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독볶이 20화

만렙으로 오해받은 북페어 초짜

독.볶.이 - 독백으로 볶은 이야기 (18)

by Fernweh

독.볶.이

(18) 만렙으로 오해받은 북페어 초짜



[널찍한 접이식 회색 책상이 무대 왼편에 놓여 있다. 책상 한 가운데에 ‘페른베’라고 쓰인 표찰이 올려져 있다. 무대 오른편의 가장자리는 카페 주방이다. 에스프레소 머신이 제일 잘 보이게 놓여 있고 그 뒤에 사이즈가 다른 커피 컵과 자질구레한 집기들이 슬쩍 보인다. 머신 앞에는 반질반질한 가죽 소파 두 개가 작은 원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놓여 있다. 조명은 무대 왼편과 오른편을 한 번씩 번갈아 5초씩 비췄다가 다시 왼편만 비춘다. 커다란 가방을 짊어진 주인공이 왼쪽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온다]


솬: 이곳은 2021년 <커넥티드 북페어>가 열리는 합정동의 한 카페입니다. 여러 창작자가 모여서 자신의 독립출판물을 선보이는 북마켓이에요. 저도 얼떨결에 그리고 참 운도 좋게 셀러로 참가하게 되었답니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스무 권 가량의 책을 꺼낸다. 책 표지에는 <말을 모으는 여행기>라는 제목이 적혀 있는데, 멀리서는 글자 크기가 큰 세 글자만 보여 <말모여>처럼 보인다) 이게 바로 저의 졸저이자 첫 독립출판 여행에세이인 <말을 모으는 여행기>입니다. 판을 이렇게 크게 벌리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스무 권을 열 권씩 2열로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는다. 그 앞에 책을 비스듬히 올려둘 독서대를 세우고 포장되지 않은 책 한 권을 샘플 용도로 올려놓는다)

페어 첫날, 책만 올려 놓았던 부스...

책을 한 번 훑어 보시라고 한 권은 샘플로 꺼내 놓았고요. 뭘 더 꺼내야 하나...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다른 부스를 한번씩 살펴보다가 주눅이 든다) 책에 등장하는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슬라이드로 재생시켜 두려고 아이패드를 챙겨왔는데요. 아이패드는 행사 시작 직전에 꺼내면 될 것 같네요. 음... 저는 자, 잠깐 카페에 가 있으려고요. 왜인지는 카페에 가서 커피 한잔 하면서 말씀드릴게요. (지갑을 챙겨서 무대 오른편의 카페로 향한다)


[무대 왼쪽 조명 OFF, 오른쪽 조명 ON]

솬: 따뜻한 라떼 한잔이요. (커피를 받아 들고 관객을 바라볼 수 있는 쪽의 소파에 앉는다)

보셨나요? 다른 셀러분들, 다들 거의 뭐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있더라고요. 저는 가져온 책 주르륵 깔아 놓고 준비를 마쳤는데요. 행사가 11시인데, 셀러는 10시까지 오라고 한 이유가 부스를 꾸며야 하기 때문이었나 봐요. 사실 전 북페어를 손님으로도 가본 적이 없어요. 독립출판이란 장르도 이번에 책을 만들게 되면서 처음 접했답니다. 좀 부끄럽네요. (괜히 멋쩍다는 듯 흠, 흠, 헛기침한다) 독립출판이 뭔지도 몰랐는데 책은 어떻게 만들었냐고요? 지금부터 짧게 그 이야기를 해 드릴게요.

N잡러. 한 가지 일만 해도 벅찬데, 요즘은 벅찬 현실을 버텨내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사람이 많죠. 저도 N잡러랍니다. 전에 들려드린 강의도 하면서 번역 일도 종종 하고 있습니다. 둘 다 고용 형태가 프리랜서다 보니 좀 더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찾던 중이었어요. 이게 저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프리랜서 일은 들어올 땐 몰아서 들어오더라고요. 강의랑 번역만으로 벅찬데 취준이라니. 쉽지 않았습니다. 이전 경력이 승무직이라서 일반적인 다른 직종으로 경력을 잇기도 어려웠고요.


그래서 발상을 전환하기로 했습니다. N잡러의 ‘N’에 들어가는 숫자를 늘리자. 그때 눈에 들어온 게 한 여행잡지에서 진행한 ‘여행작가 아카데미’였습니다. 수료한다고 책을 바로 출판한다거나 여행 관련 글을 기고할 수 있게 보장된 건 아니었지만, 일단 눈에 띄었으니 달려든 거죠. 여행 다니는 것도, 여행기를 쓰는 것도 좋아하거든요. 예전에 여행 다닐 때도 꼭 블로그에 짧더라도 여행기를 작성했답니다. 그때는 맞춤법 검사조차 안 하고 두서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쓴 ‘아무 말 대잔치’ 여행기였습니다. 저조차도 블로그 글을 다시 보면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 하면 여행 글을 잘 쓰고 여행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는지 배우고 싶었던 참이었어요. ‘여행 작가가 되서 여행 글을 쓰며 돈을 벌 거야!’, 거창하고 당찬 포부를 품었다기보다는 평소에 좋아하던 것을 일로써 경험해보고 싶다는 어렴풋한 바람이 마음에 일었답니다.


그런데, (말을 멈춘 사이 천둥소리 ‘우릉릉 쾅쾅’ 울린다) 불청객이 기어코 우리나라에도 넘어오고야 말았습니다. 네, 코로나요, 코로나. 여행길에 빗장이 걸려 버렸죠. 아카데미가 열리는 건물에 확진자가 생겨 건물이 폐쇄되고 강의는 기약 없이 연기가 됐습니다. 여행은 둘째치고 여행 아카데미조차 듣지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언제 강의가 재개될지는 몰랐지만, 수업 내용이 제일 잘 기억날 때 글을 써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짬이 날 때마다 한 편씩 여행 기사를 써 두었습니다. 과제로 내야 해서 이미 써 둔 에세이도 있었고, 쉬는 동안 글쓰기 강의를 맡았던 편집장님이 메일로 새로 쓴 글을 첨삭해주기도 했습니다. 코로나가 잠잠해진 틈을 타 아카데미는 재개됐지만 한번 걸린 여행길의 빗장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원고가 있으면 뭐 합니까, 해외는커녕 집 밖에도 마스크 안 쓰고 못 나가는 시국인데... 여행 잡지에 여행 글 기고요? 여행에세이 투고요? 당치도 않았습니다. 여행이라는 행위 자체가 멎어버리자 여행 관련 콘텐츠도 다 멎어버린 듯한 형국이었으니까요.


그러다 우연히 집 근처 책방에서 책 만들기 클래스를 한다는 광고를 봤어요. 묵혀둔 원고가 아까워서 개인 소장용으로라도 책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한 권 분량이 되려면 원고를 몇 편 더 써야 했지만 이미 써둔 원고가 꽤 많아서 부담이 덜했죠. 아카데미 글쓰기 수업 때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사를 쓰면 좋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에 착안하여 외국어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프랑스어뿐 아니라 외국어에 관심이 많아서 여행 다닐 때 현지 표현을 아카이빙해 둔 게 있었고, 그 자료를 속속들이 원고의 소재로 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모인 원고를 한 권으로 엮어서 해외여행의 기념품으로 마그넷 대신 ‘외국 말’을 모아온다는, (무대 왼편을 가리키며) 방금 저기서 보신 <말을 모으는 여행기>가 만들어졌답니다. (자기 혼자 신나서 박수를 짝짝짝 친다)

아직 몇몇 책방에 재고가 조~금 있다고 합니다만...(소근소근)

분명 개인소장이라고 했는데, 어쩌다가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요? 책 만들기 클래스 강사가 마침 커넥티드 북페어에 참가할 셀러를 모집하고 있으니 신청해보라고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거든요. 처음 책을 내는 창작자를 위한 펀딩 기획전을 병행한다고 해서 혹해버렸답니다. 펀딩이 성공하면 제작비가 조달되는 거라서 가제본 꼴랑 한 권 만들고 개인 소장으로 만족하려던 저 같은 사람도 고려해볼 만한 행사였죠. 펀딩도 페어 참가도 ‘안 되면 말고’라는 심정으로 신청했는데 덜컥 뽑혔답니다. 생각지도 못한 펀딩용 페이지부터 후원자한테 동봉할 굿즈까지 제작해야 했고, 한 권만 만들려던 책은 최소 백 부 이상 인쇄해야 했으니 인쇄소도 알아봐야 했고... (정신없었다는 듯 손등으로 이마를 한 번 훔치며 ‘휴우’하고 숨을 한 번 내쉬고) 발등에 불 떨어진 사람처럼 호들갑 떨어댔네요. 그렇게 개인 소장용 책 한 권 받아서 유유히 집으로 가려던 저는 이십 권을 짊어지고 이곳에 와 있게 되었답니다.

인쇄소 첫 감리의 현장 (두둥!)


펀딩도 처음, 인쇄 의뢰도 처음, 모든 게 다 처음이라 모든 에너지를 책 만들기에 다 쏟아부은 탓일까요? 정작 이 모든 것의 시발점인 북페어 준비를 소홀히 했습니다. 손님으로도 출판 마켓을 안 가봤으니 북페어가 어떤 모습인지 인터넷에서 한 번쯤 후기를 찾아봤을 법도 한데, 그럴 의욕이 아예 생기지 않더라고요. 행사 당일이 되면 책이랑 굿즈 들고 행사장으로 가면 된다고, 안일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오늘을 맞이했습니다. 주최 측에서는 셀러한테 장소만, 그러니까 책상과 의자만 제공한다고 분명 공지가 되어 있는데, 그마저도 제대로 안 읽고 테이블보도 챙겨 오지 않았습니다. 칙칙한 회색 책상에 아무것도 깔지 못하고 책만 덩그러니 올려놓은 것도 결국 제 불찰이었습니다. 캐리어에 잔뜩 담아 온 소품으로 자기 부스를 화려하게 수놓는 셀러들 사이에 멀뚱멀뚱 앉아 있으려니 눈치가 보이더라고요. 휑한 제 테이블을 보고 있자니 저마저도 벌거벗겨진 것처럼 부끄러워서 이곳 카페로 줄행랑을 친 거죠. 부스를 안 꾸밀 생각이었으면 차라리 행사 시작 십 분 전에 올 걸 그랬어요. 커피를 마시다 보니 어느덧 11시가 다 됐네요. 벌거숭이 부스지만, 창피를 무릅쓰고 가 봐야겠죠? (무대 왼편으로 이동)


[이동에 맞춰서 오른쪽 조명 OFF, 왼쪽 조명 ON]

(주변 셀러와 인사를 나누는 듯 몇 번 고개를 꾸벅인다. 손님을 기다리다가 관객에게 다시 독백을 건넨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무슨 일이든 간에, 초장부터 힘을 너무 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요. 초반에 치러내야 할 일에 너무 몰두하다가 방전되면 정작 가장 중요한 일을 허투루 하게 되니까요. 책을 삼백 부나 뽑은 건 궁극적으로 북페어에 참가하기 위해서였죠.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갑자기 판이 커져 버리긴 했지만, 펀딩도 인쇄도 모두 ‘처음’이라면서 우왕좌왕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아요. 제 첫 펀딩을 후원해주신 마음에 제대로 보답하고자 책에 실린 외국어 문장을 손글씨로 엽서에 싣는다든지 하며 굿즈 제작부터 품을 과하게 들였던 기억이 납니다.

첫 책이랍시고 가제본을 세 번이나 만들었는데요. 가제본을 받아 볼 때마다 성에 안 찬다고 내지 디자인부터 퇴고까지 대대적으로 수정하려고 하다가 제풀에 지치기도 했어요. 결국 책을 만든 가장 근본적인 계기였던 북페어는 기력이 없다는 얼토당토않은 핑계를 대며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북페어를 딱 한 번만 검색해봤어도 각자의 부스는 각자가 꾸며야 한다는 것쯤은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이것마저 미루고 미루다 지금처럼 휑한 부스 앞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이런 경험이 있는지 궁금해지네요. 앗, 잠시만요. 친구가 왔네요. 여기야, 여기! (반갑게 손을 흔든다)


친구: 무슨 펀딩인지 푸딩인지 한다고 하더니 이런 행사에도 다 나오고, 가만 보면 일을 참 잘 벌인다니까? 그나저나 네 자리는 왜 이렇게 휑한 거야?

솬: 아무것도 묻지 말고 책만 보고 가렴.

친구: 아니, 그냥 책만 올려두고 말 거면 이런 행사에는 왜 참가하는 거야? 다른 부스랑 너무 비교되잖아. 책상에 다른 거 올릴 만한 거, 뭐라도 좀 올려놔.

솬: 아! 아이패드! (아이패드를 꺼내 보이며 능글맞게) 여행 사진 틀어 놓으려고 가지고 왔지.

친구: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다가) 그, 그래. 잘 가져왔네. 누가 보면 북페어 참가 만렙인 줄 알겠다. 하도 이런 페어에 많이 참가해서 이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책만 툭 깔아 놓는 셀러로 착각하는 거 아냐? 하여간 가지가지 한다, 가지가지 해. (샘플 책을 펼쳐 프롤로그 부분을 대충 읽는다) 마그넷 대신 말을 모으는 여행이라며. 표지도 마그넷 모아 놓아서 찍은 사진이고. 사진에 찍힌 마그넷만 챙겨 와서 깔아 놓았어도 됐겠네. 주변에 천 파는 데 있으면 흰 천이라도 좀 떼다 주랴?

솬: 됐네요. 잔소리할 거면 썩 꺼져주세요.

친구: 진짜? 그럼 책도 안 사고 가?

솬: 아, 너 펀딩 안 했지! (굽신대는 시늉을 하며) 제가 누를 범했네요. 오셨으니 책 한 권은 데려가셔야죠. 여기 계좌번호로 만사천원 이체하시고요. (둘은 괜히 낄낄 웃는다) 그나저나 이 상태로 6시까지 어떻게 버티지, 큰일이네.

친구: 주말까지 페어 열린다며. 오늘은 어쩔 수 없고, 내일부터는 꾸밀 거 챙겨와서 꾸미면 돼지. 이체 완료! 우왕, 만 사천 원짜리 냄비 받침 생겼다.

솬: 냄비 받침... 그래, 책도 안 읽는데 여기까지 와 준 게 어디냐. 고~맙습니다.


[친구는 한 바퀴 돌아보고 온다며 무대 오른편으로 사라진다. 전체 조명이 서서히 OFF. 조명이 꺼지자 뭔가를 꺼내는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테이블 위에 뭔가를 놓는지 탁탁거리는 소리가 난다. 잠시 후 조명 다시 ON. 부스는 친구의 조언대로 마그넷 등을 이용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솬: 짜잔! 이틀 차부터는 이렇게 부스를 꾸며놓고 오시는 분들을 맞이했답니다. 다른 셀러는 이미 첫날에 셋팅을 끝내서 이틀 차부턴 행사 시작 시간인 11시에 맞춰서 오더라고요. 저만 또 열 시에 홀로 나와서 부스를 꾸몄답니다. 씁쓸하네요. 아, 씁쓸한 점이 하나 더 있어요. 잔뜩 부스를 꾸며 놓은 오늘보다 무심하게 책만 깐 어제 책이 더 많이 팔렸습니다. 아이러니하네요. 손님이 볼 때도 북페어 참가 만렙 찍은 고수처럼 보인 걸까요? 와, 저 사람은 자질구레한 장식 하나 없이 책만 놓은 거 보니 책에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한두 번 참가한 셀러가 아니구나, 하고요.

여전히 휑하지만, 그래도 업그레이드 된 둘째날부터의 부스.
분신인 리자몽도 데려다 놓았던 ...


생애 첫 북페어의 첫날은 부끄러운 모습으로 시작했지만, 다행히 주변의 여러 셀러의 도움과 조언을 받으면서 화기애애하게 마칠 수 있었답니다. 휑하던 부스에 꽃이라도 하나 얻어다 주시려고 도움 주신 주변 작가님들께 다시 한번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덕분에 북페어의 기억이 좋게 남아 지금도 가능한 한 많은 북페어에 참가하려고 한답니다. 이 이야기를 읽는 분도 어딘가에서 북페어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한다면 꼭 한번 북페어에 가 보시길 바랍니다.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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