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86)
세 명이서 눈치게임을 하면 일과 이를 외치는 둘이 살아남고 삼을 외치는 자가 탈락한다. 삼이 탈락해야 했는데 이가 탈락했다면, 이건 규칙을 어긴 삼의 잘못인가 삼을 외칠 생각도 하지 않고 불쑥 들어온 무법자를 가로막지 못한 이의 잘못인가.
얼마 전 탄 지하철, 양 옆 자리가 사이좋게 비어 있었다. 바로 다음 역, 누가 세 개의 노선이 지나가는 유동 인구가 많은 환승역 아니랄까 봐 우르르 타는 이가 몰려들었고 눈 깜짝할 새에 양 옆 자리는 그중 발 빠른 두 승객이 차지했다.
오른쪽 자리는 댄서 혹은 춤을 배우는 학생으로 짐작되는 두 젊은 여성 분. 행색을 보고 댄서라고 짐작한 건 아니었다. 둘이 방금 참가한 워크숍에서 누가 동작을 엄청 빨리 배웠다는 둥, 어떤 테크닉은 너무 어렵다는 둥 그런 얘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저렇게 짐작한 것뿐.
반대쪽 왼쪽 자리는 꼬마 소녀의 차지였다. 딸을 데리고 어디 놀러 갔다가 집으로 들어가는 길인지 아이 아빠는 빈자리를 보자마자 부리나케 노느라 지쳤을 딸을 앉혔다. 짐을 선반에 얹고 딸을 안고 같이 앉으려는 시도도 했지만, 불편했는지 다시 딸만 자리에 앉히고 아이 아빠는 서서 가는 중이었다.
그새 역 하나를 더 지나갔다. 이번 역은 내리는 이가 좀 있었지만 타는 이가 별로 없었다. 건너편 중앙의 한 자리가 비었고 오른편에 앉은 여학생이 친구에게 건너편 자리가 비었다고 가서 앉으라고 말했다. 친구는 쪼르르 건너편 빈자리로 가 앉았다. 센스로 무장한(?) 나는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다 하고 가도록 건너편 친구와 자리를 바꿔 주겠다고 선뜻 말을 건넸다. 오른편 여학생은 감사하다면서 손짓으로 건너편 친구에게 나와 자리를 바꾸라고 신호를 보냈다.
눈치게임 일. 내가 자리에 일어나 건너편으로 갔고 신호를 조금 뒤늦게 알아들은 친구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딸 아이의 옆자리가 비었음을 알아챈 아저씨는 후다닥 그 자리를 차지하고야 말았다. 딸 아이를 바라보고 었었기에, 그러니까 자리의 주인이 뒤에서 오는 걸 알지 못했던 아이 아빠는 순번으로 따지자면 눈치게임 삼의 차례였으나 눈치게임 이의 자리를 가로챘다. 눈치게임 이를 외치면서 그 자기가 자기 자리라고 알려주기라도 했어야 했던 걸까.
오른편에 앉았던 여학생과 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멀뚱멀뚱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말마따나 엉덩이만 자리에 댔다가 다시 서서 가는 신세가 된 눈치게임 이의 친구에게 소소한 사과를 이곳에서나마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