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독볶이 17화

귀신의 머리를 후릴 줄이야

독.볶.이 - 독백으로 볶은 이야기(15)

by Fernweh

독.볶.이

(15) 귀신의 머리를 후릴 줄이야



솬: 저는 후배를 때린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여자 후배를요. 자, 잠시만요. 뭘 집어 던지려고 하는데, 워워, 진정하세요.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거 잘 알면서 그러시네요.


[무대가 서서히 어두워지고 스산한 바람 소리가 들린다. 관객을 겁 주기라도 하려는 건지 비명이 갑작스럽게 스피커에서 터져 나온다. 조명이 완전히 꺼지고 3초 뒤, 무대 중앙에 주인공의 얼굴이 허공에 매달린 것처럼 둥실 떠오른다. 손전등을 턱 밑에서 위로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솬: 사람을 때렸다고 하니 놀라셨군요. 그보다 더 놀라운 이야기가 벌어질 텐데 벌써 놀라시면 곤란합니다. 저희가 묵고 있는 라오스 비엔티안의 호텔에서 아주아주 무서운 일이 벌어졌거든요. 그럼 그 호텔로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죠.


[무대 조명이 반쯤 켜진다. 무대 왼편은 트윈룸, 오른편은 싱글룸이다. 두 방 모두 인테리어가 거의 흡사하다. 짙은 갈색 카펫이 깔려 있고, 하얀 침대의 2/3 아래 지점을 길게 가로지르는 자줏빛 침대 덮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베개나 쿠션도 덮개와 같은 색의 커버가 씌워져 있다. 내부 조명은 백열등보다 더 오렌지 계열의 채도가 묵직하게 감도는 빛을 자아낸다. 커튼이 창을 완전히 가리고 있어 내부는 더 어둡게 느껴진다. 오른편(싱글룸)으로 향하는 주인공이 커튼을 활짝 연다. 바깥에선 이렇다 할 빛이 보이지 않아서 분위기가 한층 더 을씨년스러워진다]

(이야기와는 상관 없는 호텔 사진임)


솬: 카톡이 와 있었네요. 어라? 아직 저희 막내 크루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마침 비엔티안에 삼촌이 계셔서 삼촌이랑 저녁 먹고 들어온다고 했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걱정되네요. 바로 옆방인데 한 번 가볼까요? 에이, 어린애도 아니고 삼촌 뵙고 온다고 했으니 별일 없겠죠. 저는 아까 나갔을 때 땀을 한 바가지 흘려서 일단 샤워 좀 하고 올게요.


[방 한 구석, 안이 보이지 않는 부스로 들어간다. 곧 샤워기에서 물이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무대 왼편, 침대에 누워 있던 여자 승무원이 전화기를 보더니 발을 동동 구르며 방 안을 휘젓듯 돌아다닌다. 머리를 몇 차례 쓸어 넘겼다가 아랫입술과 손톱을 한 번씩 물었다가, 초조해하는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그러다 보이스톡을 거는데, 오른편 방 침대 위에 놓인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린다. 샤워하느라 주인공은 전화를 받지 못한다. 조명 OFF]


솬: [전과 비슷한 조도의 조명이 무대 오른편에서만 켜진다] (샤워 가운을 입은 채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온다) 휴, 씻으니까 좀 낫네요. 동남아 여름 날씨는 정말, 숨 막히네요. 어라, 보이스톡을 왜... 어? 막내한테 메시지가 와 있네요. ‘호텔 복귀했습니다.’라더니 곧바로 ‘여기 어디예요? 어딘지 모르겠어요.’라네요. 삼촌이랑 술을 거하게 마셨나 봐요. 횡설수설하는 걸 보니. 같은 방 쓰는 선배가 답장하긴 했는데... 아, 개인 신상이 있으니 실명 대신 이니셜을 쓸게요.


A씨 왜 그래요. 무섭게. 저 방에 있는데, 어디로 간 거예요.


그러게요. 저 승무원이랑 방을 같이 쓰니까 복귀했으면 모를 수가 없겠죠. 설마 다른 호텔에 갔을 리는 없고, 이거 원,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요.

[대사의 ‘귀신’이란 단어를 말함과 동시에 주인공 뒤 창문에 아른거리는 무언가가 휙 지나간다. 곧바로 ‘카톡’, 알림이 울린다]


수영장인 것 같아요. 무서워요, 선배님.


(몸에서 긴장을 풀며) 술에 단단히 취했구만, 으이구. 엘리베이터 타서 아무 데나 누른 버튼이 수영장 층이었나 보네요. 내려서 썬베드 보고는 침대인 줄 알고 꾸역꾸역 가서 누웠다가 깜빡 잠든 것 같은데, 깨서 보니 주위에 아무도 없고 불은 다 꺼져 있고 어딘지 모르겠으니 무섭네 어쩌네 연락한 것 같네요. 아니 근데 호텔 와이파이 연결되어 있겠다, 풀장도 보이겠다, 당연히 수영장이란 걸 알아차릴 수 있는데 연락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방에 돌아가면 될 것을... 겁먹은 것 같으니 데리고 와야겠어요.


[방을 나섬과 동시에 오른편 조명 OFF, 왼편 조명이 인물이나 물체의 실루엣만 보일 정도로 아주 옅게 켜진다. 그새 무대 중앙에는 풀장이 마련되어 있다. 풀장의 경계를 따라 선베드가 반원을 그리며 놓여 있다. 무대 뒤편, 깊숙한 곳에 칵테일 바가 있지만 운영 시간이 지났는지 아무도 없고 주렁주렁 달린 알전구도 다 꺼져 있다. 무대 왼편 계단 앞에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두 개의 하얀 직사각형 천이 나풀거린다. 그 천을 휙휙 헤치며 주인공이 들어선다]


솬: A 씨! 어디 있어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핸드폰 플래시를 켠다. 선베드가 놓인 곳으로 가며) 선베드에 누워 있을 줄 알았는데, 없네요. 진짜 다른 호텔 갔나... 바 쪽엔 아무도 없고. 화장실에서 잠든 거면 곤란한데. 방 같이 쓰는 B씨랑 같이 올 걸 그랬네요.


[그때 뒤에서 흰 천 하나가 주인공 쪽을 향해 휙 솟아오른다. 그걸 감지했는지 몸을 휙 돌리며 뒤쪽을 플래시로 비춘다] 에라이, 저건 또 왜 하얀 걸로 달아 놔서 사람 놀라게 하냐고... 귀신이라도 지나간 줄 알았네. 하다못해 참파 꽃이라도 그려 놓던가. 아, 참파도 꽃잎이 하얀색이지... (다시 카톡을 확인하고 A 씨에게 보이스톡을 건다. 관객석 쪽으로 걸어 나오며 주위를 살핀다. 전화는 어디에서도 울리지 않는다) 저 쪽에도 아무도 없고, 보이스톡은 울리지도 않고, 귀신한테 홀려서 진짜 딴 데로 샜나...


[칵테일 바 뒤에서 사람의 형상이 불쑥 솟아오른다. 멈춰 서서 관객석을 기웃거리는 주인공을 노려본다. 주인공이 찜찜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뒤를 확 돌아본다. 뒤도는 순간, 그 형상은 다시 아래로 숨는다]


(허공에다 대고) 귀신이면 물러가고, 사람이면... 음, 사람이라도 물러가고! 잠깐. 라오스 귀신이니까 한국말 못 알아듣잖아. 싸, 싸바이디~ 컵짜이~ 제가 아는 말이 안녕, 고마워 밖에 없답니다, 라오스 귀신님. 우리가 마주치더라도 안녕하거나 감사할 사이는 아니니 튀어나오지 마세요. 경고했어요. (관객에게) 수영장에 아무도 없다고 카톡부터 좀 보낼게요. (핸드폰 화면에 열중한 사이 숨었던 형상이 다시 바 위로 고개를 내민다.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스멀스멀 바 위로 올라온다. 그 동작은 꽤 기괴해 마치 거미처럼 보인다)


오, 다행히 방으로 갔다는 것 같은데요. 야밤에 이게 무슨 짓인지, 저도 돌아가 보겠습니다. 내일 마주치면 혼내야겠어요. (무대 왼편으로 향하다가 멈칫한다. 오른편에 기괴한 뭔가가 있음을 눈치채고 침을 꿀꺽 삼킨다) 저, 저만 보이는 건가요? 오른쪽에... 칵테일 바 위로... 뭐가... 나오고 있는 것 같은데... 기, 기분 탓이죠? 얼른 방으로 가야겠어요. (빠른 속도로 걸어 나간다. 바 위로 올라선 형상이 바에서 뛰어내려 주인공을 재빠르게 쫓아간다)

[동시에 암전]


[주인공의 발소리, 엘리베이터가 작동하는 소리, 스산한 바람 소리가 섞여서 들려온다. 카드 키를 꽂는 소리가 나자 무대 오른편 싱글룸에 어둑한 조명이 켜진다. ‘똑똑’, 노크 소리가 나서 주인공이 ‘네~’ 하고 문을 열러 나간다. 무대 앞쪽으로 나온 그에게 핀 조명이 켜지고 다른 조명은 OFF]


솬: A 씨가 사과라도 하러 왔나 봐요. 아니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설마 아까 거뭇거뭇한 거미 같은 뭔가가 절 따라와서 문밖에 있는 건 아니죠? 근데 생각해 보면 좀 웃긴데요? 창문을 타고 제 방으로 와야 귀신답지, 정중하게 노크하면서 문 열어 달라는 귀신이라뇨. 역시 귀신일 리가 없겠네요. A 씨가 술주정이나 안 했으면 좋겠네요.


[핀 조명 OFF, 전체 조명이 서서히 켜지자 주인공 옆에서 미동 없이 머리를 앞으로 축 늘어뜨린 채 서 있는 여자가 보인다.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주인공은 옆을 돌아보고 나서야 그 여자를 발견한다]


솬: 우악! (오른손으로 있는 힘껏 귀신으로 오인한 여성의 머리를 내려친다)

A 씨: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아악! 선배님, 저예요! 아야...

솬: 아니 왜 여기 이러고 있어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A 씨가 휙 돌아 나간다)

[전체 조명 서서히 OFF, 핀 조명이 주인공을 비춘다]


네. 후배를 때린 사건의 자초지종은 이랬습니다. 눈앞에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 귀신 몰골을 보니 반사적으로 손이 올라가더라고요. 귀신의 머리를 후려치려고 하다니, 용기도 가상하지... 복도가 어둑해서 보자마자 귀신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고, 문을 열자마자 검은 덩어리가 훅 눈에 들어와서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제 앞에서 치워버리려고 손을 휘둘렀습니다.


이 맹랑한 후배는 라오스로 오는 동안 제가 떨었던 입방정의 진위를 밝혀내고자 몰카를 기획했다고 합니다. 손님이 다 잠들고 한가한 사이에 저랑 A 씨가 무서운 이야기를 나눴거든요. 저희가 묵는 호텔 몇 호에만 묵으면 가위를 눌린다, 잠결에 눈을 떴는데 옆 침대에서 자던 후배가 앉은 채로 자기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 자다 말고 왜 자길 쳐다보고 있었냐고 물으니 오히려 쳐다본 건 선배님 아니었냐고 되물어 둘 다 화들짝 놀랐다 등등,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지도 모르는 라오스 호텔을 둘러싼 기괴한 소문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다 제가 기어코 ‘전 귀신보다 벌레가 더 무서워요’라고 방정맞은 말을 뱉었습니다. 그 친구에게 귀신도 무서워하지 않는 남자다운 모습을 뽐내려는 건 아니었어요. 진짜로 제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존재는 벌레랍니다. 바퀴벌레가 나오는 방. 독기를 잔뜩 품은 원혼이 나오는 방. 둘 중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1초도 고민하지 않고 후자를 고를 겁니다. 진심이에요.


후배는 제가 남자랍시고 센 척한다고 생각했는지 ‘에이~ 진짜 귀신 안 무서워하세요?’라고 자꾸 떠보더라고요. 귀신이 안 무섭다고 한 적 없습니다. 벌레가 더 무섭다고 했을 뿐... 평소에 서슴없이 장난치던 사이라 후배 멋대로 허세라고 오해한 허세가 진짜인지 확인해보려고 모의했던 거죠. 재미있자고 한 몰카인데, 그 친구 머리에 저릿한 아픔만 남겼네요. 한방 후려 맞고는 눈물이 찔끔 났다고 하더라고요. (귓속말하는 시늉을 하며) 제 손이 꽤 맵답니다. 하하. 뭐 어쩌겠어요. 자업자득인걸. 내일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흐를 것 같네요. 혹시 아까 때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나요? 너무 세게 때렸나... 괜찮은지 살펴보러 잠깐 옆방에 다녀와야겠어요.


[주인공이 방에서 나간다. 서서히 조명이 켜지는데 주인공이 있던 자리 바로 뒤에 칵테일 바에서 나타났던 검은 형상이 구부정한 자세로 서 있다. 주인공이 할 말이 남았는지 나가다 말고 고개만 관객 쪽으로 돌리는데, 발치에 서 있는 검은 형상을 보진 못한다]


솬: (<그것이 알고 싶다>의 김상중 씨 성대모사를 하며) 그런데 말입니다. 수영장 개방 시간이 아니었는데 수영장 문은 왜 열려 있었을까요? 직원이 깜빡하고 문을 안 잠근 걸 수도 있겠죠. 근데 그게 아니라면요? 저를 홀리려고 귀신이 문을 열어 준 걸지도 모르겠네요.

[암전. 동시에 귀를 찢을 듯한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