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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Jan 18. 2023

책을 집어삼킨 상상력

단상 (87)


 지난 연말부터 두꺼운 책 세 권을 연달아 읽었다. 두꺼운 책만 골라 읽겠다고 작정한 건 아니었다. 사전식 소설이라는 말을 듣고 그 신박한 구성이 궁금해 <하자르 사전>을 읽었는데, 역자 후기에 <장미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가공의 책을 소재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지난 12월, 열린책들 디에센셜 한정판으로 마침 <장미의 이름>이 출간되어서 덥석 사고 말았던 것이다. 책 내용도 내용이지만 요즘은 많이들 표지나 내지 디자인이 예쁜 책을 구입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세 번째 책은 <도롱뇽과의 전쟁> 역시 디자인에 초점을 둔 연장선상에서 고르게 된 책이었다. 저자인 카렐 차페크의 에세이를 재밌게 읽었던 터라 자연스레 그의 소설에 눈이 갔고, 책을 훑어보려고 열었더니 알록달록 색지로 구성되어 있는 게 아닌가! 우연에 작용하는 기운에도 알고리즘이 작용하나 보다.


 책을 고를 때 모종의 알고리즘이 이어 준 소소한 공통점이 위와 같다면,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이 세 권의 책이 그야말로 상상력에 집어삼켜진 책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요즘 소설(특히 한국 소설)을 읽다 보면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 한 축, 아예 현실에선 벌어질 수 없는 이야기 한 축, 극단의 두 축이 구심점이 되어 유행을 선도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전자의 대표작이 <82년생 김지영>이라면 후자의 대표작은 <보건교사 안은영>이랄까? 사실 소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영역은 무한에 가깝기 때문에 민망하기 짝이 없는 개인적 견해일 수도 있다. (공상과학 장르나 리얼리즘을 극대화한 책은 기피하는 주제에 극단이라는 말을 붙여 가며 소설의 유행 운운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런데 <하자르 사전>, <장미의 이름>, <도롱뇽과의 전쟁>은 현실과 상상이 아주 절묘하게 혼재하는 작품이었다. 두 축이 동떨어져서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포개져 있으면서 때로는 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때로는 상상에서만 펼쳐지는 이야기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식이었다. 



 

 먼저 <하자르 사전>부터 이야기해 보자. 무려 사전식으로 구성된 소설이라니! 차례대로 읽지 않고 표제어를 골라 입맛에 맞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구성부터가 놀라웠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서로 다른 세 종교의 시점에서 전 시대에 존재했다는 '하자르 민족'을 파헤치는 내용이다. 실제로 하자르 민족은 지금의 아제르바이잔 영토에 실존했던 민족이고, 세 종교의 각축장이 된 지정학적 위치에 발자취를 남긴 민족이었다. 소설에서도 그려졌듯, 종국에 유대교로 개종하는 과정 역시 실재하는 역사적 사실이란다. 이런 역사적 사실 위에 각각의 종교관에서 하자르 민족의 발자취를 짚으며 거슬러 오르는 상상력이 세 번씩 교차하며 포개진다. 종교와 관련이 깊다 보니 자연스레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나 과학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꿈 사냥꾼 같은 소재가 등장하는데, 이런 설정이 바로 <하자르 사전>이란 책을 상상력으로 집어삼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자르 사전(Хазарски речник)/ 밀로라드 파비치/ 열린책들/ 신형철 옮김

+) PLAYLIST♬ Cecil Taylor, Conquistador (정복자)




 움베르트 에코의 걸작이자 손꼽히는 명작 중의 하나인 <장미의 이름>이야 그 유명세가 워낙 어마어마해서 후기를 주절주절 풀지 않아도 '암, <장미의 이름>은 어마어마한 소설이지' 하고 끄덕일 사람이 꽤 많을 것이다. 이름만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봤다가 이제야 이 책을 읽은 나 역시 앞으로 누군가 이 책을 언급하면 명작임엔 틀림없다고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 것이다. 그만큼 스토리 자체가 일단 재밌다. 윌리엄과 아드소가 수도원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플롯부터가 흥미진진한데, 저자의 박식한 수사학과 철학이 스토리를 에워싼다. 분량도 그 깊이도 엄청 방대해서 무교이자 철학에 문외한인 내가 기독교 내 청빈과 웃음 논쟁, 수사학을 골조로 고대 문헌과 철학을 탐구하는 내용을 단박에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글만으로는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있어 결국 드라마까지 찾아본 정도... (아직 작가 노트는 읽지도 못했다...) 앞서 기술했듯, <하자르 사전> 역자 후기를 통해 가상의 책이 <장미의 이름>에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는 걸 미리 알게 됐는데, 의도치 않게 스포를 당했음에도 그 책이 짜잔, 등장할 때 전율이 일기도 했다. 


 교황과 황제 간의 갈등 구조, 기독교 내의 종파 갈등, 수도원의 삶 역시 실제 있었던 일이 그 기반을 이룬다. 이게 핵심이라면 핵심을 둘러싼 수사학과 철학의 겹은 오롯이 그 흐름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상상력을 자극한다. 다음 세기에 읽혀도 전혀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잘 짜인 플롯 덕분에 자극된 상상력이 한번 더 폭발하며 천 쪽이 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 않게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장미의 이름(Il nome della rosa)/ 움베르트 에코/ 열린책들/ 이윤기 옮김

+) PLAYLIST♬ Jacqueline du pré, Luigi Boccherini Cello concerto No. 9 in B flat




 마지막으로 읽은 (장미의 이름 작가노트는 아직이지만 아무튼) <도롱뇽과의 전쟁> 역시 일반 텍스트부터 신문 기사, 인터뷰, 회고록 등을 차용한 조판 형식과 여러 색의 색지를 사용한 디자인적 요소부터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다 하다 도롱뇽이랑 전쟁을 한다니, 누가 봐도 100% 픽션의 느낌이 강하다. 이 소설만큼은 현실의 기반 위에 상상력이 가미한 게 아닌, 허구의 영역이 상상력으로만 가득 찼을 거라고, 선입견 아닌 선입견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는데... 오히려 상상력을 통해 매섭게 파고드는 현실의 적나라한 모습이 담겨 있는 겉보기와 달리 소름 돋을 정도로 현실적인 소설이었다. 도롱뇽을 착취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문제들은 1936년에 쓰였다고는 하나 지금 이 사회에서도 만연한 문제다. 노동력 착취, 이념 갈등, 기계화, 물질 만능주의 등등. 그때에도 소재가 된 사회적 이슈가 여전히 소재가 된다는 건 여전히 저런 문제가 제대로 해소되지 않았다는 가슴 아픈 방증일지도 모르겠다.


도롱뇽과의 전쟁(Válka s Mloky)/ 카렐 차페크/ 열린책들/ 김선형 옮김

+) PLAYLIST♬ Weather Report, Palladium


 



 대가라고 칭해도 손색없을 세 해외 작가의 장편 소설을 관통하는 이미지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책을 집어삼킨 상상력'이라고 하고 싶다. 장편소설을 안 읽는 건 아니지만 일단 두 권 이상으로 나눠 출간될 정도의 분량이면 그다지 매력을 못 느끼는 내가 길디 긴 소설을 완독 할 수 있었던 건 현실과의 접점에서 너무 멀어지지 않은 상상력이 두꺼운 책을 감싸 안고 있기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 여담: 어쩌다가 <여왕 마고> 원서를 구하게 되서 읽고 있는데, 이것도 분량이 너무 많... 심지어 원서라 읽는 속도도 확 줄어서 언제 다 읽을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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