촬영하러 가보겠습니다.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