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독볶이 18화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대변인

독.볶.이 - 독백으로 볶은 이야기(16)

by Fernweh

독.볶.이

(16)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대변인



[서양 배처럼 둥글게 아래로 넓어지는 우윳빛 몸체 위에 동그란 얼굴이 놓여 있는 인공지능 로봇이 무대 중앙에 멀뚱멀뚱 서 있다. 하얀 얼굴에는 노란 테를 두른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두 개 붙어 있다. 로봇의 신장은 주인공의 가슴 언저리를 웃돌아서 무대로 걸어 나온 주인공이 로봇 옆에 서자마자 머리를 두어 번 툭툭 두드린다. 그러자 로봇 가슴팍에서 로딩 중임을 알리는 듯한, 뚜렷한 모양 없이 꿀렁거리는 LED 불빛이 들어온다]



솬: 독백봇(bot), 이번 독백 들려줘. (잠시 지켜보다 반응이 없자 천천히 또박또박 한 번 더 말한다) 독백봇, 이, 번, 독, 백, 들, 려, 줘. (그래도 반응이 없자 고개를 갸웃한다) 인공지능의 시대라고 해서 큰맘 먹고 준비해 온 로봇인데 말귀를 못 알아듣네요. 잠시만요. (조금 전 살짝 두드린 것보다 세게 머리를 한 대 친다. 속이 빈 금속을 때리는 듯한 공명음이 ‘퉁’하고 울려 퍼진다)


[독백봇의 눈 위로 V자 모양으로 눈썹 두 개가 켜지며 화난 표정이 만들어진다]


솬: 인제야 반응하는 걸 보니 역시 말 안 듣는 기계는 때려야 제 기능을 하나 봐요. 지난 에피소드에서 의도치 않게 후배 머리를 가격하는 모습을 보여드린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또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드려서 좀 머쓱하네요. 제가 그동안 독백을 너무 많이 했더니 목이 쉰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이번 독백은 야심 차게 준비한 이 독백봇이 들려드릴 겁니다. 그럼 바로 시작할게요. 집중해주세요. 독백봇, 이번 독백 들려줘. (로봇의 고개가 관객 쪽으로 향하는 걸 보고 무대에서 퇴장한다)


* 아래 독백봇의 독백은 직접 프랑스어로 쓴 글을 번역기에서 우리말로 번역한 글이다. 주술 호응이 완전히 깨졌거나 아예 이해할 수 없는 부분만 살짝 수정했다. 좀 더 원활하게 읽히도록 뜻이 모호한 문장은 { }안 해석을 덧붙였다


독백봇:

(에너지드링크 레X불 광고에 등장해 인간과 체스 경기를 벌이는 인공지능 로봇의 음성 같은 목소리를 내며) 나는 때때로 번역가로 일한다. 번역은 사람들이 문학으로 선호하는 종이지만{문학의 영역이라고 여기는 영역이지만}내 능력 밖이다. 나는 대학에서 그것을 완벽하게 만들지 않았다.{전공하지 않았다} 내가 처리하는 것은 특정 기계의 사용 설명서, 회사 보고서, 연구 문서 등 보다 일반적인 텍스트다. 물론, 나는 문학을 너무 좋아해서 항상 배우려고 격려한다. 나도 가끔 실망하는 것처럼 번역된 작품으로 독자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것도 안다. 지금으로서는 문학 이외의 관련 작업이 적어도 하나는 있는 것은 기쁘다.


인공 지능 번역 시스템에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기 때문에 운이 좋았다.{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건 행운이었다} 나는 세 번 참여했고 각 프로젝트는 약 3개월이 걸렸다. 어느 날, 담당자가 내게 일부 텍스트를 직역하는 방식으로 번역해 달라고 요청했다. 직역하는 방식이란 프랑스어를 그대로 한국어로 번역한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클라이언트가 번역된 텍스트의 잘못된 샘플을 수집해야 한다고 한 듯했다. 몇 가지 예를 보여주겠다.


그는 하얀 밤을 행했습니다.

(실제 의미: 그는 밤을 새웠습니다.)


내 친구가 내게 엄지손가락을 한 번 주었습니다.

(실제 의미:내 친구가 나를 조금 도와주었습니다.)


사실 나한테는 이게 훨씬 쉬워 보였다. 한국어에서 적절한 단어나 표현을 찾기 위해 너무 많이 생각할 가치가{필요가}없다. 얼핏 생각하고 의미가 생각나면한 눈에 떠오른 의미를확인하거나 다듬지 않고 번역했다. 얼마나 간단한 작업인가!


그러나 몇 주 동안 작업한 후 문제가 발생했다. 일을 하다 보니 뇌가 퇴보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몇 가지 전형적인 프랑스 표현의 정확한 의미조차 잊어버릴 위험을 감수했다.{잊어버릴 것만 같았다}글쎄, 이 데이터베이스가 AI 번역의 품질을 향상시키는 데 사용될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점점 내 옆에 로봇같이 되는 것 같았다. 프랑스어로든 한국어로든 누군가가 당신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당신은 정말로 이해할 수 있는가?

[관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독백봇이 마지막에 건넨 질문에 당연히 못 알아듣지 않겠냐며 화내듯 대답하는 관객도 있다]


솬: (급하게 무대로 들어오며) 죄송합니다. 최신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한 인공지능인데도 자연스럽게 번역하는 건 어려운가 봅니다. 직역체 문장을 데이터베이스에 구축했던 건 이런 식의 의미가 불분명한 아웃풋을 만들어내지 않게끔 하려는 의도였겠죠?


너무 버거운 일에 치이다 보면 가끔은 손쉽게 해치울 수 있는 일만 하고 싶어질 때가 있죠. 직역체 번역이 일반적인 다른 번역 작업에 비해 수월했기에 처음에는 마냥 저냥 좋았습니다. 일은 일대로 쉽고 돈은 돈대로 버니까요. 근데 너무 쉬워서 동기부여가 전혀 안 되는 일에는 그만큼 치명적인 단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방금 말했듯이 어느 시점부터는 제가 마치 로봇이 된 것 같더라고요. 주체적으로, 의욕적으로 일을 해내는 성취감은 전혀 없고 그저 하루 할당량을 채우기에 급급했습니다. 쉽게 돈 버는 줄로만 알았는데, 오히려 돈을 벌려면 오늘의 할당량을 채워야만 하는 악순환이 돼버렸죠. 지루하게 짝이 없는 번역을 해야 하는 번역 지옥에 갇혔다고나 할까요. 뜻만 맞춰서 생각나는 대로 불어 문장을 옮기는 작업이었는데도 진지하게 제대로 된 번역을 했을 때보다 머리가 더 지끈거리는 날도 있었습니다.


물론 독백봇도 말했다시피 다 쓰일 데가 있으니 의뢰가 들어온 일이었겠죠. 번역이 제 본업도 아니니 거창하게 일에서 성취감을 찾으려 하지 않았어도 됐을 테고요. 사이드 프로젝트다, 용돈벌이다, 긴장을 좀 풀고 작업에 임했다면 앞뒤조차 안 맞는 한국어 번역 문장을 보며 그토록 스트레스를 받진 않았을 겁니다.


독백봇: 그러게나 말입니다.

솬: 어이구? 갑자기 이 친구도 거드네요. 지금 말투는 또 독백 읽을 때처럼 삐그덕거리지 않고 진짜 사람 같은 말투네요. 인공지능과 인간과의 싱크로율이 정말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방증일까요? 괜히 소름이 돋아서 방금 친구라고 칭했던 건 취소할게요. 퉤퉤퉤. 정말 사람처럼 대우받으려면 일단 번역부터 제대로 해야겠죠? (로봇을 바라보며 싱긋 웃는다)


[독백봇의 LED 눈썹이 또 V자로 그려지며 화난다는 표정을 관객에게 보인다. 서서히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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