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의 소리를 찾아서

태국어 นานา n-proper. (방콕 BTS) 나나 역

by Fernweh

말을 모으는 여행기, 말.모.여. 36)


태국어 นานา [나-나-] n-proper. (방콕 BTS) 나나 역


이 소리는 수쿰빗 노선을 타고 갈 때 들리는,

방콕 여행을 추억하는 아련한 소리입니다.


* 본문의 BTS는 방콕 지상철 명칭입니다 :-)



호텔은 '아속'역 근처였다. BTS 노선도에 연두색으로 표시된 '수쿰빗' 노선이었다. 관광객이라면 자주 들르는 '씨암'역도 있어 자주 탔던 노선. 아속 다음 역이 바로 '나나'역이었다. 역 이름만 봤을 때는 나카시마 미카가 주연한 영화 ‘나나’가 떠올랐다. 그런데 실제 BTS를 타고 나나역을 지나니 이젠 영화가 먼저 떠오르는 게 아니라 이 역명이 먼저 떠오르게 됐다. 성조와 장모음 덕분에 길고 힘차게 뽑아 나오는 소리가 씨암역에 도착할 때까지 귀에 맴돈 탓이다.

연두색 수쿰빗 노선 아속 → 씨암 방향에 껴 있는 나나 역.

<말.모.여. 6편>에 썼듯, 이전 회사에서 제공한 인강을 보며 태국 글자를 뗐다. 글자를 떼고 나니 욕심이 나서 진도를 더 나가고 싶었지만, 성조를 마주한 순간 화면 우측 상단 × 버튼을 눌러 강의를 꺼버렸다. 성조는 따로 표시되지 않는다. (물론 유형성조라고 성조를 표시한 경우도 있지만) '저·중·고'로 분류되는 자음과 '장·단'으로 나뉘는 모음의 결합을 보고 알아서 성조를 파악해야 한단다. 규칙이 익숙해지면 모든 글자의 성조를 외워야 하는 중국어보다야 쉬울지 모르지만, 초급자에겐 학습을 포기하게 하는 거대한 벽이었다.


그나마 '나나'는 쉬운 구조였다. 한글 표기로 봐도 받침 없이 자음·모음 하나씩 덜렁 있다. 심지어 '나'는 반복된다. 타이 문자와 대조하면 'ㄴ'은 'น', 'ㅏ'는 'า', 그래서 'นานา'이다. 앞서 소리를 길게 뽑아낸다고 한 건 장모음이기 때문. 그들의 성조 법칙에 따르면 평성이 되는 조합이다. 위나 아래로 휘지 않는 소리라 힘차게 전진한다.

다음 역은 나 ~ 나 ~, 나 ~ 나 ~ 역입니다.

힘차게 뻗어 나오는 역명이 안내 방송 말미에 꽂힌다. 한 번만 들어도 귀가 쫑긋 서는 소리인데 친절하게도 두 번 반복해주니 '나~ 나~.'는 역명이 아닌 소리 그 자체로 각인된다. 다른 BTS 역명이 가지지 않은 명료한 소리. 어찌나 명료한지 케케묵은 여행 속에서 꺼낸 말임에도 '나~나~'를 타이핑하는 이 순간에도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다.


방콕의 지상철 BTS.


방콕 여행 중 나나역을 지나쳐 본 사람이라면 이 소리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 항공사 승무원 중 이 소리를 기억하는 동료가 꽤 많았다. 어느 날, 공항 가는 셔틀버스에서 한 후배가 '나~나~' 성대모사를 너무 똑같이 해 빵 터진 기억도 있다. 터져 나온 웃음 너머에는 다른 동기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나오지 않던 방콕 비행의 향수가 스며 있었다. (얼마나 안 나왔는지, 편조팀에 슬쩍 퇴사 전에 방콕 비행 한 번만 넣어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그날도 방콕이 아닌 호찌민 비행이었다. 성대모사 탓에 영롱한 실제 소리가 더욱 그리워진 날. 하늘길이 막혀버린 지금 시국에도 그날처럼 잃어버린 방콕의 소리 '나~나~'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져 간다.



나나역 사진이 없어 아쉬운 대로 다른 사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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